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나 영화, 예능을 보다가 문득 이런 말을 내뱉게 됩니다. "다시 태어나면 저 캐릭터(사람)처럼 살고 싶다." '2020은 이 사람처럼'에서는 닮고 싶은 영화와 드라마 속 캐릭터(사람)들을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 한 장면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 한 장면 ⓒ (주)노바미디어

 
"인간은 끔찍한 걸 좋아하지. 교통사고 현장에서 시체를 구경하는 인간들. 바로 그런 인간들이 권투 팬이라고 외치지만, 그들은 권투가 뭔지 모른다." -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5) 중

이 세계에 희망은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Cilnt Eastwood, 1930~ )다. 위험을 무릅쓰고 길러낸 무패 전승의 여자복서를 한 순간에 사지마비 환자로 만들어버리는가 하면(밀리언 달러 베이비, 2005),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살아남은 특수부대 '전설'을 은퇴 후 도우려던 참전 용사 손에 죽게 만든다(아메리칸 스나이퍼, 2014). 꿈도 의욕도 없이 살아가는 동양인 청년은 가까스로 취업시켰더니 몽족 갱단이 찾아와 보복을 가한다(그랜토리노, 2008).

진흙탕 속에서 희망을 건져내다가도 똥통에 처박아버리는 그에게 세상은 그야말로 개똥 같은 곳에 지나지 않는다. 사지가 마비돼 누워있는 딸을 두고도 태연히 '디즈니 랜드'를 다녀온 뒤 재산을 넘겨주라 독촉하는 어머니(밀리언 달러 베이비), 부탁이 있을 때만 연락하는 아들과 할머니의 장례식 날 할아버지의 소파와 올드카를 탐내는 손녀딸(그랜토리노)까지, 비인간적인 세상 속에는 타인과 가족의 경계도 없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는 생존의 부름은 때로 많은 것들을 정당화시키지만 속내를 들춰보면 외치는 사람들이 꼭 생존에 필요한 물건을 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럴싸한 명성과 폼나는 장난감 따위가 필요할 뿐인 이들도 겉으로는 생존을 부르짖는다. 남녀노소,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간절함을 빙자해 탐욕을 채우려 드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영화 <그랜토리노> 한 장면

영화 <그랜토리노>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주)

 
그런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작은 쾌락을 얻는 일조차도 자기 자신을 던지는 성실함을 보여주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고군분투하는 과정은 생략되고 손쉽게 과실을 얻기 위해 타인의 희생을 강요한다. 그들은 케이크 한 조각을 먹기 위해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기꺼이 청한다. 왜냐하면 희생자들의 고통은 알 바 아니기 때문이다. 입 안에 퍼질 달콤함만이 중요할 뿐, 내가 감지하지도 못할 타인의 고통 따위는 중요치 않다. 자기 손을 거쳐가는 일이 아니니 당연히 악에 대한 면역도 떨어진다. 그의 작품 속에 끊임없이 '대리자'가 등장하는 이유도 대가는 원하면서 자기 행동에 무책임한 인간들의 면모를 고발하고자 함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직접 감독과 주연배우를 맡은 수양록 같은 작품들 속에서 언제나 괄괄한 늙은이로 등장하며 세계를 향해 거친 일갈을 쏟아낸다. 이는 쉽게 살아가며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세상과 한패가 되지 않으려는 그의 결연한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희생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거짓 없는 성실한 삶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그의 극 중 캐릭터들은 지나간 영광을 상기하는 국수주의자임과 동시에 프로테스탄트적 신념의 상징인 포드 자동차를 고집한다. 성취를 얻기 위해 직접 부딪히며, 그 자신의 몸을 던진 데는 반드시 책임을 진다. 마치 상처 입으면서도 승리를 위해 싸우는 권투처럼 말이다. 진짜 승리와 명예는 그 자신이 글러브를 껴야만 오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과거에 얼마나 뛰어났건, 어떤 헌신을 했던지 간에 늙어 능력이 하향곡선을 타는 순간에는 매정하리만치 버림받는 처지에 놓인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2012)에서 거스는 과거에 전설적인 스카우터였지만 시력 감퇴 판정을 받자마자 구단에게 내침을 당한다. 극 중 묘사처럼 유능과 희생의 배신은 그들을 향한 존경을 거두고 비참한 늙은이로 전락시켜버리곤 한다. 그래서 감탄고토와 토사구팽을 수없이 반복한 그들의 인생은 절망뿐인 세계에서 어떤 희망을 꿈꾸더라도 결국 절망으로 회귀할 뿐이라는 잠언만을 간직한다.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질 않는 세상에서 빛바랜 헌신의 낱장은 무기력한 현재 앞에 코 풀 휴지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극 중 주인공으로 분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표정은 늘 어둡고 찌푸린 인상으로 가득하다. 무엇이든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특히 그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불편할 정도로 말을 쏘아붙인다. 인물 간의 대화 신에서 언제나 커튼처럼 내려깐 어둠은, 어떤 관계와 상황에서든 불길한 암막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그의 속내를 보여준다. 정직함이나 성실함 같은 마땅히 권해야 할 가치들이 오히려 자신을 파괴하는 업보로 돌아왔을 때,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그걸 지지하고 믿어야만 하는가?
 
 영화 <그랜토리노> 한 장면

영화 <그랜토리노>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 코리어 (주)

 
 
"몽족 갱단이 여기서 말썽을 부렸다면서요. 왜 경찰을 안 부르셨어요?"
"그때 말이지. 경찰이 오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아무도 응답이 없더군."

<그랜토리노>(2008) 중
"이번 주엔 뭐가 궁금해요?"
"늘 똑같죠 유일신과 삼위일체요."
"그게 믿음이라는 건 유치원생도 알아요."
"딸기, 초콜릿, 바나나 맛이 한 상자에 들어있는 겁니까?" 
"내 교회 앞에서 주님을 시리얼에 비교하는 거요?" 
"헷갈려서 그래요."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5) 중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질문은 인간의 도리와 선에 관한 한 최고의 권능과 가르침을 가지고 있는 신에게까지 닿는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절대적인 가치는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지켜지는가. 한데 왜 우리가 마땅히 따르고 추구해야 한다는 것들은 지켜지지 않고 무가치해지는가. 신은 있기는 한 건가.

권해야 할 것은 징벌을 받고 지양해야 할 것은 칭찬을 받는 세상 속에서, 세상이 시원찮은 이유에 대해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으니 영화 속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 자신을 포함한 모두에게 기대를 거둔다. 늙은 육신이 비명을 질러도 무엇이든 혼자 해결하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으려 한다. 결국은 다 똑같아질 것이니까. 살기 위해 다들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은 과정과 무관하게 서로의 등을 찌르는 지옥도의 광경이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믿지 않고 기대지도 않으며, 더러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만이 그에게는 짓밟힌 존엄을 세울 마지막 수단이 된다.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 한 장면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 한 장면 ⓒ (주)노바미디어

 
희망은 없지만 그래도 꿈을 꾸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시선이 닿는 모든 것에 '빌어먹을'이란 말을 빼놓지 않는 염세주의자 앞에 난데없이 성실한 인간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무기력하지만 제 할 일을 하고 서툴지만 끈기 있게 자신의 가능성에 몰두한다. 바로 집도 절도 없고 배경도 돈도 없는 젊은이들 말이다. 그의 경험에 따르면 이들은 어차피 망가져 사탄의 아들을 자처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이 성실한 인간들은 그 자신이 처한 시궁창 같은 상황에 젖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무시받고 천대받으면서도 묵묵히 노력을 주저하지 않는 이들. 영화 속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어차피 안 될 것'이라며 그들이 속된 세상에 섣불리 뛰어들지 못하게 말리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행동들이 자신의 철칙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가 비록 그 자신이 당해서 이미 세계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절망스럽다고 토로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그렇게 되는 걸 반기는 것 또한 아니다. 정확히는 인간이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가 될 수 없음에 절망하는 것이다. 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그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고 기약 없는 내일을 살아야만 하는가. 위선자와 남을 등 처먹는 인간들은 득세하고 정반대의 사람들은 기죽어 살아야만 하는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을 고행에 올리는 인간들이 왜 그 과실에 닿지 못하는가.
 
 영화 <그랜토리노> 한 장면

영화 <그랜토리노>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주)

 
"평생 내 뜰에서 흙만 뿌리고 있을 순 없잖냐"
"제게 돈을 주시든가요 ...(중략)... 제가 무슨 일을 하겠어요" 
"그러게 누가 널 쓰겠냐" 
"알아요" 
"그냥 농담한 거야 너도 취직할 수 있어 어디든 말이다" 

<그랜토리노>(2008) 중
"1년 동안 접시 닦은 거 자축하는 중이에요. 열세 살부터 해 온 일이죠. 대장 말처럼 37살이 돼도 전 펀치도 못 날릴 거예요. ...(중략)...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140kg*이에요. 제대로 정신이 박혔다면 집으로 돌아가서 요리라도 배워서 가족을 부양해야겠지만, 문제는 권투 하는 게 너무 좋다는 거예요. 늙었다고 이것도 못하면 저에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5) 중

*극 중 메기(힐러리 스웽크)가 자기 가족은 몸무게 순으로 말썽을 일으킨다고 한다. 즉, 가장 문제가 많은 사람임을 암시

모순적인 세계 속에서 등장한 비참하지만 성실한 인간들을 보면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해답을 내놓는다. 바로 세상에 희망은 없다고, 절망뿐이라고 그저 말만 내뱉을 시간에 그런 일들을 직접 없애러 다니는 것이다.

작중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갓 자대 배치를 받고 화장실 가는 법조차도 잊어버린 신병처럼 열심히 하려고는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풋내기들을 '제대로 노력' 하게끔, '열심히 살 기회'를 준다. 스피드 백조차 제대로 치질 못하는 메기에게 권투의 모든 것을 가르치고 타오에게 연장 쓰는 법과 일터에서 대화하는 방법까지 알려주는 것은 물론, 그들의 기회를 박탈하려는 외부 요인까지 제거하려 애쓴다. 결과까지는 어찌할 수 없지만 이런 행위들이 적어도 그들이 열정이라는 연료를 태울 수 있는 난로는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온기는 의외로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다. 왜냐하면 세상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희망에 몰두해 조금씩 쌓아온 것(비록 이것을 이용한 자들이 부귀를 누렸다 하더라도)이기 때문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저 말뿐이고 허황된 대책만을 내놓는 어른들과는 확실히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진짜 절망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절망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낱낱이 밝히는 그의 영화는 허울뿐인 세상에 각성의 일침을 놓는다. 이미 갱생이 불가능한 세상이어서 똥통에서 구더기만 기어 나올 뿐이라면 모르겠지만, 여전히 그 지옥 같은 곳에 진정 승리를 쟁취할 줄 아는, 스스로 노력하고자 애쓰는 이들이 있다면 그는 그런 이들의 노력이 헛발질로 끝나선 안 된다고 조언한다. 

뒷 배경이 없고 돈이 없는 사람들이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지만 그래서 죽을 쑤고 살아야 한다는 법도 없다. 절망적인 세상에 동조해 개망나니처럼 살아가는 게 아니라면, 작은 일이라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성실히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최소한 그만큼의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 또한 그는 희망은 주지 못할지언정 성실한 노력조차 무위로 돌리며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일에 우리가 가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떳떳한 사람에게 존중을, 그렇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쥐어줘야만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의 미래는 런타임이 끝나도 알 수 없는 영역으로 향한다. 그는 희망이 있다고 장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랜토리노>에서 생전 월트의 애마였던 '그랜토리노'를 타고 가는 청년 타우의 모습에서 더는 절망을 찾아보긴 힘든 것처럼, 그는 영화의 결말에 항상 성실한 청년들에게 드리워져있던 끔찍한 고통을 지운다.

가망 없는 세상이라지만 입으로는 절망을 말하면서 행동으로 진흙 구덩이에 빠진이들을 끄집어내는 그의 모습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가. 아마도 극 중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분신들처럼 적어도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가치를 알고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세계는 그래도 절망적인 순간들로 넘쳐나겠지만 '버틸 만은 한' 세상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말을 믿는다.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황경민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연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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