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 blues. 작년부터 유난히 겨울을 탄다 싶어서 자료를 찾아보니, 이 근사한 말이 '겨울 우울증'으로 번역된다. 나의 경우 잦은 졸림(과수면)과 무력감, 단 음식 집착, 침울한 기분, 타인에 대한 낯가림이 심해지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여름에는 해뜨기 전에 일어 날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더니, 요새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고역이며 책을 보면서도 졸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주 친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초대 받지 못한 잔치에 온 불청객처럼 타인과 함께 있는 시간이 머쓱하고, 매일 해야 하는 빨래, 청소, 요리 등의 가사 일이 산꼭대기까지 무거운 돌덩이를 굴러 올려 떨어뜨리기를 반복해야 하는 시지포스의 형벌처럼 지겹고 버겁게 느껴진다. 이왕 이럴 바에야 고독 속으로 마음껏 풍덩 하여 침잠할 수 있도록, 인간 사회에도 '겨울잠'자는 습속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몽상에 젖어들곤 한다.
 
기분을 침울하게 만드는 주요 불안 요인 중 하나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나의 몸은 원래에도 저질 체력이었는데 해가 거듭될수록 잦은 피로감과 체력 고갈이 심해진다. 단골 미용실 원장님 말로는 뒤통수 안 쪽으로 동전만한 크기의 백발 뭉치가 생겼다고 한다.

일흔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뵐 때마다 주름살이 깊어 가는 것 같고, 늘 쾌활하시던 여든 중반의 외할머니는 입원하는 횟수가 늘어나더니 가족 행사에도 힘이 드신다며 잘 오시지 않는다. 그리고 가까운 친지와 지인의 장례식장을 다녀오며, '먼 일'처럼 느껴졌던 노화와 죽음이 곧 다가 올 나의 일로 성큼 다가 온 것이다.
 
인생의 여름이 지났다는 건, 상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게 아닐까? 나는 잘 견디어 낼 수 있을까?
 
월요일 오전의 한갓진 시간을 틈타 영화 <다가오는 것들>(2016)을 보았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 그리고 홀어머니를 돌보는 딸로, 파리의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중년 여성인 주인공 '나탈리'는 나에게 뭔가 의미 있는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중년의 나탈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이란?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 2016 미아 한센-러브 감독, 이자벨 위페르 주연

▲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 2016 미아 한센-러브 감독, 이자벨 위페르 주연 ⓒ 찬란


늘어져가는 피부와 함께 여성성은 점점 사라진다. 품안의 자식들은 장성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향해 떠난다. 언제나 함께 할 것만 같던 남편도 다른 여자가 있다고 고백 하며 떠난다. 죽음의 불안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어 늘 관심을 필요로 하던 엄마도 결국은 세상을 떠난다. 자식, 남편, 엄마가 떠나는 일련의 상실을 겪으면서도 나탈리의 태도는 너무나 덤덤하고 차분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훈남 제자와의 로맨스를 기대하던 관객에게 연하남과의 로맨스 따위는 비현실적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영화 후반부에 장자크 루소의 소설 <신엘로이즈 La Nouvelle Heloise>를 빗대어 이야기 하는 듯하다.

"쥘리는 지난 열정을 회상하지. 생프뢰와 못 이룬 열정을, 그와 함께 할 행복을 희망하다가, 희망 자체로 행복해진 거야....... 쥘리의 경우나 루소 자신 같은 경우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이들에게는 이러한 정신적 만족이 진정한 위안을 주고 그 위안은 관능적 쾌락을 보충하고 대체하는 거야."
 
중년의 행복은 관능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만족에서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더 이상의 혁명을 원하지 않는 그녀의 삶은 무미건조해 보이기도 하지만, 지적으로 충만한 삶은 격정적인 비탄에 빠지지 않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이런 생각을 해.
애들은 품을 떠났고, 남편은 가고, 엄마는 죽고,
나는 자유를 되찾은 거야.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온전한 자유.
놀라운 일이야."

 
젊었을 때와 같은 열정은 없지만, 상실의 체험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용기이자, 상실을 자유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지혜라고, 중년의 인생선배 나탈리는 이야기 해준다.

노화와 죽음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지만,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던 거 같다. '다가오는 것들'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현재를 당당히 살아내야겠다. 일단 겨울 우울증은 일조량 감소로 인한 세로토닌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니, 햇살 좋은 날엔 산책을 해야겠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느리게걷는여자>에 중복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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