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나 영화, 예능을 보다가 문득 이런 말을 내뱉게 됩니다. "다시 태어나면 저 캐릭터(사람)처럼 살고 싶다." '2020은 이 사람처럼'에서는 닮고 싶은 영화와 드라마 속 캐릭터(사람)들을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피아니스트의 전설

피아니스트의 전설 ⓒ (주)라이크콘텐츠

 
영화가 끝난 뒤에도 <피아니스트의 전설>의 주인공 나인틴 헌드레드의 마지막 결정이 충격적이라, 거기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친구인 맥스가 그토록 애타게 부르고 설득했음에도,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니, 그 충격적 결말조차도 그의 일관된 삶에 어울리는 마침표가 아닐까란 반문을 해보게 된다. 과연 우린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건반에 여한이 남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는 걸까. 문득 역설적으로, 나인틴 헌드레드를 2020년 내 삶의 지표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900년 유럽. 당시는 미국이란 신대륙에 가슴이 부풀어 대서양을 건너는 사람들의 시대였다.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 어우러진 우아하고 멋들어진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나 배 밑창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육지에 닿기를 기다리며 견뎌내던 허름하고 추레한 사람들이든, 모두 '아메리카'란 외침에 눈을 빛내며 달려가던 시절. 그들이 탔던 배 버지니아호에는 아메리카로 함께 가지 못한 채 바구니 속에 남겨진 아기가 있었다. 

아기는 배의 제일 밑창에서 배가 어서 아메리카에 닿도록 쉴 틈 없이 석탄을 퍼부어 넣던 석탄부 대니에게 발견됐다. 아기는 자신이 발견된 박스와 연도의 이름을 따 대니 부드맨 T.D 레몬 나인틴 헌드레드가 되었다. 아기는 아버지가 된 대니의 옷으로 대신한 기저귀를 차고, 대니가 즐겨 보는 경마신문을 글읽기 교재로 삼아 자랐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인틴 헌드레드는 배가 항구에 닿아 모두가 배를 떠났을 때에도 배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런던 어느날, 꼬마의 피아노 연주는 잠든 모두를 흔들어 깨운다. 그렇게 기적처럼 자신의 음악 재능을 알린 나인틴 헌드레드는 그날부터 버지니아호의 피아노 연주자가 된다. 

세월이 흘러, 나인틴 헌드레드는 '버지니아호를 떠나지 않는 피아노 연주자'란 전설이 되어 여전히 아메리카로 가는 분주한 사람들의 발길과 함께 회자되었다. 종종 예정된 연주가 아닌, 악단장을 당황케 하며 시작되는 나인틴 헌드레드의 즉석 피아노 연주는 버지니아호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기다리는 이벤트가 됐다. 

나인틴 헌드레드적인 삶
 
 피아니스트의 전설

피아니스트의 전설 ⓒ (주)라이크콘텐츠


당시는 원심력의 시대였다. 낡은 유럽을 떠나 새로운 대륙을 찾아 나서며 자신을 던지는 시대였고, 자신의 발전을 위해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게 어디 1900년대 뿐인가.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한 후 세상은 '확장적' 프레임 속에서 살아왔지 않은가. 우리 시대 역시 자아 계발과 발전은 노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을 이끄는 '화두'였고, '화두'다. 

그런 시대에 나인틴 헌드레드와 같은 삶이라니... 사람들은 버지니아 호에만 머무는 천재적 피아니스트인 그를 처음엔 신기해 했지만, 이내 그 신기함이 사라지면 배를 떠나지 않는 그를 가리켜 자폐적 인간형이라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으로 예단하고 조롱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그의 음악적 재능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고자 했다. 당연히 그런 정도의 재능이라면 전 미국을 순회하며 그의 연주를 널리 알리는 게 '인지상정'이었던 시대였기에. 그에게는 수많은 연주의 기회가 주어졌고, 그의 음악을 레코딩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대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라는 찬사를 받던 젤리 롤 모턴은 그런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모턴은 배에 머무는 그를 겁쟁이라 조롱하며 당당하게 배에 올라 배틀을 신청한다. 모턴과 나인틴 헌드레드의 세 번에 걸친 배틀 과정은 그저 연주 경합이 아니라 나인틴 헌드레드가 누구인가를 보여준 결정적 장면이 된다. 

도전장을 내민 모턴의 연주에 나인틴 헌드레드는 그 어떤 사심을 넣지 않고 순수하게 감동하고 눈물마저 흘린다. 전장에 나간 듯한 그의 연주에 나인틴은 마치 아이처럼 가볍게 캐롤로 응수한다. 모턴과 '배틀'할 의지가 없음을, 음악으로 즐길 자세가 되어있음을 피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의지'를 당기는 모턴을 상대로 나인틴은 색다른 선택을 한다. 모턴이 연주한 곡과 같은 곡을 골라 마치 전혀 다른 곡인 것처럼 변주하며 호응한 것. 

이 두 번째 연주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들이 연주한 음악은 '재즈'다.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서양 음악에 흑인의 정서를 곁들인 재즈의 본령은 바로 그 '변주'와 '즉흥성'에 있었기 때문. 그 배틀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나인틴 헌드레드가 그저 모턴의 음악을 되풀이했다고 웅성거릴 때 나인틴 헌드레드는 가장 '재즈적'으로 모턴의 음악에 화답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음악에 음악의 동지로서 화답하며 함께 즐기자고 이야기한 것이다. 

하지만 나인틴 헌드레드가 음악을 음악으로 즐기며 함께 하자고 손을 내밀었을 때도 여전히 이겨야 한다는 의지에 사로잡힌 모턴은 그의 '권유'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세 번째 즉흥 연주로 배틀의 불을 당긴다. 더 이상 자신의 권유와 즐김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인틴 헌드레드는 예의 모턴이 했던 방식으로, 그리고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가장 극렬하고 치열한 연주로 모턴의 기를 눌러버린다. 애초에 이기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지만 굳이 그대가 원하는 게 이것이라면 기꺼이 응해주겠다는 태도로 말이다. 
 
 피아니스트의 전설

피아니스트의 전설 ⓒ (주)라이크콘텐츠


이 세 번의 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음악을 대하는 나인틴 헌드레드의 태도와 세상 사람들이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과는 다른 결을 살아가는 그의 삶의 맥락이다. 세상이 '재즈'를 소비할 때, 그는 본령으로서의 '재즈'라는 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그런 그가 세상 사람들이 원하듯 세상 밖으로 나갔을 때 행복할 수 있을까란 의문과 함께, 자신이 직접 연주하지 않는 음악을 거부하는 그의 음악적 고집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굳이 세상의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던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변화'의 시간이 다가왔다. 레코딩으로 그의 음악을 남기겠다는 사람들과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던 그의 눈에 띈 여인. 이후 나인틴 헌드레드는 그녀가 배에서 내리자, 오래도록 그에게 세상 밖으로 나가라 종용하던 맥스에게 이제 밖으로 나가겠다는 결심을 알린다.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손 흔들어 그의 하선을 반기던 날. 그는 배에서 내리다 문득 눈 앞에 펼쳐진,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러나 한없이 열린 세상을 바라본다. 그렇게 잠시 계단에서 그곳을 바라보던 나인틴 헌드레드는 다시 배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은 영화의 결말에서 본 것과 같다.  

자신이 잘 칠 수 있는 단 한 대의 건반을 택한 남자

88개, 피아노의 건반 개수처럼 시작과 끝이 있는 곳이 나인틴 헌드레드에게는 버지니아호였다. 그에게 세상은 그런 88개의 건반이 무수히 펼쳐진 곳이다. 그는 무수히 펼쳐진 88개의 건반 대신, 자신이 잘 칠 수 있는 단 한 대의 건반을 선택했다. 

2020년의 벽두에 그렇게 세상에 펼쳐진 무수한 건반에서 뒤로 물러선 나인틴 헌드레드를 떠올리게 되는 건, 1998년에 개봉한 영화를 2020년 마스터피스로 다시 찾아보는 우리의 마음과도 같지 않을까. 무려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 영화가 여전히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건, 그 자체로 마스터 피스인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늘 새로운 것, 그리고 더 넓은 세상을 갈구하며 뛰어가는 우리에게 단 한 척의 배 안에 있는 피아노만을 자신의 삶으로 살았던 나인틴 헌드레드의 모습은 어쩌면 이해불가한 삶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새로운 것, 더 많을 것을 갈구하면서도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지 못해 허덕이고 있음을 확인한 순간, 나인틴 헌드레드에 대한 마음, 그리고 삶에 대한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영화 속에서 나인틴 헌드레드 앞에 무릎을 꿇었던 모턴처럼.  

어쩌면 우리는 그가 선택했던 88개의 건반조차 제대로 쳐내지 못한 채 또 다른 건반이란 잿밥에만 홀려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2020년 벽두에 나인틴 헌드레드의 삶을 떠올리게된 건 그래서일지 모른다. 기꺼이 자신이 몸담았던 공간과 자신이 연주한 피아노와 함께 인생을 마무리하려 한 그의 겸손과 최선이 떠오른 이유 말이다. 

그렇기에 올해는 각자 모두 진짜 자신의 것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고 최선을 다 하는 것에 몰두해 보면 어떨까 싶다. 자신이 직접 연주하는 그 순간이 아니라면 그건 자신의 연주가 아니라던 나인틴 헌드레드의 그 '외통수 고집'처럼 말이다.
 
 피아니스트의 전설

피아니스트의 전설 ⓒ (주)라이크콘텐츠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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