영화 <빈폴> 스틸컷

영화 <빈폴> 스틸컷 ⓒ (주)팝엔터테인먼트

 
제72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감독상을 수상한 칸테미르 발라고프는 20대 젊은 감독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연출로 세간을 놀라게 했다.

영화 <빈폴>은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영감 받아 만들어졌다. 책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여성들의 고통과 마음을 여러 형태의 목소리로 담아 쓴 르포르타주다.

기록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은 여성들이 가장 많이 참전한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책을 읽다보면, 그 공간에서 있었던 것 같은 생생한 증언들에 가슴이 아파 책장을 넘기기 어렵다. 남성들과 동등하게 싸운 여성, 여성의 몸으로 무슨 전쟁이냐는 비아냥을 감수하면서도 보탬이 되고자 전쟁터로 향했던 여성들의 비화를 들을 수 있다.
 
영화는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인 레닌그라드를 배경으로 독일과 소련의 전쟁이 끝난 1945년 당시 여성의 삶을 하나하나 비춘다. 안타깝게도 영화의 배경은 곧이어 찾아올 냉전시대를 향한 발악처럼, 눈부시게 아름답기만 하다. 정확히는 전쟁에 참여했고 전역한 지원병 두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는 형태다. 소련이 이겼지만 즐거운 분위기는 어디에도 없다. 극도의 절망감, 어수선하고 아픈 사람들로 가득하다. 승전국의 모습은 패전국과 다르지 않았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아들 파슈카를 돌보는 여성 이야(빅토리아 미로시니첸코)는 전쟁에서 겪은 뇌진탕 후유증으로 가끔 온 몸이 굳어버린다. 사람들은 유난히도 큰 키 때문에 이름보다 키다리란 별명으로 그녀를 부른다. 그녀 앞엔 힘들고 배고픈 나날들 뿐이지만, 사랑스러운 파슈카를 보며 버틴다. 그러던 어느 날 말도 안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그녀와 전쟁에서 함께한 친구 마샤(바실리샤 페렐리지나)가 돌아오며 둘만 알고 있던 비밀이 서서히 드러난다. 

레닌그라드의 사람들은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 목숨은 하찮은 게 되어 버렸다. 누구도 목숨을 담보 받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따스한 온기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사하고 있다. 서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더 어려운 사람을 돕길 마다하지 않는다. 어두운 장막이 서서히 걷히고 밝은 빛이 조금씩 이들을 비춘다. 하찮은 것들도 이야기가 되는 전쟁의 역사. 고통과 상처에 귀 기울여 본다.
 
 영화 <빈폴> 스틸컷

영화 <빈폴> 스틸컷 ⓒ (주)팝엔터테인먼트

 
영화는 기록되지 않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전쟁은 남성들의 역사, 승자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파괴된 남성의 신체와 달리 여성들은 겉이 아닌 속을 다쳐 그 상처가 잘 보이지 않는다. 뇌진탕, 영양실조, 불임 등 속이 아픈 여성들은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 비참하다. 신체가 훼손되거나 죽지 않을 만큼 고통 받고 살아 돌아와야만 영웅으로 추앙을 받는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 또한 여성이다. 그 누구도 고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프다고 말하는 것조차 사치였다.

사람들은 신체가 훼손되고 삶이 망가져도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 행복으로 여겨야만 했다.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기 전에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살아가던 안타까운 시대다.

때문에 감독은 영웅이라 불리지 못했던 진짜 영웅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꾹꾹 눌러 담았다. 유독 여성의 신체를 세밀하게 묘사한 이유는 전쟁의 군인들도 여성의 몸을 빌려 태어난 일부인 까닭이다. 남성들은 전쟁을 통해 세상을 파괴하지만 여성들은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잠재된 희망인 것이다. 영화는 전쟁의 이면에 여성들의 분투, 지원, 노고가 있었음을 미학적 영상으로 보여준다. 고난 속에서도 삶은 계속됨을 넌지시 이야기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적녹대비 조화가 러시아 명화를 보는 듯 고혹적이다. 모든 것이 망가졌으나 이야와 그녀의 친구 마샤의 공간은 미학적인 사치가 가능했다. 화려한 의상이 아니더라도 마치 크리스마스를 연상하는 적-녹색의 보색대비 옷차림이 인상적이다. 일부러 신경 쓴듯한 미장센은 붉은색의 죽음, 피와 초록색의 삶과 희망을 계속 노출시킨다. 밝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허한 회색시대에서 오로지 여성들에게만 허락된 색깔처럼 영롱하게 빛난다. 후반부로 갈수록 녹색으로 물들어가는 색감은 되찾은 희망이라 봐도 좋다.

인물들은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미학적인 영상미를 쫓는 '보는 소설' 같다. 따라서 침묵함으로써 공감하는 쪽을 택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여성들의 연대성은 오로지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을 통해서만 나눌 수 있다. 정적이 주는 묘한 긴장과 불안, 때로는 평온함을 스크린에 구현했다.
 
 영화 <빈폴> 스틸컷

영화 <빈폴> 스틸컷 ⓒ (주)팝엔터테인먼트

 
영화 제목 빈폴은 키다리라는 뜻이다. 영화에서는 후유증으로 몸이 마비되는 이야를 대변하는 단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특정 상표로도 유명한 자전거 탄 키다리 아저씨는 문학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크다. <키다리 아저씨>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고아 소녀에게 후원하는 사람을 다룬 진 웹스터의 소설이다. 여주인공의 성장과 독립이라는 소설과 영화의 주제는 묘한 기시감이 든다.

그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은 전쟁에서 아무 쓸모없다 여겨진 여성이었다. "내 속은 텅 비었어"라고 말한 이야의 마지막 대사처럼 비워짐으로 인해 다시 채울 수 있다는 희망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여성의 삶과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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