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영화는 여러 번 본다. 내 집, 내 침대에 누워 편히 휴식을 취할 때처럼 이미 다 알면서도 그래서 더 좋은 영화를 볼 때 비슷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당신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고 싶게 해요(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

1998년 개봉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좋아하는 대사다. 열 번은 분명히 더 봤고 스무 번은 아직 안 될 것 같은데 아무튼 그쯤 이 영화를 보고 또 봤다. 

영화를 여러 번 보면 새삼 재밌는 것이, 처음 볼 때는 주인공에게만 집중됐던 시선이 점점 영화 속 세상에 익숙해지면서 이전에 미처 못 본 것들을 다시 보며 새로운 감흥을 얻기 때문.

이 영화에서도 한동안은 두 주인공 '유달'과 '캐롤'에게만 집중했다. 심각한 강박증에 괴팍하기 짝이 없는 소설가 유달과 식당 종업원이자 헌신적인 싱글맘 캐롤이 중년에 다시금 사랑을 하기까지 '우왕좌왕 로맨스'에 함께 설레면서.   

그런데 며칠 전 영화를 보는데 다른 인물 하나가 그 동안과는 다른 깊이로 공감이 됐다. 코미디 장르라 각각이 등장 인물의 삶을 현실적으로 따지면 어떻든간에 늘 웃으면서 봤는데 이번엔 눈물이 났고 동병상련과도 같은 연민을 느꼈다.  

바로 유달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화가이자 동성애자 '사이몬'으로부터였다.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유달과 캐롤의 '오작교' 역할을 하기도 한 그의 개인사를 보면 부모와의 깊은 갈등으로 인해 커다란 슬픔과 고독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타고난 예술에의 순수한 열정도, 남자로 태어나 남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성정체성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려 애쓰거나 이해가 안 돼도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혹은 한 인간에 대한 존중으로 그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한 장면. 자수성가해 이룬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진 사이먼.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한 장면. 자수성가해 이룬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진 사이먼. ⓒ 트라이스타 픽처스

 
아버지는 갓 성년이 된 사이몬에게 돈다발을 쥐어주며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말로써 가족간의 연을 먼저 끊어버렸다. 사이몬은 그런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포옹하고 빈손으로 나와 자수성가를 했다. 유일하게 정을 나누는 가족은 개 '버델'뿐. 

나 역시 긴 시간 가족과의 거듭된 갈등으로 오래 방황했고 지금도 이따금씩 병이 도지듯 트라우마를 겪는다. 대부분은 '그래, 서로 상처주지 않는 적정거리에서 각자 잘 사는 것도 괜찮아' 하다가, 어떤 날은 슬픔과 원망에 이성을 잃고만다. 
 
그렇다고 내 가족이 사이몬의 아버지처럼 나를 폭행하거나, 내 존재를 혐오하고 부정하거나, 돈 따위를 쥐어주며 먼저 결별을 선언하지는 않았다. 결국에 모든 것을 묵인한 그의 어머니 같지도 않았고. 사실은 정반대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안아줄 수 있었던 사이몬이 너무나 대단하고 동시에 무척이나 가엾게 느껴졌다. 그 마음이 얼마나 추울지, 얼마나 버텨내느라 힘이 들지.

그리고 내 경우 부모가 아닌 내 쪽에서 그들을 외면하고 있는 이유가, 그들이 나를 사랑함에 있어 그 방식이 내가 결코 원치 않는 것이라는 데, 그래서 그것이 사랑이라 한들 내게는 계속 상처가 됨에 싱크홀 같은 무력감과 자책감을 다시금 느꼈다. 

사이몬에 주목하면서 모두가 해피엔딩이라고 여긴 영화의 결말도 다르게 보였다.  십수 년 만에 다시금 먼저 용기를 내어 부모에게 전화를 건 사이몬에게 그 부모는 끝까지 냉정했기 때문이다. 

사이몬: "원망은 안 하지만 병원에 안 왔을 땐 섭섭했어요."
엄마: (아버지가 들을까 숨죽이며) "가려고 했었어." 
사이몬: "이젠 괜찮아요. 제가 행복하면 됐잖아요."
엄마: "돈은..." 
사이몬: "필요 없어요. 어딜 가든 소식 전할게요. 화답 안 해도 괜찮아요."
엄마: "잘 가거라." 
사이몬: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그의 표정. 그 착잡한 표정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끝끝내 진심어린 사과도, 돌아오란 말도 하지 않는 부모. 다시금 스스로 떠나지만 실은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고, 홀로 설 수밖에 없는 사이몬.

하지만 역시 사이몬은 아버지를 안아주던 그때부터 줄곧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것이 결코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게 아님을. 그리고 더는 어찌할 수 없는 그 관계에 속박되거나 고통 받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한껏 사는 것이 우선이고 최선임도.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한 장면.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다고 해서 당신이 결코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건 아니야.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한 장면.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다고 해서 당신이 결코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건 아니야. ⓒ 트라이스타 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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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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