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라디오를 틀면 비와 관련된 노래가 흘러나오듯, 눈 내리는 날이면 각종 음악방송에서 틀어주는 음악이 있다. 이와 함께 겨울이 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홋카이도의 설경을 무대로 첫사랑의 추억과 이별의 아픔을 풋풋하면서도 애잔하게 그려낸 이와이 슌지 감독의 일본 영화 <러브레터>와 그 배경음악이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후 1999년에 한국에 첫 소개된 <러브레터>가 국내 개봉 20주년을 맞이해 이달 26일에 재개봉한다는 소식이다. 2013년, 2016년, 2017년에 이은 네번째 재개봉이라 하니, 영화가 얼마나 국내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 음악도 영화만큼이나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winter story' 등 이 영화의 음악만 들어도 영화가 품은 순백의 아름다운 영상과 눈 내린 벌판이 눈앞에 그려진다. 여주인공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뒤돌아보는 모습, 또 다른 여주인공이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며 그가 최후를 맞이한 먼 산을 향해 절절하게 외치는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 <러브레터> 포스터

영화 <러브레터> 포스터 ⓒ 와이드 릴리즈(주)

 
영화는 그 음악만으로 듣는 이들을 풋풋한 짝사랑이나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 속으로 데려가준다. 영화 <러브레터>가 20년이 넘도록 기억되고 사랑받는 이유는 바로 그 점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 <러브레터>는 영화가 담은 내용과 정서, 이미지와 더불어 음악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사고로 목숨을 잃은 연인을 잊지 못한 여인이 옛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가 뜻하지 않게 알게 되는 연인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다.
 
히로코(나카야마 미호)는 2년 전 세상을 떠난 연인을 잊지 못해, 죽은 연인의 중학교 졸업앨범 속 주소로 편지를 보낸다. 이미 국도로 인해 헐린 주소지로 알고 있었는데 답장이 왔다. 죽은 사람이 답장을 보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믿고 싶었던 히로코. 그녀를 오랫동안 짝사랑한 아츠키 선배의 장난으로 인해 결국 답장을 보낸 사람이 같은 이름의 다른 인물이란 사실과 함께 연인의 중학교 시절 동창이라는 것까지 알게 된다.
 
오타루에서 할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후지이 이츠키(나카야마 미호, 1인 2역)는 어느 날 갑자기 와타나베 히로코라는 이름의 여성에게서 "잘 지내세요?"라는 편지를 받는다.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히로코가 자신의 중학교 동창 후지이 이츠키(가시와바라 다카시)의 연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날 후, 잊고 지냈던 중학교 시절의 추억을 히로코와 나누게 된다.
  
 영화 <러브레터> 스틸 컷

영화 <러브레터> 스틸 컷 ⓒ 와이드 릴리즈(주)

 
여자 이츠키와 남자 이츠키. 두 사람은 오타루의 한 중학교을 다녔다. 입학식 날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자 동시에 답변하는 두 사람. 이날부터 둘은 커플이라며 반 친구들의 놀림을 받았고, 급우들의 장난으로 학급위원 선거에서 도서위원으로 선출된다. 운명의 장난처럼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둘은 자주 엮이게 된다.
 
책을 좋아하고 도서위원 일을 착실하게 해나가는 여자 이츠키에 비해, 남자 이츠키는 늘 건성이다. 하지만 남들이 빌려가지 않을 만한 책만 잔뜩 대출해간다. 도서대출 카드 맨 첫 칸에 '후지이 이츠키'란 이름을 기록해 남기는 것이 즐겁다는 이유였다.
 
사실 남자 이츠키는 여자 이츠키를 좋아하지만, 그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심지어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냐고 물으며 다른 여학생을 이어주기도 한다. 결국 여자 이츠키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느라 학기 초에 결석하는 사이, 남자 이츠키는 전학을 가게 된다.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의 마음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그와의 추억을 낭만적이거나 즐거운 기억이 아니라 싫은 일들뿐이었다고 말하지만, 여자 이츠키가 기억을 하나하나 꺼내놓을 때마다 히로코는 자신의 연인이 중학교 시절 동명이인의 동급생 이츠키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졸업앨범 속 자신과 꼭 빼어 닮은 여자 이츠키를 발견하고는 "나를 선택한 이유가 닮아서라면 용서할 수 없다"고 연인에 대한 질투와 원망 섞인 그리움에 눈물 흘린다.
 
히로코는 이렇게 떠나간 연인의 첫사랑을 알게 되고, 그 추억을 여자 이츠키에게 돌려주며, 연인에게 진정한 작별 인사를 보낸다. 그리고 영화 속 명장면. 연인이 죽은 산을 멀리서 바라보며 히로코는 외친다.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스.(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
 
이츠키도 뒤늦게 오래 전 남학생 이츠키가 도서대출 카드 뒷면에 남긴 자신의 초상화를 발견한다. 어쩌면 이 카드 뿐 아니라 다른 카드 뒷면에도 매번 여학생의 얼굴을 그렸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도서카드에 기입된 후지이 이츠키란 이름이 남학생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또 다른 후지이 이츠키를 생각하며 또박또박 써내려간 이름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히로코의 말처럼, 남자 이츠키는 여자 이츠키가 그것을 발견해주기를 바랬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백하지 못한 채, 여학생도 끝내 발견하지 못한 채 첫사랑은 짝사랑으로 끝나고 말았다.
 
얼마 전, 음악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러브레터> OST 중 'Wintet story'를 듣고는 20년 만에 영화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짝사랑이랄 것도, 첫사랑이랄 것도 없는 중학교 시절 꼭 그맘때쯤의 동급생 C군이 떠올랐다.

같은 동네에 살았고, 초등학교 6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다가 중학교 3학년 때 다시 같은 반이 되어 만난 C군. 좋아하는 과목이나 즐겨보는 드라마가 같았고, 짝궁이던 일주일의 시간이 짧게 느껴질 만큼 대화가 통했던 친구. 우연히 아버지의 이름 철자도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재미있어 했다. C군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귀 기울여 들어주었고, 동급생들이 짓궂게 나와 C군을 남편과 마누라라 놀려도 C군도 나도 그저 웃기만 했다.
  
 영화 <러브레터> 스틸 컷

영화 <러브레터> 스틸 컷 ⓒ 와이드 릴리즈(주)

 
그뿐이었다. 사랑이나 떨림, 두근거림보다는 그저 좋아하는 마음 그 자체가 전부였다. 그것은 그냥 친구로서의 편안함과 호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 나에겐 특정한 이성과 특별한 관계가 될 용기가 없었다. 이성교제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학기 초부터 A양이 C군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반 안에 모르는 애들이 없을 정도였기에, 그저 C군과 친하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나는 다른 여학생들로부터 공공의 적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짝이 바뀌자마자 다시 데면데면해졌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질까봐, C군의 진심을 모르기도 했지만 굳이 그의 마음을 알고 싶지 않았으니까. C군과 서로 좋아하는 관계로 발전시킬 의지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아무 관심 없는 척하며, 졸업하고 인사도 없이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이듬해 가을에 한두 번 재회했지만, 결국 나도 먼 동네로 이사를 가 버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여주인공 덕선이처럼 나도 그때는 몇 명의 남학생에게 관심을 가졌고, 그것도 오래 품지 않은 짧은 감정들이었으며, 늘 오락가락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영화 <러브레터>를 보면 나는 C군이 떠오른다. C군이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C군의 소식은 알 수 없지만,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빠,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홋카이도의 눈발, 여주인공이 자전거 타는 모습, 난로와 담요, 기침 소리, 시립도서관과 학교 도서실 풍경, 자전거 주차장과 영어 시험지 등 영화 속 많은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겨울이 깊어가며 부쩍 추워쳤다. 남자 이츠키를 떠올릴 때면 시종일관 무심하던 여자 이츠키. 그녀는 뒤늦게 발견한 도서카드 속 남자 이츠키가 그린 자신의 얼굴을 보고 눈물을 글썽인다. 어느 눈 내리는 날, 어느 추운 겨울이면 또 불현듯이 음악과 함께 영화 속 장면들이 다시 마음 속에 깃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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