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단 두 가지 성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성이 존재하지만, 세상은 단지 여성과 남성으로만 정해놓기로 했다. 개인이 느끼고 판단하는 성 정체성 따위는 존중하지 않겠다고 공표했던 것이다. 폭력에 다름 아니다.
 
1926년 덴마크의 트랜스젠더 이야기
 
대니쉬걸  트랜스젠더 화가 에이나르 베게너의 삶을 그린 영화, 대니쉬 걸

▲ 대니쉬걸 트랜스젠더 화가 에이나르 베게너의 삶을 그린 영화, 대니쉬 걸 ⓒ 워킹타이틀

 
1926년 코펜하겐의 에이나르 베게너(에디 레디메인). 화가인 그는 결혼해 동료 화가 아내(게르나 베게너)가 있다. 게르나(알리시아 비킨데르)는 그릴 그림의 여성 모델이 오지 않자, 에이나르에게 모델의 옷을 대신 입고 포즈를 취해달라고 부탁한다. 에이아르가 모델 노릇을 하기 위해 여성의 옷을 입는 이 순간이 그의 모든 것을 바꾸게 된다.

매끄러운 감촉의 스타킹을 신으면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그 깃을 매만지면서, 그가 느끼는 전율의 촉각을 관객은 시각으로 전달받으며 공명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은 무심하게 입고 벗을 복장을 저토록 환희에 젖어 수행하는 두근거림을 감히 누구라고 빼앗을 수 있을까? 여성임을 수행하는 것이 저토록 행복하고 그래서 꼭 여자로 살고 싶은 갈망을 누구라고 막을 수 있을까?
 
게르나와 장난삼아 시작한 이 행위는 에이나르를 큰 혼란에 빠뜨린다. 아내의 속옷을 입어보다 너무 좋은 나머지 속옷을 입은 채 남성 양복을 입는 에이나르의 모습에서 관객은,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변곡점을 돌고 있음을 느낀다. 삶이 송두리째 뒤집어지는 괴로움을 토로하며 그는 "뭔가 달라졌어"라고 게르나에게 고백한다. 이제 달라지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는 여장을 하고 다니며 남자들을 만나고, 위험하면서 짜릿한 쾌락을 맛본다. 여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점점 커져 예쁜 여자가 되어 남자의 눈길을 받고 싶고, 멋진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감정을 누르지 못한다.
 
그럼 에이나르는 우연한 해프닝으로 여자가 되고 싶어진 걸까?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영화는 그의 어린 시절을 반추함으로써 알려준다. 동성인 남자 친구를 보며 흔들렸던 그 마음의 정체와 어려서부터 여자 옷을 보며 안달냈던 과거는, 지금의 혼란이 일시적이 아님을 알린다. 그는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던 것일까. 성염색체의 교란이 그를 남성의 외모로 태어나게 만들었지만, 그는 줄곧 자기 안의 여자를 문득문득 마주하다 숨겨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여성이 되라고 아우성치는 내면의 여자를 더 이상 밀어낼 수가 없다.
 
더는 자신 안의 여자를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다짐한 에이나르는 '릴리'로 거듭나고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아직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성전환 수술을 감행하기로 한다. 의사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매우 위험한 수술임을 알리지만, 그는 단 한 순간이라도 제대로 된 여자로 살다 죽고 싶어 한다. 마침내 그는 위험한 수술로 여자로 태어나겠다는 도박을 벌이지만, 수술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몸을 누리게 된 릴리는 여한이 없어하며 세상을 떠난다. 릴리, 에이나르 베게너는 성전환 수술을 받다 사망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실재 인물이다.
 
1926년 트랜스젠더 에이나르의 고통은 현재진행형
 
요즘 벌어지고 있는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논란을 대하다, 문득 mtf 트랜스젠더를 다루었던 이 영화 <대니쉬 걸>이 떠올랐다. 에이나르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죽음을 상기하면서 이런 물음이 던져진다. 내가 나를 여성이라 혹은 남성이라 느끼고 그로서 사는 일에, 타인의 어떤 권리가 침해당한다고 이 논란이 이는 걸까.
 
<대니쉬 걸>을 본 후 두 가지 생각을 오래 했다. 하나는 왜 그는 목숨을 걸고라도 여자가 되고 싶었을까. 다른 하나는 게르나의 웅숭깊은 사랑의 본질은 무엇일까. 에이나르의 목숨을 건 수술 감행은 나로서는 그 입장이 돼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이해불가 영역이었고, 그에 대한 게르나의 사랑과 지지는 나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였다.
 
<대니쉬 걸>은 매우 아름다운 영화고, 인간의 내면을 극도로 섬세하게 표현해 낸 수작이다. 게다가 내게 트랜스젠더에 대한 화두를 묵직하게 던졌던 영화라, 작금의 논란을 보다 번득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에이나르가 수술을 받지 않고도 위험을 느끼지 않고 여자로서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저토록 위험한 수술을 감행했을까 하는 게 영화를 보고 들었던 생각이었다.

그가 여성성에 목말라하고 여성다움을 수행하며 느낀 기쁨이 보다 온전한 여성성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만들어냈을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닐 것이다. 몸이 곧 성별이라는 절대적 기준을 강요한 사회적 규율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남성인 자신의 몸은 여성임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몸이 비록 남자지만, 그 몸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여자로서 정체성을 생성할 수 없었던 한계를 단지 에이나르 개인의 문제로 귀결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몸이 곧 성 정체성이라는 억압을 완벽히 내면화하게 만든 사회적 규율이 왜곡시킨 결과이기에 그렇다. 그는 반쪽짜리 여자가 아니라 진짜 여자가 되어 온전한 여자로 승인받고 싶었고, 이 사회적 압박이 그로 하여금 죽음을 불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몇 년 전 영화를 본 후 트랜스젠더 성전환에 대해 들었던 내 의문은 지금 들끓고 있는 트랜스젠더 논란을 보며 이렇게 바뀐다. 아이나가 성전환 수술을 받고 온전한 여자의 몸을 가졌다 한들, '진짜' 여자로 살 수 있었을까? 1926년의 아이나가 시간 여행을 해 2020년의 한국에 불시착한다면, 근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이제는 목숨을 걸고 수술을 받지 않아도 되고, 높은 수술 성공률로 수술이 성공해서 여자인 몸을 부여받더라도, 여전히 '가짜' 여자로 취급받는 진저리 쳐지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성 정체성을 떠나 이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성전환 군인을 강제 전역시킨 군의 태도가 함의하는 것은 무엇일까. S 여대 합격을 하고도 끝없이 이어지는 혐오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무서운 것이 컸다"는 심경을 밝히고 입학을 포기한 트랜스젠더 합격생의 현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몸까지 바꾸어 '여자'라는 사회적 기표에 따랐건만, 몸을 바꾸어도 "너는 가짜야"라고 끊임없이 저주하고 있는 이 지독한 현실...

직업 군인인 남성과 트랜스젠더 군인 전역 얘기를 나눈 일이 있다. 그는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여성 군인은 진입 자체가 남성 군인보다 어려워요. 경쟁률이 남성보다 세거든요. 여성 군인 입장에선 여성보다 쉽게 군에 진입한 남성 군인이 여성의 자리를 치고 들어온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의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트랜스젠더는 한국의 경우 인구 5만에 1명꼴이고 (물론 mtf 비율이 ftm 비율보다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mtf 트랜스젠더가 군인이 되겠다고 뛰어들어 경쟁을 가중시킬 거란 추측은 과도하다. 여성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직업선택과 임금에 있어 많은 차별을 받아왔다. 그렇기에 여성의 약자성은 약자와의 연대를 통해 부정의한 차별을 걷어내도록 힘을 모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남성이었던 트랜스젠더가 여성의 되어 그 영역에 진입한다고 이를 거부와 차별로 맞선다는 것은, 여성이 약자로 차별받으며 싸워 온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S대에서 벌어진 혐오 논란은 더 많은 사회적 숙의가 필요함을 일깨운다. 우리 사회의 미성숙한 성 의식이 여대에서마저도 혐오로 펼쳐지고 있는 현실은 위험하지 그지없다. 일본의 국립대인 오차노미즈 여대는 호적상 남자이지만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하는 트랜스젠더 여성의 입학을 올해부터 허용하겠다고 밝혔고, 다른 몇 개의 여자대학과 대학도 이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독일의 경우는, 2011년 성전환수술에만 근거해 성별 변경을 허용하는 것은 위헌이라 판결한 바 있다.

다시 <대니쉬 걸>로 돌아가 에이나르의 아내였던 게르나를 얘기해 보겠다. 에이나르와 게르나는 잉꼬부부였다. 그러다 남편이 돌연 여자가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 아내인 게르나의 심정은 어땠을까. 에이나르가 여자 릴리가 되는 일은 게르나에게 남편을 잃는 일이다. 큰 상실감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에이나르의 변화와 수술 감행 모두를 수용하고, 아내의 자리를 놓고 친구가 되어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한다.

한국의 트랜스젠더들에게는 어떤 가족과 친구, 동료가 있을까? 성소수자들은 타인의 혐오는 말할 것도 없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혐오당할 때 가장 괴로울 것이다. 권력이 지정한 성을 거부하고 자신이 판단한 성으로 사는 일로, 이토록 큰 상실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일에 어쩌다 우리 사회는 동의하게 된 것일까?

외국의 사례를 보면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서서히 걷히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법 제도의 견인과 더불어 성소수자들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mtf 트랜스젠더가 남성 파트너와의 사이에서 아이까지 낳고 주위의 축복을 받으며 행복하게 사는 경우, 아버지가 엄마가 되는 큰 변화에도 가족 간 신뢰와 행복이 깨지지 않고 살아가는 가족의 경우 등, 전환된 성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세계 곳곳에서 등장하고 늘어나고 있다.

이들이 타인 누구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사회 어떤 부분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 사회는 목전에 펼쳐지고 있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와 차별로 도배된 백래쉬를 멈추어야 한다. 이는 우리 모두가 '선량한 차별주의자'임을 만천하에 고백하는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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