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호 대표가 난간에 매달려 미소를 짓고 있다.

김지호 대표가 난간에 매달려 미소를 짓고 있다. ⓒ 김지호

 
맨손으로 담을 훌쩍 넘는다. 배관을 잡고 벽을 기어오른다. 주택가를 운동장처럼 뛰어다닌다. 지켜보던 주민들이 신고를 한다. "여기 '도둑질 연습'하는 비행 청소년들이 있어요" 맨몸 운동이건만 '도둑질 기술'로 오해받았다. '야마카시(Yamakasi)'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파쿠르(Parkour)' 이야기다.

그랬던 파쿠르가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있다. 국내에 도입된 지 약 15년 만이다. 운동 효과를 인정받아 몇몇 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으로 채택되었고,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열기도 했다. 파쿠르를 올바로 알리기 위해 인생의 절반을 바친 남자가 있다. '파쿠르 제너레이션즈 코리아(Parkour Generations Korea)'의 설립자이자 국내 파쿠르계 일인자, 김지호(31) 대표다.  
 
 '파쿠르' 하면 떠오르는 장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점프’는 파쿠르가 아니라 객기일 뿐이다.

'파쿠르' 하면 떠오르는 장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점프’는 파쿠르가 아니라 객기일 뿐이다. ⓒ 유튜브


파쿠르(Parkour), 길
 
파쿠르란 야외에서 하는 맨몸 운동이다. 프랑스어로 길, 여정이라는 뜻이다. 더 익숙한 '야마카시'는 파쿠르 창시자들이 만든 팀(Team) 이름이다. 김지호 대표는 "파쿠르는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자신만의 길을 완성해 나가는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어린이들은 장애물을 뛰어넘거나 땅을 기어 다니며 즐거워해요. 이처럼 맨몸으로 장애물과 어울려 노는 운동을 파쿠르라고 합니다. 여성도 노인도 충분히 즐길 수 있죠. 그런데 사람들은 파쿠르를 '건물 사이를 건너뛰는 위험한 운동'으로 알고 있어요. 대표적인 오해죠. 전 세계 어떤 파쿠르 커뮤니티를 봐도 초심자에게 건물 사이를 건너뛰라고 가르치진 않아요."
  
 가족이 함께 네 발 걷기 훈련을 하고 있다. 주변 지형을 활용해 신체를 단련하는 것이 파쿠르의 목적이다.

가족이 함께 네 발 걷기 훈련을 하고 있다. 주변 지형을 활용해 신체를 단련하는 것이 파쿠르의 목적이다. ⓒ 장준영

 
파쿠르를 알리자
 
김 대표는 파쿠르를 올바로 알리기 위해 15년째 노력 중이다. 고등학생 때 처음 파쿠르의 매력에 빠진 그는 2008년 파쿠르의 탄생지 프랑스 리스(Lisses)에서 파쿠르를 배워 왔다. 체계적인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2013년 '파쿠르 제너레이션즈 코리아'를 설립했다. 얼마 전 그는 아시아 최초이자 세계 스물두 번째로 국제 공인 파쿠르 코치 자격증(A.D.A.P.T) 레벨3을 취득했다.
 
- 파쿠르 제너레이션즈 코리아는 어떤 활동을 하나요?
"2006년 영국 런던에 설립된 '파쿠르 제너레이션즈(Parkour Generations)'의 한국 지사입니다. 파쿠르 전문 교육기관이죠. 정기적인 훈련과 각종 워크숍을 통해 제대로 된 파쿠르를 소개하고 가르칩니다. 미디어의 영향으로 파쿠르가 무작정 위험을 무릅쓰는 운동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지 않아요. 누구나 장애물 앞에선 겁먹기 마련이에요. 이 두려움을 억지로 물리치려 하지 말고 차분히 들여다봐야 합니다.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비로소 점프를 해요. 우리는 사람들이 두려움과 마주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요."
 
- 파쿠르는 누가 가르치나요?
"국제 공인 파쿠르 코치 자격증을 취득하면 파쿠르 코치가 될 수 있어요. A.D.A.P.T 자격은 세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레벨1은 보조 코치예요. 정식코치인 레벨2, 3이 되어야 파쿠르 강좌를 공식적으로 개설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내 파쿠르 코치 수는 다른 나라에 비해 적어요. 레벨1도 수업을 열 수 있어야 한다고 파쿠르 제너레이션즈 본사에 말했습니다. 다행히 이야기가 잘 돼 우리나라 한정으로 레벨1 코치들도 공식 강좌를 만들 수 있게 되었어요. 내년 서울에서 A.D.A.P.T 레벨1 자격시험이 열립니다. 벌써 많은 사람이 신청했어요."
  
 국제 공인 파쿠르 코치 자격 A.D.A.P.T 로고.

국제 공인 파쿠르 코치 자격 A.D.A.P.T 로고. ⓒ 장준영

 
파쿠르 대중화, 한계에 부딪히다
 
2016년 봄 김지호 대표는 서울 신사동에 작은 체육관을 열었다. 국내 최초 파쿠르 체육관이다. 파쿠르를 시작한 지 12년 만이다.

"체육관을 여는 건 오랜 꿈이었어요. 개관 전 동료들과 반년 간 분당 오피스텔에 틀어박혀 합숙 훈련을 했지요. 밥 먹는 시간 빼곤 연습에 매진했어요. 제대로 가르치고 싶었거든요."

금세 수강생이 밀려들었다. 열정적인 수업 덕에 고정 수강생도 생겼다. 입소문이 퍼졌다. 방송도 여러 번 탔다. 월평균 2천만 원을 벌었다. 기대 이상이었다. 그렇게 2년을 운영하다 2017년 겨울 체육관 문을 닫았다.
 
- 왜 갑자기 문을 닫았나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코치들이 매너리즘에 빠졌어요. 가르치는 건 보람찼지만 매일 좁은 지하에 틀어박혀 기초 동작만 반복하는 건 지겨웠어요. 파쿠르는 본래 야외에서 시작된 운동이에요. 다들 자기만의 '판'을 짜고 싶어 했죠. 두 번째는 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우리는 파쿠르를 널리 알리고 싶어 체육관을 세웠어요. 그런데 막상 체육관이 생기니 파쿠르 소모임이 전부 사라진 거예요. 실력자들이 신사동 지하에 모여 있으니 소모임을 이끌 사람이 없던 것이죠. 그 바람에 파쿠르 생태계가 붕괴하고 말았어요. 돈은 잘 벌렸지만 파쿠르에 독이 돼 더 이상 운영할 수 없었어요."
 
파쿠르가 국내에 처음 소개된 2000년대 초반 파쿠르를 즐기던 사람은 10대 청소년이었다. 당시엔 크고 작은 커뮤니티가 많았다. 파쿠르를 즐기는 사람이 국내에 3만 명 정도 있었다. 현재는 약 1천 명으로 줄었다. 현재 1세대의 평균 연령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다. 그들 대부분이 파쿠르로부터 멀어졌다.

"파쿠르 제너레이션즈의 집계에 따르면 전 세계 파쿠르 훈련자 수는 매년 증가해 현재 약 300만 명에 달합니다. 그런데 국내 파쿠르 훈련자는 감소하고 있어요. 그럴 만도 합니다. 어릴 때 손쉽게 오르던 건물이 너무 높아 보이고, 바닥에서 구르기라도 하면 다음 날 온몸이 욱신거리니 할 맛이 안 나는 거죠. 나이가 들면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이 기존 파쿠르의 한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파쿠르가 필요하다

새로운 파쿠르가 필요했다. 그는 2018년 봄 리더십 양성학교 '건명원'에 입학한다. 식견을 넓혀 파쿠르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 건명원에서 뭘 배웠나요?

"파쿠르를 하며 위험한 고비를 여러 번 넘겼어요. 그때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습니다. 인문 서적을 읽고 비로소 제 생각을 명확히 말할 수 있게 되었죠. 특히 최진석 전 원장님의 노장사상 수업이 기억에 남아요. 도덕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고 부르면 더 이상 도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도를 규정지으려는 시도가 도를 왜곡시킬 수 있다는 거죠. 파쿠르가 떠오르더군요. 파쿠르는 풀뿌리 운동이라 다른 스포츠처럼 명확히 정의할 수 없어요. 기술의 체계 정도만 있을 뿐이죠. 즐기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파쿠르가 존재할 수 있는 건데 저는 파쿠르를 규정하려 들었어요. 파쿠르의 가능성을 가로막았던 겁니다."
 
- 파쿠르를 규정지었다고요?
"파쿠르 창시자 데이비드 벨(David Belle)은 이렇게 말했어요. '유용해지기 위해 강해져라!' 저도 이 말을 신조로 삼았죠. 데이비드 벨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그의 정신을 퍼뜨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야만 파쿠르가 올바르게 퍼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저 뽐내기만 하는 파쿠르, 스포츠처럼 경쟁을 하는 파쿠르는 '틀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규정이 되레 파쿠르의 가능성을 제한한 것 같아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파쿠르 문화를 정착시키려면 파쿠르를 규정지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모두가 즐기는 파쿠르
 
새로운 파쿠르의 방향이 결정됐다. 젊은 남성만 즐기는 파쿠르는 철 지난 파쿠르다. 여성도 노인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김 대표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파쿠르 문화를 만들기로 했다. 10개월 뒤 건명원을 수료한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파쿠르로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 파쿠르가 어떻게 세상을 이롭게 만드나요?
"파쿠르의 핵심가치는 도전과 모험입니다. 외국 파쿠르 영상에 달린 댓글을 보면 감탄과 응원이 대부분이에요. 하지만 국내 영상 댓글은 욕이 더 많아요. 그런 거 왜 하느냐는 거죠. 도전과 모험을 수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창의적인 인재의 싹을 자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도전과 모험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요. 새로운 파쿠르 문화가 충분히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새로운 파쿠르를 만들기 위해서 뭘 하나요?
"체육관을 그만둘 무렵 크리킨디센터가 떠올랐습니다. 서울 은평구 서울혁신센터에 속한 청소년진로센터인데 청년들의 사회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곳이죠. 신사동에 있던 파쿠르 제너레이션즈 코리아의 거점을 여기로 옮겼어요. 센터의 도움을 받아 야외 놀이터를 만들어 무료로 개방했습니다. 서울시 공공놀이터보다 인기가 많더군요. 또 청소년 파쿠르 커뮤니티 '모험 움직임 지대'를 만들었어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과 페이스북 그룹으로 운영돼요. 매주 정모가 열립니다. 수강료도 강제성도 없지요. 모든 모임을 청소년들이 자율적으로 주최합니다. 놀이와 자율성. 이게 제가 생각하는 새로운 파쿠르의 핵심입니다."
 
 김 대표가 서울혁신센터 공방에서 나무와 철봉으로 직접 제작한 파쿠르 놀이터. 시민에게 무료로 개방된다.

김 대표가 서울혁신센터 공방에서 나무와 철봉으로 직접 제작한 파쿠르 놀이터. 시민에게 무료로 개방된다. ⓒ 장준영

   
거점을 옮긴 그는 정규 수업 외에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지난 10월 여성을 위한 파쿠르 워크숍 '퍼플버드'를 열었다. 유명한 여성 파쿠르 코치 '멜라니 헌트'가 수업을 이끌었다. 서울 금천구 '할머니학교'를 찾아 노인에게 파쿠르를 가르쳤으며 파쿠르와 관련된 사회 이슈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크리킨디 힘센발 파쿠르 축제'는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비정규 수업이다. 지난 11월 수업엔 100명이 넘는 가족이 참가했다.

"아들이 파쿠르를 한다고 하면 기겁하던 부모들이 이제 자식과 함께 서울혁신센터를 찾아요. 아들이 벽을 오르는 동안 엄마는 철봉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죠.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광경이에요."
 
'도둑질 기술'로 오해받던 파쿠르는 어느새 엄마가 먼저 즐기는 놀이가 되었다. 김지호 코치는 더 큰 목표를 품고 있다.

"지난해 말 국제체조연맹(FIG)이 파쿠르를 8번째 공식 기계체조 종목으로 편입했어요. 2024년 파리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을 추진 중이죠. 처음 공개하는 건데, 대한체조협회도 파쿠르를 공식 종목으로 채택해 내년 초 '파쿠르위원회'를 발족하기로 했습니다. 이 위원회에 제가 자문위원으로 참여하는데 내년 파쿠르 월드컵 개최가 목표예요. 파쿠르 선수로도 등록했고, 선수를 육성하는 동시에 대회를 준비할 생각입니다."
 
 올해 4월 일본에서 열린 '2019 파쿠르 월드컵 히로시마' 현장.

올해 4월 일본에서 열린 '2019 파쿠르 월드컵 히로시마' 현장. ⓒ 장준영

 
파쿠르 술래잡기 대회인 '스파이더 태그(Spider Tag)'도 계획 중이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비경쟁적인 파쿠르가 경쟁적으로 변할 것이라고요. 그건 진정한 파쿠르의 모습이 아니라는 거죠. 저는 경쟁적인 파쿠르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으려면 스포츠로서의 파쿠르도 있어야죠. 다양한 훈련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새로운 파쿠르 문화를 만드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토요일 오전 10시 수업이 있다며 그가 일어섰다. 저녁 7시까지 쭉 파쿠르 수업이 있다고 했다. 삶이 온통 파쿠르뿐인 그에게 "정말 파쿠르로 세상을 이롭게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가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더니 벽에 붙은 크리킨디센터의 포스터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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