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리키> 포스터

<미안해요, 리키> 포스터 ⓒ 영화사 진진

 
"실업수당을 받은 적이 있어요?"
"아니요. 자존심(Pride)이 있지."


영화 <미안해요, 리키>가 시작되고 화면이 암전된 상태에서 들려오는 대화부터 불안했다. 두 사람의 대화였는데, 한 사람은 분명히 주인공인 리키일 테다. 그의 태도는 취조실이 아닐까 싶을 만큼 주눅 들어있다. 리키의 인생은 몇 마디의 답변으로 감히 요약되었고, 상대가 궁금해질 때쯤 화면이 밝아진다. 역시나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질문을 이어가는 멀로니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몸을 상대에게 기울인 채 조심스레 대화를 이어가는 리키가 보인다. 리키는 이제 막 택배 일을 시작할 참이었고, 멀로니는 그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는 관리인이 분명하다. 그들의 자세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당신은 이제 개인사업자입니다. 모든 것은 당신이 결정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리키, 당신이 우리의 팀에 합류하는 거예요. 함께 하시겠어요?"(멀로니)
"물론이죠.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간인데요."(리키)


분명 모든 말이 예의 바르게 선택되었음에도, 멀로니의 제안은 계속 내 기분을 거스르고 리키의 결정은 불안하다. 리키는 실업수당을 신청하지 않는 것이 자존심이라고 생각하는, 맨체스터 출신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인 남자다. 그가 과연 스스로의 선택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을까? 영화는 시작부터 이미 답을 알려준 것만 같다. 영화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인데, 말이다.

켄 로치 감독의 새 영화가 나올 때마다 나는 기대와 걱정이 함께 밀려왔다. 노장의 카메라는 해가 쌓일수록, 점점 더 우리 이웃의 누군가에게로 다가와 있었다. 그들의 삶을 아무런 필터 없이 그대로 보여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역사 속 누군가의 이야기일 때는 멀리할 수 있었던 삶이, 당장 나의 것으로 내려오니 모든 장면이 마음을 할퀴고 상처를 낸다. 언제부터인가 감독의 영화엔 전문 배우들도 등장하지 않으니, 이것이 영화인지, <다큐 3일>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그만큼 리키네 집 네 가족의 삶은, 당장 대한민국 어딘가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것과 닮아 있었다. 나는 그들의 삶을 견디기 힘들었다.

"라이자. 왜 아직 안 자고 있어? 엄마가 보살피는 할아버지가 안 주무시려고 해서 늦었어. 미안해. 내일부터는 꼭 일찍 들어올게. 사랑해, 우리 딸."(애비)

늦게 들어온 엄마를 기다리느라 깨어있던 딸과의 약속을, 애비는 지킬 수가 없다. 영화에서 애비의 직업은 거동이 힘든 사람의 집을 찾아가서 보살피는 요양 보호사로 보인다. 그들의 집에 시간을 맞춰 찾아가야 하는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던 자동차는, 리키의 택배용 밴을 계약하기 위해 팔아버렸다.
 
 자신이 구입한 택배차 옆에 있는 리키의 모습.

영화 <미안해요 리키> 스틸 컷 ⓒ 영화사 진진

 
분명 런던 정도의 대도시였다면 공공 교통수단을 조금은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겠지만, 영화의 배경은 선더랜드를 연고팀으로 갖고 있는 지방의 중소도시이다. (택배 물품을 배달하던 리키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보고 선더랜드 팬인 고객과 설전을 벌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영국적인 장면이다.) 그녀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버스에서 보내야 했고, 약속시간에 계속 늦어야 했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라 믿었는데, 가족의 균열은 걷잡을 수가 없다.

"왜 학교에 가지 않는 거야? 대학에 가면, 너는 나보다는 좋은 직장에서 좋은 삶을 살 수 있잖아!"(리키)
"친구의 형처럼? 그 형은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일주일 내내 콜센터에서 일을 해야 하고, 주말이면 피폐해진 마음을 치료하겠다며 술에 빠져서 지내는데! 그게 더 나은 삶이야?"(셉)


더 이상은 방향을 보여주지 못하는 부모의 삶은, 아이들의 삶에 어떠한 희망도 전해주지 못한다. 불안은 증폭되어 전달되고, 가족은 점점 길을 잃는다. 부모의 책임감을 비난하겠다고? 그들은 매일 열네 시간씩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다. 그들의 삶을 지켜보자니 내 삶마저 피곤해진다. 어쩌면, 그들은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다시 리키의 첫 번째 대답으로 돌아가야겠다.

젊은 시절의 나는 내 실패가 온전히 나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의 성공한 삶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나의 현실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일터에서의 불안은 노후의 불안으로 연결되어, 불합리한 현실을 벗어날 용기마저 빼앗아 버렸다. 그저 내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니, 내가 좀 더 '노오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렇게 일 년에 300일을 넘게 일하고 매일 새벽에 집에 들어가는 삶을 힘겹게 버틴 후에야, 질문을 바꿀 용기가 생겼다. 이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마흔을 훌쩍 넘긴 나는, 더 이상 실업수당을 받는 것이 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고 믿는다. 내가 삶에서 해야 할 책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면, 삶에 대한 안정감은 국가가 당연히 제공해야 하는 것이라 믿는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어떠한 방식으로든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는 것도, 자신의 삶을 돌보고 가족을 챙기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는 것도,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국가와 개인 사이의, 스스로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탄생'으로 맺어진, 계약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키는 이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영화 속에서 리키는 고민하다가 렌트비를 내는 대신 차량을 구매하기로 한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스틸 컷 ⓒ 영화사 진진

 
삶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매번 숙제를 던져준다. 매일매일 몸은 쇠약해지고 활기를 잃어가고 있는데,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점점 더 복잡해진다.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늙어가는 몸은, 언젠가, 누군가에게 의탁해야만 할 것이며, 삶을 채웠을지도 모르는 환희는 결국 세상을 떠나는 순간의 미안함과 수치심으로 흐려질 것이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을 내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가? 불가능하다. 나는 내 삶을 나 혼자서 마무리할 수 없으니, 세상이 도와줘야 한다.

시골집에 생긴 벌집 제거를 놓고, 지금은 곁에 안 계신 아빠와 한바탕 싸운 기억이 났다. 나는 혹시라도 다치실 수 있으니 119에 전화해서 부탁해야 한다고 했고, 아빠는 그런 일로 바쁜 사람들한테 폐를 끼친다며 당신이 직접 하시겠다고 했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오랜만에 가족이 모인 날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싸움으로 목소리가 커졌다. 

"아빠, 우리 세금 내잖아. 이런 거 해달라고 내는 거야."
"이런 (개인적이고 사소한) 일을 왜 그 사람들한테 해달래? 내가 해, 내가 한다고!"


아빠는 아무런 안전장구 없이 모기약과 막대기를 챙겨들고 나오셔서는, 거칠게 벌집을 떼어내기 시작하셨고, 나는 어린 조카들을 서둘러 집으로 들여보내며 계속 아빠에게 화를 냈다. 나는 리키를 보며, 아빠 생각이 났다.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는 쑥스러워하셨던 나의 아빠가 말이다. 그래서, 더 화가 났는지도 모르겠다. 리키네 가족의 문제는 결코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당당하게 그들의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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