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나 영화, 예능을 보다가 문득 이런 말을 내뱉게 됩니다. "다시 태어나면 저 캐릭터(사람)처럼 살고 싶다." '2020은 이 사람처럼'에서는 닮고 싶은 영화와 드라마 속 캐릭터들을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영화 <벌새> 중 '영지쌤'과 주인공 '은희'의 모습.

영화 <벌새> 중 '영지쌤'과 주인공 '은희'의 모습. ⓒ (주)엣나인필름

 
2019년 한국 영화계에는 <기생충>이라는 큰 수확이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주목할 부분이 있다면, 바로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의 서사를 담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점이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가 그 중심에 있었다. 성수대교의 붕괴, 문민정부에 대한 높은 기대, 김일성의 죽음 등 수많은 일이 벌어진 1994년 서울, 그 불가항력적 세상에서 살아가는 열다섯 살 은희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를 보다가 가장 먼저 깨닫게 된 지점은 은희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차적 관계를 형성하는 가정에서는 대화가 상실되었다. 부모님은 은희의 세상이 무엇인지 도통 관심이 없다. 아버지는 자신의 감정을 나누는 데에 미숙하다. 위압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어머니는 "공부 열심히 해서 여대생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빠가 동생 은희에게 가하는 폭력은 일상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학교는 은희에게 든든한 준거 집단으로 작용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는 야만적 구호를 제창하도록 하는 교사 정도가 있을 뿐이다. 은희에게 '1994년 서울'은 다양한 방식의 폭력과 억압이 작용하는 공간이다. 남자친구와의 연애도, 친구 관계도 마음 먹은 것처럼 풀리지 않고, 상처받기만을 반복한다. 
 
은희의 삶도 빛난다
 
 영화 < 벌새 >의 등장 인물 영지 선생님을 연기한 배우 김새벽

영화 < 벌새 >의 등장 인물 영지 선생님을 연기한 배우 김새벽 ⓒ (주)엣나인필름

 
어느날, 그런 영지에게 한문 학원 교사 '영지쌤(김새벽)이 나타난다. 영지쌤은 대뜸 칠판에 이런 글귀를 써놓는다. '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얼굴을 아는 사람들 중에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가?).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 온 사람이 없었다. 여백이 가득한 이 영화에서 유독 영지쌤이 가지고 있는 '여백'은 두드러진다. 영지쌤은 많은 말을 하지 않고, 공허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영지쌤은 누구보다 은희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이다. 10대 아이가 하는 말이라고 해서 허투루 듣지 않는다. 그녀는 지적 허영심을 뽐내려 들지도, 학교 선생처럼 억압적인 표현을 쓰지도 않는다.
 
은희 역시 영지에게 마음을 열고 "내 인생에 빛나는 날이 올까요"라고 묻는다. 영지쌤은 은희에게 해야 할 말을 하는 인물이다. 맞지 말라고, 어떻게든 맞서 싸우라고 한다. 이토록 든든한 어른과의 상호 작용을 거치면서, 은희는 변해간다.

자신을 함부로 평가하고, '되바라졌다'라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에게 "나 성격 안 더러워!"라고 외친다. 꾹 놀러 놓았던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장면이면서, 은희의 성장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준 장면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통쾌한 손뼉을 쳤던 관객은 나 뿐일까.

영화 후반부 영지쌤과 은희의 예상 못한 이별이 더욱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 역시, 은희에게 있어 찬란하게 빛나는 존재가 사라졌다는 안타까움에 있다. 은희의 절실한 날갯짓에 반응하는 등대는 이 영화에서 영지쌤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가 끝난 이후의 은희를 걱정하지 않는다. 은희는 굳세게 성장해왔고, 영지쌤이 바꿔 놓은 은희의 세계는 새롭게 줄기를 뻗었을 것이다. 영지쌤의 말처럼, 은희는 이후로도 세상과 부딪히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벌새>란 작품을 난 두세 차례 꺼내 보곤 했다. 그때마다 은희의 미성숙한 인생이 빛나길 바라며 눈물을 흘렸다. '영지쌤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 역시 그때마다 머리를 스쳐갔다. 우리는 누군가의 세상을 향해 의미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 우리는 세상을 향해 날갯짓을 펼치는 또 다른 '은희'에게 '영지쌤'이 되어 줄 수 있는가.

1994년의 영지쌤은 은희에게 자신을 '휴학을 여러 번 한 복학생'이라고 소개했다. 20대 후반인 나는 영지쌤과 비슷한 나이가 되어 있다. 1994년과 같이,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2020년의 새해. 나는 영지쌤이 은희에게 남긴 편지 내용을 되새겨 본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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