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극단 상상공터 멤버들을 만났다. 곽지영 배우, 김소연 배우, 박성은 배우, 서정애 연출.

지난 3일 극단 상상공터 멤버들을 만났다. 곽지영 배우, 김소연 배우, 박성은 배우, 서정애 연출. ⓒ 인권연극제

 
1910년대 미국에는 어둠 속에서도 시간을 볼 수 있는 손목시계가 유행했다. 비법은 바로 발광하는 라듐 페인트였다. 작은 숫자판에 라듐 페인트를 정확하게 칠하기 위해 여공들은 붓끝을 입에 넣어 뾰족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온몸에 라듐이 묻어 밤에도 반짝이던 이 어린 여공들을 '라듐 천사'라고 불렀다.

10년 뒤 회사는 떼돈을 벌었고, 여공들은 목숨을 잃었다. 라듐이 뼈에 구멍을 만들고 골수로 침투해 백혈병을 일으킨 것이다. 긴 싸움이 이어졌고, 오랫동안 은폐되었던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미국 노동법을 바꾸는 중요한 신호탄이기도 했다. 연극 <라듐걸>은 이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극이다.

지난 12월 3일, 서울치유허브에서 연습중인 극단 상상공터 멤버들을 만났다. 서정애 연출(극단 상상공터)은 2016년 메탄올 중독 실명 사건을 본 뒤 이 극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단가를 낮추려고 에탄올이 아닌 메탄올을 사용해서 일하던 사람들이 시력을 잃게 됐다는 걸 기사로 접했어요. 그 사건이 저에게는 충격이었어요.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어 조사를 하다 라듐걸을 알게 됐어요. 1920년대 먼 미국에서 일어났던 일이 지금의 모습과 겹쳐보였죠." (서정애 연출)

연극 <라듐걸>은 암울하지 않다. 자명한 슬픔보다는 산업재해가 앗아간 것들을 재현한다. 기대와 희망에 부풀었던 그 시절 라듐걸의 모습은 경쾌한 음악과 활기찬 몸짓으로 관객 앞에 등장한다. 점차 반복되며 괴기하게 변주되는 배우들의 몸짓에 집중하다 보면, 고통을 말하지 않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압축된 대사와 정확한 몸짓과 그리고 음악. 그동안 봐온 어떤 연극보다 침묵이 많았지만, 강렬했다.

이런 '몸짓극'을 완성하기까지 숱한 노력이 있었다. 서정애 연출과 배우들은 작업 동작을 정확하게 구현하기 위해 다수의 자료와 영상을 참조했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는지 뭉뚱그리지 않고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라듐걸 리허설 장면

라듐걸 리허설 장면 ⓒ 인권연극제


"이분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자세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냥 거기 '떨어져서, 끼어서 죽었대'가 아니라 어떤 일을 구체적으로 하다가 그런 사고를 당했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연민이나 동정보다는 '그들도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구나, 나처럼 똑같이 꿈이 있었구나. 내일의 나일 수도 있구나'를 느낄 수 있도록요." (서정애 연출)

배우 곽지영(라듐걸 역)은 라듐걸이 입술로 붓끝을 모으는 장면을 공들여 만들었다고 말했다. 건강하고 희망찬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비극을 암시하는 아이러니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압축하는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라듐걸이라는 사건은 192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이잖아요. 안전수칙이 없고, 정확히 무슨 약품을 사용하는지 알려주지 않고, 사고가 일어나도 기업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이 여전히 반복된다고 느꼈어요." (곽지영 배우)
  
극 중에는 한국의 사례도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잘 알려진 사건부터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사건까지 균형 있게 배치했다. 서 연출은 자료조사를 하며 라듐걸과 다른 스펙트럼에 놓인 사건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위험을 전혀 몰랐던 라듐걸과 달리 알면서도 출근해야 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조사를 하다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고민을 나누는 인터넷 카페를 발견했는데요. 주로 어떤 상담이 올라오는지 아세요? '어디가 더 안전할까요?'에요. 위험한지 이미 알지만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죠." (서정애 연출)

이런 사례를 공부해 초연 때보다 더 촘촘하게 극을 채웠다. 덕분에 작업 자체가 연출과 배우들에게 공부가 됐다. 배우 김소연(라듐걸 역)은 조사를 하면 할수록 답답한 마음이 올라왔다고 말했다.

"안전 수칙은 피로 쓰인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의문이 들었죠. 왜 미리 안전 수칙을 만들지 않는 걸까." (배우 김소연)

배우 박성은(라듐걸 역) 역시 조사 과정에서 얼마나 가까이에 산업재해가 도사리고 있었는지 깨달았다고 말했다.

"산업재해 이슈는 사실 지나치던 뉴스였어요. 이번 연극을 하면서야 주변에 많은 분들이 산업재해를 겪는 걸 알게 됐어요. 용접 일을 하시는 아버지도 사고를 많이 당하셨더라고요." (배우 박성은)

그녀처럼 산업재해 뉴스를 지나치던 사람들에게 이 연극을 권하고 싶다. 이름만 알던 사건들을 자세히 알 기회이자 곱씹어볼 계기이기 때문이다.

연극을 보고 나온 뒤 "저 괜찮은 거죠? 괜찮겠죠?"라며 라듐걸이 던진 질문이 귓전을 울렸다.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책임이 표류하고 있다"라는 사회학자 바우만의 말이 떠올랐다. 책임이 표류하는 이 사회에서 내가 응답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라듐걸>은 우리에게 그 질문을 던진다.

연극 <라듐걸>은 인권연극제 참가작으로 오는 20일부터 22일까지 서울 성북마을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라듐걸 포스터

라듐걸 포스터 ⓒ 상상공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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