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기자말]
 영화 <샐린저> 메인포스터

영화 <샐린저> 메인포스터 ⓒ 판시네마(주)


01.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명문 사립고등학교에 다니던 16세 소년 홀든 콜필드가 영어를 제외한 네 과목에서 모두 낙제하여 퇴학을 당한 뒤 겪는 2박 3일의 일들을 1인칭 시점으로 써내려 간 소설. 이 소설은 1950년대 비트 문화의 영향으로 대학을 떠나 유럽으로 향하고자 했던 미국 대학생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며, 이후 체제저항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당시 대학생들은 누구나 <호밀밭의 파수꾼>을 들고 다녔으며, 소설 속 주인공에 감정 이입했다고 한다. 저자의 이름에서 따온 소위 '샐린저 현상'이라고 불리는 광기적인 집단 최면 현상까지 보이며 말이다.

한편, 단 한 편의 장편소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사생활이 언론에 공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던 소설의 작가 J.D.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의 삶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샐린저는 자신의 삶을 대중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 노력했는데, 1965년 이후 사회를 떠나 본격적인 은둔을 시작한 이후로는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물론, 측근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만남이나 교류도 거부했다고 한다.

40년이 넘도록 한 편의 글도 쓰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2010년 1월 27일의 소식도 다음 날인 28일, 그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아들이 밝히기 전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영화 <샐린저> 스틸컷 영화 <샐린저> 스틸컷

▲ 영화 <샐린저> 스틸컷 영화 <샐린저> 스틸컷 ⓒ 판시네마(주)


02.
영화 <아마겟돈>, <아바타> 시리즈 등을 통해 전문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인 쉐인 샐러노 감독이 지난 2003년부터 그의 생전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샐린저>(Salinger)를 준비해 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언론과의 인터뷰를 거절하는 것은 물론 책에 자신의 프로필 사진조차 넣지 못하도록 출판사에 요구하며 대중과 최대한 거리를 두고자 했던 그의 숨겨진 모습들을 담아내고자 하는 것. 그렇다고 이 행위가 단순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의 비밀스러움을 파헤치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감독 스스로가 샐린저라는 인물에 대해 그만큼 깊은 애정을 갖고 있음이 이 작품 곳곳에서 느껴진다.

1919년 1월 1일 태어난 샐린저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비적인 시기에 개봉을 맞이하여 관객들에게 뜻 깊은 경험을 선사하게 될 이 작품은 샐린저의 모든 것을 담은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 동부의 사립 학교를 전전하며 방황하던 그의 청소년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당시의 모습, 작가로서의 데뷔와 성공을 이루기 위해 잡지 '뉴요커'에 끊임없이 투고하던 커리어까지 그 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작가의 모습들이 담겨있다. 특히, 오랜 친구인 레일라 해들리 루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알려지게 되는 샐린저와 유진 오닐의 딸 우나 오닐과의 첫사랑 스캔들에 대한 일화가 대표적이다. 쉐인 샐러노 감독은 이를 위해 수백명의 인사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자료를 모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03.
이번 작품에서는 그의 삶 전반에 대한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그려지지만, 아무래도 그의 직업적 성공을 가능하게 했던 지점의 숨겨진 일화들이 특히 더 인상적이다. 문학계의 거장으로 알려진 샐린저가 작가 지망생이던 초창기에 다른 작가 지망생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문예지에 단편 원고들을 투고하고 결과를 애타게 기다렸다는 내용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누구에게나 처음의 걸음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시작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50여년의 은둔 생활 동안 샐린저가 직접 집필했다고 알려진 미공개 원고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는 점과 그와 관련한 일부 내용을 공개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큰 의미를 갖는다. 오랜 시간 자신의 모습을 감춘 '작가'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찬란한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샐린저의 삶에 사회적 의미를 더하기 위해 쉐인 샐러노 감독이 만난 명사들과의 인터뷰는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작품의 틀에 오락적 요소를 집어넣는다. 단순히 웃음과 즐거움을 제시하는 종류의 오락성이 아니라, 관객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인물들이 샐린저의 팬을 자처하며 호기심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등장할 때, 조금 더 작품에 가까워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특히,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에드워드 노튼, 존 쿠삭 등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이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드러내는 인터뷰는 자못 진지하다 못해 열정적이기까지 하다. 여기에 에드거 상을 수상한 극작가 겸 소설가 고어 비달은 샐린저라는 인물이 미국 사회에 가져온 변화를 전문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며 다양한 시각에서 그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이 모든 것은 감독이 다양한 자료를 제시하여 관객들이 객관적인 시선으로 샐린저를 느낄 수 있길 바랐기 때문이다.
 
영화 <샐린저> 스틸컷 영화 <샐린저> 스틸컷

▲ 영화 <샐린저> 스틸컷 영화 <샐린저> 스틸컷 ⓒ 판시네마(주)


04.
이 작품은 시작과 함께 누군가가 등장하길 기다리고 있는 어느 파파라치의 은밀한 시선과 인터뷰로 시작된다. 오랜 시간 베일에 싸여있던 인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시작하기에 이보다 더 명징한 방식이 존재할 수 있을까? 제한된 러닝타임의 한계로 인해 샐린저의 모든 것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 밖에 알지 못했던 그의 삶 전체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 <샐린저>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샐린저는 자신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 속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의 대사를 통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정말로 내가 감동하는 책은 말이야, 다 읽고 난 뒤에 그걸 쓴 작가와 친구가 되어, 언제라도 전화를 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책이야. 하지만, 그런 기분을 주는 책은 거의 존재하지 않지.'

하지만 그는 이 작품의 성공 이후 오랫동안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그를 사랑하는 관객들에게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런 아이러니를 안고 지내온 관객들에게 이 작품은 유일한 기회이자 해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렇지 않은 관객들에게도 샐린저라는 인물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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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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