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블랙독> 한 장면

tvN 드라마 <블랙독> 한 장면 ⓒ tvN

 
"성순이가 바나나와 수박 두 개를 샀다."
 
여기서 바나나를 과일이 아니라 사람으로 해석하면 성순이와 바나나라는 사람 둘이서 수박 2개를 샀다는 중의적 해석이 가능하다?
 
지난 7일 방송된 tvN 월화드라마 <블랙독> 8회에서 시험 문제 오류 시비를 보여주며 나온 장면이다. 이 장면을 어이없어 하며 본 시청자들이 적지 않았을 테지만, 학교에서는 심심찮게 겪는 일들이다. 현직 교사인 나는 시험 문제를 출제하다 보면 한국어가 얼마나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내신이 대학입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언어의 다의성이 오지선다 문제의 빈틈을 파고드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실 한 번쯤은 <블랙독>과 같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학교, 그리고 교사의 전문성에 중심을 둔 드라마 말이다. 그동안 학교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는 많았었다. 시간이 흐르며 나름 현실에 점점 다가가는 쪽으로 변화하긴 했다. 30년 전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70년대까지 이어져오던 순수한 청춘이 아닌, 성적 경쟁에 찌든 불쌍한 학생을 그려냈다. 

20세기에 학교를 다룬 드라마로는 <고교생 일기>와 <호랑이 선생님> 등이 있었다. 제목으로만 보면 고교생 일기는 학생이 주인공이고 호랑이 선생님은 교사가 주인공인 것으로 보이지만, 둘 다 학생이 주인공이었다. 21세기로 넘어오며 사립학교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많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사립학교법 개정 등 사립학교의 전횡과 비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맞물려 나타난 현상이다. 재단이사장과 재단에 꼼짝 못하는 교장선생님과 일종의 '참교사' 느낌의 교사가 등장한다. 적지 않은 드라마가 교생이나 기간제 교사에게 '참교사'상을 씌웠다.

겉에서 봤을 땐 교사가 주인공으로 보이지만, 실제 이야기를 끌어가는 핵심은 학생이었고, 중심은 공부가 아니었다. 뭔가 거대한 구조적 비리가 참교사를 만드는 준거점이 됐다. 하지만 학교 내에 벌어지는 갈등을 그런 구조적 문제에서만 찾는 것을 보곤 제작진의 상상력의 빈곤, 현장성의 결핍, 디테일의 부족이란 생각이 들었다. 
 
입시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 SKY 캐슬 >
 
 드라마 <블랙독>의 한 장면

드라마 <블랙독>의 한 장면 ⓒ tvN


20세기에 끄트머리에 시작하여 약 18년 간 시리즈로 제작된 KBS 드라마 '학교' 시리즈는 진짜 학교를 보여준다는 컨셉으로 처음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학교는 고발의 대상이었을 뿐 생활의 공간이 아니었다. 결국 참교육의 이야기로 풀어가다가 벽에 부딪히자 나온 새로운 콘셉트는 입시를 정면으로 다루는 것이었다. 2010년 방영된 <공부의 신>은 국영수 공부 그 자체로 승부를 보게 하였다. 드라마를 보는 학생들에게 잠시나마 판타지를 보여줌으로써 작품은 성공(시청률 25.1%)을 거두었지만, 말 그대로 환상 속의 공부에 불과하였다. 공부해서 서울대학(극중에서는 천하대학) 가는 게 현실에선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2019년 드라마 < SKY 캐슬 >은 아예 입시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에둘러 가지 않고 바로 '서울대 의대'라는 실명의 대학과 학과 이름을 등장시켰다. 어떤 면에서 리얼리즘이고 다른 면에선 욕망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상업성의 극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교를 다룬 드라마는 교훈적이다. < SKY 캐슬 >마저 사교육에 애쓰던 엄마들이 참교육에 눈을 뜨는 아름다운 결말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학교는 교사라는 전문직과 비슷한 연령대 학생들이 대부분 거쳐가는 생활의 공간이다. 병원이 의사라는 전문직과 모든 사람들이 한번 씩 신세를 지는 일상의 공간이듯 말이다. 한때 한국 의학 드라마들은 '병원에서 연애하는 이야기'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선 의사들의 전문성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 적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들이 아닌 교사들에, 학교 현장에, 그들의 전문성에 초점을 맞춘 <블랙독>의 등장이 반갑다. 이 작품은 1회부터 그동안 교육 소재 드라마들이 천편일률적으로 그려왔던 구도, 상황을 깼다. 여타 드라마들은 교사 채용을 그릴 때 흔히 '비리'를 언급했지만, <블랙독>은 '시범강의' 장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또 학생부를 서술하는 방식과 내용, 동료 교사와 수업 내용을 협의하는 과정, 교육관과 실력의 차이에서 오는 교육진로부장 박성순 선생과 3학년 부장 송영태 선생의 대립 구도를 명확히 보여준다. 더불어 갑자기 학교로 들이닥쳐 선생의 실력을 확인하려는 한 학부모의 모습을 통해, 교사들이 어떤 전문성을 가지고 일하는지 알려준다. 이 드라마에 무능한 학교 선생 vs. 유능한 사교육 강사의 구도는 없다. 과거 병원 드라마에서는 많이 봤지만, 학교 드라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갈등 구도를 새롭게 도입한 것이다. 

학교의 가장 핵심 역할은 지식 전수
 
 드라마 <블랙독>의 한 장면

드라마 <블랙독>의 한 장면 ⓒ tvN


학교는 여러 역할을 하지만, 가장 핵심 역할은 지식 전수다. 아무리 사교육이 번창한다 한들, 현실 교육의 대부분은 학교가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대한민국 드라마는 이를 도외시했다. 학교를 다루면서 감성과 인성만을 부각하다보니, 리얼리티가 떨어진 것이다. 이 지점을 정확히 파고든 <블랙독>은 50분간 이뤄지는 수업 분량의 적절성, 교수-학습 방법의 적절성, 시험 문제 출제시 나타나는 지식관의 차이를 일명 '바나나 사건'으로 잘 형상화했다. 
 
이쯤 되면 '<블랙독>에 묘사되는 학교와 실제 학교는 얼마나 똑같냐'는 질문들이 나올 법하다. 사실 기간제 교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다소 아쉽다. 어느 정도 기존 드라마 공식을 탈피하지 못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기간제 교사 고하늘(서현진 분)은 하루빨리 그 학교 안에 녹아들고 싶은 이방인이다. 물론 이방인의 시선도 중요하지만, 내면의 모든 것을 다 보기 위해서는 감정이 완전하게 이입되는 지점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엇박자가 난다.
 
그럼에도 여러 디테일에서 작가의 조사와 경험이 꽤 깊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출근하자마자 슬리퍼로 갈아 신는 장면, 마치 실제 부장회의 같은 교장실 풍경, 도떼기시장 같은 학기 초 풍경에다가 시간표 교환이 안 되어 애먹는 장면들은 실제 학교 현장의 모습을 빼다 박은 듯하다. 
 
하지만 공간 배경은 아쉬움을 준다. 같은 요일에 방송되는, 약간 판타지물의 성격을 띠는 <낭만닥터 김사부2>의 공간 배경은 태백이고, <검사내전>은 남해안의 어느 조그만 도시이다. 그러나 <블랙독>은 강남에 있는 대치고등학교다. '강남에 있는 학교'는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재벌 가문처럼 하나의 상징으로써 의미는 있지만, 우리가 늘 눈으로 보고 마주하는 현실은 아니다. 드라마에선 서울대가 누구 집 애 이름처럼 자주 언급되지만, 내가 공부해서 가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강남에만 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SKY는 몇 년 째 구경도 못한 고등학교가 훨씬 더 많으며, 공부가 아니라 흡연과 학교 폭력을 막는데 더 힘을 써야 하는 학교들도 있다. 타 교육드라마와 달리 지식교육을 소재로 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부분은 현실성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블랙독>이 주목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교사라는 한 전문 직종을 곁가지 없이 단백하게 잘 그려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작품은 학생과 학부모의 출연을 최소화하면서 자칫 주인공 시점에서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했다. <블랙독> 공식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인물관계도를 보면 대부분의 구도가 교사와 교사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다. 주요 등장 인물 중 학부모는 없고, 학생만 두 사람이 나온다. 기존 학교 드라마와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부패한 재단, 무책임한 정부 당국이 사라진 자리에 
 
 tvN 드라마 <블랙독> 한 장면

tvN 드라마 <블랙독> 한 장면 ⓒ tvN


그동안 교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주로 갈등을 일으키는 집단은 부패한 재단이나 무책임한 정부 당국이었다. 선악 구도가 뚜렷하고 너무 교훈적이었다. <블랙독>은 이러한 학교 드라마 공식 문법을 탈피한 최초의 드라마이고, 최초이기에 한계 또한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일명 바나나 사건의 결론이다. 드라마 속 교사는 실수를 깨끗이 인정하고 학생들은 괜찮다고 말해주며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정말로 바나나가 사람으로 해석될 수 있는 걸 인정하는 것으로 학교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시선의 전환은 이뤘으나, 공간적 제약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아무래도 방해가 된다. 강남에 있는 고등학교가 아니라 조금 더 욕심을 부려 강북이나 경기도 중소도시에 있는 학교가 드라마 공간의 주요 배경으로 나오면 좋겠다. 강남 아이들만, 강남 부모들만 교육 문제에 더 몰두한다는 고정관념, 혹은 편견에서 벗어난다면 교육에 대해 좀 더 적나라하고 깊게 파고 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소망을 하나 덧붙이자면 엔딩은 교육드라마의 문법을 따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은 시인의 사회>처럼 책상 위에 올라가서 "오 마이 캡틴"을 외치거나 영화 <투사부일체>처럼 창문 밖으로 종이비행기를 일제히 날리는 모습과 다른 장면을 기대한다. 학교 드라마의 감동은 꼭 그런 것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는 걸 한 번쯤은 보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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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고등어 사전(메디치미디어)>, <나의 권리를 말한다(뜨인돌)>, <세상을 보는 경제(인포더북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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