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나 영화, 예능을 보다가 문득 이런 말을 내뱉게 됩니다. "다시 태어나면 저 캐릭터(사람)처럼 살고 싶다." '2020은 이 사람처럼'에서는 닮고 싶은 영화와 드라마 속 캐릭터들을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70~80년대 세계의 많은 어린이들은 공중전화박스에 들어갔다 나오면 어리바리한 데일리 플래닛 기자 클락 켄트에서 정의를 수호하는 영웅으로 변신하는 슈퍼맨을 동경했다. 물론 한국에서는 어설픈 옆구르기 한 번에 동네 바보에서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영웅으로 변신하던 에스퍼맨이 되고 싶은 어린이들도 적지 않았다(그리고 그 시절 동네바보와 에스퍼맨을 연기했던 배우는 21년 후 감독으로 할리우드 정복에 나섰다가 큰 시련을 경험했다).

당시 슈퍼맨과 에스퍼맨을 동경하던 어린이들은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신해철을 흠모하게 되고 입시와 대학생활, 사회를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영웅들과 멀어졌다. 가끔 나이가 들어서도 영웅들을 동경하는 주변 사람이 있으면 "아직 철이 덜 들었다"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곤 했다. 이는 4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될 때까지 전혀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아온 내가 걸어온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5~6학년 이후 내 삶에 사라졌던 '영웅'이라는 존재는 서른이 훌쩍 넘어서 다시 내 안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유치하다고 할 법한 내 안의 영웅본능(?)을 일깨운 주인공은 바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의 영화들이다. 아이언맨, 토르, 헐크, 블랙 위도우, 닥터 스트레인지, 스파이더맨, 블랙 펜서, 캡틴 마블 등 많은 영웅들이 있지만 그 중 내가 가장 동경하는 이는 단연 캡틴 아메리카다.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사랑 찾아 떠난 스티브 로저스의 삶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로저스는 넘치는 애국심으로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강화인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로저스는 넘치는 애국심으로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강화인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 마블 엔터테인먼트

 
1918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스티브 로저스는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자들에 대항하는 군인을 꿈꾸는 청년이다. 로저스는 주소지를 5번이나 바꿔가며 입영신청서를 내지만 번번이 탈락했다. 천식, 류머티스 열, 만성 감기, 고혈압, 심계항진, 만성피로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화려한 병력 때문이다. 하지만 로저스의 가슴 속에는 162cm 43kg의 왜소한 체격에는 나타나지 않는 깊은 애국심과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강한 정의감이 불타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군대에 들어간 로저스는 강화인간 프로젝트에 참가해 188cm 109kg의 건장한 체격을 자랑하는 '캡틴 아메리카'로 거듭났다. 레드 스컬의 음모를 막고 고장난 비행기를 탄 채 추락한 로저스는 70년 동안 잠들어 있다가 2011년 어벤져스의 멤버로 합류했다. 치타우리 종족과의 일전 때는 자존심 강한 히어로들도 캡틴 아메리카에게 작전지시를 맡겼을 정도로 캡틴 아메리카를 어벤져스의 확실한 리더로 인정했다.

<캡틴 아메리카-윈터솔저>(2014)에서는 70년 만에 만난 절친 버키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고 자신이 속한 단체 쉴드마저 하이드라에게 지배 당했다.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블랙 위도우와 팔콘, 닉 퓨리 국장과 힘을 합쳐 하이드라의 음모를 막아냈다. 특히 "너는 내 임무일 뿐"이라며 끝까지 캡틴을 막아선 버키 앞에서 "그럼 끝내. 난 너와 끝까지 함께할 거니까"라며 끝내 친구와의 싸움을 포기하고 헬리게이터에서 추락했다.

사실 군인에게는 승리를 위한 확실한 전략·전술을 짜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는 친구, 그리고 정의를 위해서는 한없이 무모해진다. <캡틴 아메리카-시빌워>에서는 친구를 위해 아이언맨과의 대결을 선택했고 <어벤져스 - 인피니티워>와 <어벤져스-엔드게임>에서는 한낱 강화인간 주제에(?) 타노스에게 정면으로 덤벼든다. 일단 본인이 옳다고 판단을 내리면 캡틴 아메리카에게 승산은 그 다음 문제다.

그렇다고 캡틴 아메리카가 마냥 싸움과 전쟁만 좋아하는 히어로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로저스는 <캡틴 아메리카-퍼스트 어벤저>에서 만난 선임장교 페기 카터라는 연인이 있고 그녀를 잊지 못해 샤론 카터(에이전트13)와의 러브라인도 애써 외면한다. 결국 캡틴 아메리카는 타노스를 완전히 무찌른 후 페기를 만나기 위해 과거로 떠난다. 캡틴 아메리카는 그토록 많은 전투를 치렀으면서도 마지막엔 사랑을 찾아 떠나는 낭만주의자이기도 하다.

차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캡틴 아메리카의 힘과 정신력, 그리고 리더십
 
 캡틴 아메리카는 친구를 위해 어벤저스의 에이스 아이언맨과의 대립도 마다하지 않았다.

캡틴 아메리카는 친구를 위해 어벤저스의 에이스 아이언맨과의 대립도 마다하지 않았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캡틴 아메리카가 가장 아끼는 히어로가 되면서 '나도 캡틴 아메리카 같은 삶고 싶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는 현실에서는 물론이고 상상 속에서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 팔로 헬리콥터를 잡아 버틸 수 있는 괴력이나 고층 엘리베이터에서 추락하고도 부상 하나 없이 멀쩡하게 일어날 수 있는 내구성과 회복력, 주행중인 자동차보다 더 빨리 달리는 각력 따위는 둘째 문제다.

일단 나에게는 캡틴 아메리카의 능력 중에서 가장 강하고 위대한 능력으로 꼽히는 불굴의 정신력이 없다. 아이언맨, 토르, 스파이더맨 등 MCU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슈퍼 히어로들은 여러 에피소드와 고난을 겪고 좋은 동료들을 만나면서 성숙해지는 '성장형 캐릭터'들이다.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는 체격이 작았을 때부터 정신적으로는 사실상 성장이 끝난 '완성형 캐릭터'다. 애초에 캡틴이 가진 초인적 정신력을 인간이 넘보는 것 자체가 무리다.  

특히 <캡틴 아메리카>와 <어벤져스> 시리즈에 걸쳐 4번이나 등장하는 "하루 종일 할 수도 있어"는 그 어떤 시련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캡틴 아메리카의 강한 정신력을 대변해 주는 대사다. 캡틴 아메리카는 <인피니티 워>에서 헐크도 쉽게 쓰러트린 타노스의 주먹을 잠시나마 막아내기도 했다. 학창 시절부터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에 익숙했던 내가 캡틴 아메리카 같은 불굴의 정신력을 발휘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나는 학창시절부터 그 흔한 반장이나 부반장도 해보지 못했고 군대에서도 분대장 한 번 하지 못했다. 스무살 때 PC통신에서 약 1년 동안 모 여가수 팬클럽 회장을 역임했던 게 40년 넘는 인생에서 가장 큰 감투였다. 누군가를 이끌어 가는 리더십 따위는 애초에 나라는 캐릭터에는 장착되지 않은 아이템(?)이다. 따라서 영웅들의 단체인 어벤져스의 정신적 지주이자 리더인 캡틴 아메리카의 리더십과는 비교 자체가 힘들다.

그나마 억지로 캡틴 아메리카와 나의 공통점을 찾으려 하면 '고지식한 성격' 정도가 있다. 하지만 자신이 정의라고 믿는 일에는 그 어떤 위험에도 온 몸을 내던지는 캡틴 아메리카의 고지식과 친구나 후배와 의견 충돌을 겪을 때 목소리를 높여 주장을 관철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내 고지식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이밖에도 캡틴 아메리카를 가장 애정하는 내가 캡틴 아메리카 같은 삶을 살 수 없는 이유는 수없이 많다.

정의롭고 도덕적인,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2020년을 꿈꾸며
 
 캡틴 아메리카는 목숨을 건 위험한 전투에서도 언제나 선두에 서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캡틴 아메리카는 목숨을 건 위험한 전투에서도 언제나 선두에 서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사실 새해 목표로 '캡틴 아메리카 같은 삶'을 바라는 것 자체가 '레드벨벳 아이린과의 연애'를 새해 소망으로 바라는 것만큼이나 큰 욕심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다. 캡틴 아메리카는 스미소니언 박물관 전시관 안내방송에서 "국가의 상징, 세상의 영웅, 캡틴 아메리카의 정신은 명예, 용기, 희생입니다"라고 소개될 정도로 MCU의 세계관에서도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최고의 히어로이기 때문이다.

캡틴 아메리카는 '미국대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미국 패권주의를 추구하는 캐릭터는 결코 아니다. 사실 캡틴 아메리카는 '캡틴 아메리카'보다는 '캡틴 저스티스'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릴 정도로 미국의 이익보다는 도덕과 정의, 그리고 친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캐릭터다. 따라서 캡틴 아메리카 같은 영웅의 삶을 사는 건 불가능해도 캡틴 아메리카 같은 정신과 마음가짐을 추구하면서 사는 건 누구나 가능하다는 뜻이다.

사실 '친구와 사이 좋게 지내면서 정의롭게 살기'는 누구나 살면서 지겹도록 많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그리고 시대를 탓하며 이를 외면하면서 살아온 게 벌써 몇 년째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2020년 새해 목표를 감히(?) '캡틴 아메리카처럼 살기'로 정했다. 패배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도 타노스에 맞서 방패끈을 고쳐 매던 캡틴 아메리카의 의지를 떠올린다면 매년 한 달도 못 가던 새해 목표가 올해는 조금 오래 갈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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