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드웨이> 스틸컷

영화 <미드웨이> 스틸컷 ⓒ (주)누리픽쳐스


전쟁을 두려워하면서도 전쟁영화를 몰입해 본다. 아니 즐겨본다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싶다. 반전주의자를 자처하지만 솔직히 전쟁영화를 좋아한다. 왜일까 싶어 자문해 본 적이 있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타국의 전쟁 '뉴스 뒤에 숨어 자신의 안위를 확인하는 작업'과 동일한 일을 수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면, 유년시절인 1970년대, 초등학교시절부터 연례행사처럼 관람한 반공영화의 문법에 익숙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말의 영화'와 '명화극장'에서 전쟁을 소재로 한 외화가 나오면 어김없이 채널을 고정시키고 시청하셨던 아버지 덕분 아닐까싶다.
 
아버지는 참전 군인이셨고 상이용사로 국가유공자이시다. 그렇다고 팔다리가 불구인건 아니고 포탄에 왼쪽 귀를 다쳐 평생 오른쪽 귀로만 세상소식을 접하셨다. 이쯤 되면 아버지께서, 같은 연세의 노인세대의 경향이 그렇듯이 반공투사를 자처하시는 분이거나, 광화문집회의 태극기부대에 자주나가시는 분 정도로 인식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아버지는 정반대에 서 계셨다. 전쟁을 두려워했고 무엇보다도 그 참혹함을 다시는 겪어선 안 된다고 일상으로 말씀하셨다. 그렇게 보면 아버지가 전쟁영화를 즐겨보신 이유는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것을 확인하는 일종의 의례였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 전쟁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기라도 하면 무용담대신 농담처럼 "허공에 대고 총을 쏘았다"라고만 하셨다.
 
전체적으로 호흡이 과하지 않은 영화, 그러나

전쟁영화 마니아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필자 역시 미드 <밴드 오드 브라더스>를 십여 차례 반복해 보았으니 꽤나 좋아하는 수준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전쟁영화를 바라보는 필자의 시선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영화에 대해 공부를 하고 글을 쓰면서, 경험적으로 느낀 것은 전쟁영화엔 어떤 장르보다도 가치관이 뚜렷하게 서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전쟁을 반대하건, 승전의 추억이나 혹은 패전의 쓰라린 고통을 노래하던 상관없이, 장르로서 전쟁영화는 제작자의 의도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방식을 선호한다. 따라서 정치적 관점과 태도에 따라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린다. 게다가 만약 적으로 규정된 집단이 엄연히 현존하는 국가적 실체를 가지고 있다면, 나의 정체성이 어디에 귀속되었는가에 따라 사뭇 다른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장르다.
 
그러나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을 그린 영화 <미드웨이>는 좀 달랐다. 영화의 짜임새와 솜씨는 훌륭했다. 집중도를 유지하며 러닝 타임 136분을 채워나갔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제작사에서 만들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화려한 CG의 전투 장면 이외에도 등장인물들의 내적 갈등에도 초점이 맞춰진 신도 많이 삽입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호흡이 과하지 않고 안정적이었다. 논외의 말이지만 때론 저예산이 영화의 완성도를 돕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영화 <미드웨이> 스틸컷

영화 <미드웨이> 스틸컷 ⓒ (주)누리픽쳐스


그런데 정작 영화가 끝나고 나서 크레디트를 뒤로하고 가만히 복기해 보면, 왜곡이 많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왜곡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정치한 고증과 겉으로 드러난 의미와는 다른 이면의 장치가 '이데올로기 도구'로써 작동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하니 많이 불편했다.
 
영화에 숨어있는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매우 점잖은 태도를 취한다. 미드웨이에선 미군들은 줄곧 일본군을 '잽스'라고 얕잡아 부르지만, 그들은 항모를 갖춘 일본의 해군력과 제로기의 성능을 높이 평가하고 스스로를 약자라고 칭한다. 반면 일본해군 제독은 청년시절 하버드유학을 통해 접한 미국의 저력을 높이평가하고 만약 전쟁이 장기화되면 일본이 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는 미국을 공격한 것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속전속결로 전쟁을 수행해 태평양의 제해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영화 속 미국과 일본은 서로가 강한 국가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태도는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이 일본과 대등한 전쟁을 치른 것이 아니라 강대국 일본을 상대로 미국이 어려운 전쟁을 수행해 이긴 결과임을 강조하게 된다. 이로써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벌인 태평양전쟁의 승리는 패전국 일본을 교두보로 아시아를 견제할 수 있다는 확실한 명분을 확보하게 된다.
 
말하자면 영화 <미드웨이>를 통해 현재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계를 공고하게 하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적에서 가장 강력한 동맹으로 재정비된 두 나라는 일종의 운명적인 정치공동체로 재탄생한다. 강한 적에 대한 경외와 존중,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세력이었다는 일련의 프로세스를 통해 따라오는 자긍심이 작동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두 나라 모두 전쟁의 야만성보다는 '명예로운 전쟁'을 수행했다는 왜곡된 기억만이 강조되게 된다.

미군의 영웅적 면모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된 장면
 
영화 <미드웨이>에는 그 의도를 숨긴 섬뜩한 장면이 몇 개있다. 우선 일본항모를 향해 자유낙하 하듯 급강하하는 미해군의 뇌격기가 흡사 일본의 자살특공대 가미카제와 닮아 있다는 점이다. 처음엔 일본 측 항모의 사령관은 자살과도 같은 공습을 감행하는 미항공대를 보고 미군엔 저런 용기를 가진 군인들이 없다고 단정하고, 단순히 조종불능상태에서의 자유낙하일 뿐이라고 애써 폄하한다. 그러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반복되는 적군의 무공을 바라보면서 '용감한 자들'이라고 칭찬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참군인(?)이 용맹한 적군을 진정한 군인으로 인정하는 일종의 영웅서사가 마련된다.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그들은 위대했다는 무용담이 남을 뿐 적대적 태도나 분노, 앙심의 자리는 없다. 또 다른 장면 하나는, 일본항모의 사령관이 미군의 폭격으로 더 이상 임무수행을 할 수 없는 항모의 폭파를 명령하는 신이다. 일본군의 제독은 배와 함께 수장됨으로써 사무라이의 도를 다한다. 사령관의 숭고한 비장함은 그들을 전범으로 미워하고 응징할 분노마저 무기력하게 만든다. 누가 그들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신, 일본군이 미군포로를 닻에 매달아 수장시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일본군의 만행을 드러내기보다는 아군의 중요정보를 불지 않는 미군의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봄이 좋을 듯싶다. 그리고 일본군 입장에선 전쟁범죄인 고문 없이 남아 있던 포로에게 자백을 받아내는 장치로 활용된다. 다시 말해서 영화 <미드웨이>에선 전쟁범죄가 지워져 버렸다. 이는 일방향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전쟁영화의 문법과는 상이한데, 그렇다고 '반전'을 주제로 한 '탈문법적인 영화'와도 궤를 달리한다.
 
마지막으로 해석이 필요한 또 하나의 장면은, 도쿄공습을 수행하고 중국의 해안에 추락한 후 탈출한 미육군항공대의 장교를 대일항쟁을 하는 중국군이 구해 보호하던 신이다. 왕의 집무실이 폭격당한 수모를 겪은 일본은 공습작전을 수행한 미군 파일럿을 잡기 위해 중국에서 엄청난 대량학살을 자행한다. 이는 일종의 면죄부를 주는 장치라고 볼 수 있는데, 이로써 난징학살과 같은 일본제국주의 만행은 희석된다. 말하자면 일본의 만행에 원인을 제공한 것은 미국의 도쿄공습 때문이며, 불행하게도 중국에서 벌인 그 보복이 추락한 장교를 잡기 위해 벌인 작전이었다는 뉘앙스로 그려진다.
 
늙은 노병에게 남은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
 
 <미드웨이> 스틸컷

<미드웨이> 스틸컷 ⓒ (주)누리픽쳐스


사실 영화는 진실보다 신화를 선호한다. 결과적으로 기존에 그려졌던 악마적인 가미카제의 이미지는 박제화 되고 용맹한 신화적 이미지만이 재탄생한다. 영화에서 노병은 가고 젊은이들이 구명보트에 오르는 것처럼, 현재 국제정치적 이해관계에 있는 그들만의 명예로운 전쟁을 종식하고 새로운 동맹을 수행할 세대의 출현을 의미하게 된다. 영화 미드웨이는 분명 역사가 베네데토 크로체의 관점처럼,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에서 벌어진 두 나라간의 해전사가 현대사로 소환되어, 이해 당사국이 된 현재의 커넥션을 공고히 하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자부심에 가득 찬 과잉된 자의식으로 과거의 영광에 자신을 투사하기도 하지만, 늙은 노병은 아직도 지울 수 없는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말로도 표현하지 못하고 손짓으로만 허공을 가른다. 영웅적인 무용담 말고도 전쟁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침묵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영화에서 허공을 가로질러 산화된 파일럿도, 허공을 향해 대공포를 쏘아대던 수병도 하얀 십자가로 기억될 뿐, 20세기 제국의 야욕은 기세를 꺾을 줄 모르고 21세기에도 여전히 한껏 발기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자료에 의하면, 태평양전쟁이 발발 후 많은 한인젊은이들이 가미카제특공대로 차출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천황만세'를 외치며 산화했다. 태평양전쟁 발발당시 20세 전후의 젊은이들이라고 하면 어림계산으로 현재 살아있더라도 백세를 전후로 한 노병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마저 모두 다 세상을 떠나 더 이상 '침묵의 증언'조차 수행할 수 없을 때, 전쟁에 대한 영웅서사만 남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우리는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때마침 해리스 주한미대사가 내정간섭이라도 하듯 남북의 관계개선에 방해를 놓는 발언을 했다. 이로써 한반도내의 갈등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기우가 아닌 듯싶다.
 
영화 <미드웨이>에는 진주만을 습격당했을 때, 적국의 항모 위치파악을 놓친 미군의 정보장교의 경고를 무시해 미국이 일본의 공습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는 설정이 나온다.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징후를 징후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문제는 기어이 일어난다. 따라서 진짜 도발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의 언행을 주시하고 정부의 기민한 대처를 시민사회가 주문할 때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문화평론가이자 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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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교수로 재직중이며, 현재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문화정치에 관한 칼럼을 아시아투데이에 연재중입니다. 출판한 저서로는 영화로 읽는 우리시회- 역설과 아이러니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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