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시네마 형식으로 관객과 만나는 영화 <바람의 언덕> 포스터

커뮤니티 시네마 형식으로 관객과 만나는 영화 <바람의 언덕> 포스터 ⓒ 영화사 삼순


"21세기 한국영화에, 20세기 한국영화에는 없었던 새로운 경향이 있다면 엄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은 엄마가 눈에 띄게 많아졌어요. 20세기 한국영화에는 없었던 21세기의 한국영화의 이상한 엄마들. 박석영 감독의 <바람의 언덕>은 얼핏 보면 TV 드라마처럼 평범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 속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굉장히 이상한 영화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바람의 언덕>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 진행을 맡은 정성일 평론가 겸 감독은 박석영 감독의 4번째 장편영화 <바람의 언덕>을 두고 이런 의미심장한 평을 남겼다. 오후 7시 영화 상영부터, 정성일의 영화 해설, 출연 배우들의 <바람의 언덕> OST 라이브 공연(정은경, 장선, 김태희), 감독 및 배우들과의 대담까지. 다음날 오전 2시께까지 이어진 특별한 영화 상영회에서는 여러 가지 말이 오고 갔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영화에 등장하는 '이상한 엄마'에 관한 내용이었다. 

<바람의 언덕>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오래 전 딸 한희(장선 분)를 버린 영분(정은경 분)이 딸과 해후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5년 동안 같이 살던 남자 윤식이 죽자 고향인 태백으로 돌아온 영분은 딸 소식을 접하고 갈등하던 중 필라테스 강사가 된 한희와 조우하게 된다. 한희에게 자기 정체를 들키기 전만 해도 그는 몰래 필라테스 학원 전단지를 거리에 붙이는 등 지극정성이었다. 하지만 영분은 정작 한희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자 냉정하게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분이 한희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기 전까지만 해도, 과거 자식을 버린 엄마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뉘우치는 감동 스토리로 진행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알아보는 딸에게 소스라치게 놀라고 도망 다니기 바쁜 엄마의 변심(?)으로 영화는 다소 이상해 보이는 전개로 치닫게 된다.

정성일 평론가를 비롯한 <바람의 언덕>을 본 수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이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지점 또한 영분의 극적인 심경변화에 있었다. 정 평론가는 이를 두고 "20세기 한국영화에는 없던 21세기 한국영화의 이상한 엄마들"이라고 명명했다.
 
 지난 24일 서울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영화 <바람의 언덕> 상영회

지난 24일 서울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영화 <바람의 언덕> 상영회 ⓒ 영화사 삼순

 
딸에게 정체를 들키기 전만 해도 아기새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어미새처럼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줄 각오가 되어있었던 영분. 그는 왜 정작 딸이 자신을 알아보는 순간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을까.

영분 역을 맡은 배우 정은경은 "오랜만에 만나는 딸에게 초라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영분의 망설임과 미안함이 자꾸 그를 도망치게 만드는 근원적인 두려움"이라고 설명했다. 엄밀히 말하면 영분은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상에 부모 될 자격을 다 갖춘 뒤에 부모가 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만, 오래 전 딸을 버린 영분은 다시 그 아이 앞에 엄마라고 나타나는 것 자체가 부끄럽고 미안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희에게 정체를 들킨 영분의 도망에 대한 이런저런 해석을 뒤로 하고, 다시금 딸을 버리고자 하는 영분의 행동은 정성일 평론가의 지적처럼 20세기 한국영화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최근 TV 드라마, 연속극에서는 오래 전 자식을 버린 어머니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시 자식을 찾아와 행패를 부리거나 뒤통수 치고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등장하긴 한다. 그러나 <바람의 언덕>의 영분은 그런 악녀 캐릭터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박석영 감독은 '애초 영분은 한희를 찾을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고 설명한다. 그냥 한희가 뭐하고 사는지 궁금해서 그가 운영하는 필라테스 학원을 몰래 찾아갔을 뿐인데 그것을 계기로 한희와 강사와 수강생으로 인연을 맺게 되고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상황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게 거리를 두면서도 그간 엄마로서 못해준 것들이 마음이 걸려 두 팔 걷어붙이며 나섰을 뿐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영분과 한희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지난 24일 서울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영화 <바람의 언덕> 상영회

지난 24일 서울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영화 <바람의 언덕> 상영회 ⓒ 영화사 삼순

 
자신의 정체를 한희에게 들킨 후 영분은 도망을 택하고, 한희는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영분을 잡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영분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한희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분은 제 갈 길을 택한다. 이어지는 엔딩 시퀀스는 많은 사람들을 흐뭇하게 하는 훈훈한 장면으로 마무리되지만, 지난 24일 상영회에서 영화를 본 몇몇 관객들은 "엔딩 장면에서 영분과 한희가 진짜 다시 만난 것 맞느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끝까지 거두지 못했다. 

모두가 원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음에도 <바람의 언덕>의 결말이 찜찜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직전에 보여준 영분과 한희 간 갈등의 진폭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백미를 꼽으라면, 곁에 있어달라는 한희의 간곡한 요청에도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며 길을 떠나는 영분의 강단이다. 

자식의 간절한 외침에도 자신의 뜻을 쉽게 꺾지 않는 엄마는 20세기 한국영화는 물론 요즘에도 흔하지 않은 캐릭터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에서 '엄마'란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래서 자신의 삶은 기꺼이 희생하고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으로 통용된다. 그러나 영분은 세상이 원했던 전형적인 어머니상을 과감히 부수며 아직은 엄마가 되고 싶지 않으며 그럴 자신조차 없음을 울부짖는다. 

그런데 영분을 단순히 엄마가 아닌 같은 여자로서 이해하려는 한희의 태도가 더 놀랍다.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나를 낳았잖아." 인적이 드문 겨울 밤 다리 위에서 벌어지는 영분과 한희의 대면 시퀀스는 엄마와 딸의 실랑이가 아니라 자신의 곁을 떠나려는 여자의 삶을 어떻게든 이해하려는 또 다른 여자의 소회처럼 들리기도 한다. 

박석영 감독은 이 장면을 두고 "<바람의 언덕>은 대면의 영화"라고 정의한 바 있다. 오랜 세월 소식도 모르던 두 모녀 혹은 두 여자, 사람을 억지로 화해시키는 것이 아닌 서로에게 응어리지거나 얽혀있던 것을 차근차근 마주하고 풀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던 영화는 자식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고 감내하는 어머니 대신 인간 대 인간으로 엄마와 딸을 새롭게 바라보고자 한다. 

여성 배우들이 전면에 등장한다는 것만으로 <바람의 언덕>을 여성 영화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정성일 평론가의 지적처럼 20세기 한국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이상한 엄마들의 연장선상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이 진일보한 여성 캐릭터를 담보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는 엄마이기 이전에 영분이라는 사람의 삶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존중, 엄마와 딸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영분과 한희 앞에 놓인 실타래를 따뜻한 시선으로 대면하게 한다. 또한 늘 사람과의 관계에 지치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군가와의 관계 회복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에게 묵직한 위로와 해법을 안겨준다. 

오는 5월 개봉 예정이지만, 그 전에 <바람의 언덕>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라는 이름으로 지역 독립예술영화관, 영화 커뮤니티(공동체) 등을 순회하며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만나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상업적인 자본에 덜 구애받는 독립적인 상영 방식으로 관객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준비하는 '<바람의 언덕>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는 오는 4일 창원 씨네아트 리좀, 11일 파주 헤이리시네마, 18일 대구 오오극장 상영 등 3월 말까지 지역 독립예술영화관 및 영화 공동체, 관객들과 함께하는 상영회를 계획하고 있다.

부디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지 않고도 영화 <바람의 언덕>을 사랑하는 관객의 마음을 최선을 다해 마주하고 싶다"는 박석영 감독의 순박한 바람을 묵묵히 응원하는 바이다. 
바람의 언덕 영화 박석영 감독 정성일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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