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틀 포레스트> 포스터.

영화 <리틀 포레스트> 포스터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미성리는 쌀과 사과로 이름난 시골 마을이다. 마을 안에는 가게가 없어 간단한 물건을 사기 위해서도 읍내까지 나갔다 와야 한다. 혜원(김태리)은 석 달 전에 이곳으로 돌아왔다. 네 살 때 병든 남편의 요양을 위해 그의 고향으로 내려와 살던 혜원 엄마(문소리)는 남편의 죽음 후에도 그곳에 남아 어린 딸을 키웠다. 그리고 혜원이 수능 시험을 마친 어느 날, 편지만 남겨두고 집을 떠났다.
 
혜원도 대학 입학을 위해 집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그녀는 도시로 나가 사는 것이 꿈이었다. 미성리에서의 삶은 엄마의 선택이지 자신의 선택은 아니었다. 매일 밥 짓고 풀 뽑는 삶이 지루하고 싫었다. 그런데 엄마가 먼저 선수를 쳤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혜원은 점차 엄마와 함께 살던 미성리에서의 삶과는 동 떨어진 생활에 익숙해지면서도 지쳐간다.
 
그리고 임용고시에 낙방한 어느 날, 혜원은 인스턴트 음식으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허기 때문에 미성리로 내려온다. 마당에 눈이 쌓인 추운 겨울밤이었다. 혜원은 서둘러 불을 피우고, 마당에서 언 배추를 뽑아 된장국을 끓여 먹고 잠든다.

엄마는 곧 대학생이 되어 떠나갈 딸이 스스로의 힘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인생은 타이밍인데, 딸과 엄마 두 사람 모두에게 그러한 인생의 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남편과의 결혼으로 포기했던 일들을 해보고 자기만의 시간을 만들어 가고자 집을 떠난 것이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 한 장면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 컷 ⓒ 영화사 수박


엄마가 없는 집으로 다시 돌아온 혜원은 엄마에게서 보고 배운 요리를 하나둘 기억해내며, 자연의 시계와 농사일, 음식을 만들어 먹는 감각을 깨운다. 직접 눈을 치우고 장작을 패며,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논의 벼를 세워 일으키고, 뙤약볕 아래서 잡초를 뽑기도 한다. 사나흘만 있다 갈 거라던 그녀는 겨울을 다 지내고, 봄, 여름, 가을까지 사계절을 한 바퀴 돌도록 열심히 농사일을 하고 요리를 한다. 그곳에 인스턴트나 배달음식은 없다. 게으름과 편한 생활도 없다.
 
언 몸을 녹이는 얼큰한 수제비, 시금치와 호박을 넣은 팥시루떡, 어른의 맛인 누룩으로 빚어낸 막걸리, 봄나물을 얹고 꽃잎을 뿌린 스파게티, 양배추 달걀 샌드위치, 나물과 꽃잎이 재료가 된 튀김, 콩국수와 밤 조림, 곶감, 양파구이 등 계절을 따라 만들어내는 그녀의 음식에는 자연이 녹아들어 있고, 엄마와의 추억이 소환되기도 한다.
 
엄마는 "기다릴 줄 알아야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맛 볼 수 있다"거나, "요리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 말했다. 그녀의 요리는 예측불허이고 지루하지 않았다. 초등학생 딸이 왕따를 당하고 있는 것 같다며 하소연하자, 엄마는 위로의 말 대신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준다. 딸에게 직접 옷을 만들어 입히기도 하고, 늘 자연의 재료로 흥미로운 요리를 만들어주는 엄마는 친구들의 따돌림에 속상해 하는 딸에게 대처하는 방식도 남달랐다.
 
"내버려 둬. 네가 반응하면 걔네들은 신나서 더 할 걸. 너 괴롭히는 애들이 제일 원하는 게 뭔지 알아? 네가 속상해 하는 거. 네가 안 속상해 하면 복수 성공."
 
혜원은 자신은 속상한데 엄마는 별 일 아닌 것처럼 위로도 안 해준다며 울상을 짓고 항의한다. 그러다 엄마가 '뚝딱' 만들어 준 달콤한 간식을 먹고 다시 웃는다. 차가운 커스터드 크림 위에 따뜻한 캐러멜 토핑을 얹은 크렘브륄레라는 이름도 어려운 프랑스식 디저트였다. 캐러멜을 톡 터뜨려 한 스푼 가득 입 속에 머금으니 사르르 몸과 마음이 녹아든다. 이것이 엄마의 위로였다. 직장 상사로 인해 괴로워하는 고향 친구 은숙(진미주)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 가벼운 말을 툭 뱉었다가, 은숙이 서운해 하자 혜원이 사과한 방법도 엄마의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고모는 혜원이 엄마를 빼닮았다고 말한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간 후에도 엄마가 작은 시골마을에 남아 딸을 키운 까닭은 혜원을 그곳에 심고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혜원의 독백처럼 엄마에게는 자연과 요리, 그리고 딸을 키우는 일이 하나의 세상이었고 엄마만의 작은 숲이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 컷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떠나간 엄마를 원망하던 혜원은 미성리에서 엄마 없이 보낸 1년 동안 비로소 엄마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가 바라던 대로 혜원은 자신이 이 작은 시골마을의 토양과 공기를 먹고 자란 작물임을 깨닫고, 이 땅의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다시 자기만의 숲을 찾아 나설 힘을 얻는다. 그리고 도시에 남겨두고 온 남자친구에게도 당당하게 고한다. 자신은 도망치거나 떠나온 것이 아니라, 미성리로 '돌아온 것'이라고. 비로소 혜원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의 해답을 찾고, 진정한 홀로서기를 준비한다.
 
남자친구는 손수 만든 도시락을 챙겨주는 혜원의 정성에 감사해 하기보다는 "그 시간에 차라리 공부를 더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혜원은 한 끼 한 끼 정성들여 요리하고 먹는 일이 취업준비를 하고 공부를 하는 일보다 덜 중요한 일이 아님을 알았다. "배가 고파" 고향집에 내려온 혜원은 이제 몸과 마음의 배고픔을 모두 채울 수 있는 자기만의 답을 찾았다. 영화가 끝날 즈음 관객은 혜원이 미성리에서 잠시 위로를 얻고 다시 도시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미성리에 온전히 뿌리 내리기 위해 돌아올 것임을 믿게 된다.
 
나는 아이를 어느 토양에 심고 뿌리내리게 하고 싶은 걸까. 아이에게 무엇을 심어주고 싶은 걸까. 뻔한 내용에 최루성 짙기는 하지만, 일본 영화 <하나와 미소시루>(2015)에서 말기 암과 싸우며 죽음을 준비하는 치에(히로스에 료코)는 딸 하나(아카마쓰 에미나)에게 미소시루(일본식 된장국) 끓이는 방법과 빨래 정리 등의 집안일을 가르치고 딸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물려주고 싶어 한다.
 
"하나가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엄마랑 아빠가 많이 슬플 거야. 그러니까 잘 먹어야 해. 잘 먹으려면 잘 만들어야 해. 먹는 것도, 만드는 것도 대충 해선 안 돼."
 
덕분에 어린 딸 하나는 현미를 먹고 매실 장아찌와 단무지를 좋아하며, 간식으로는 말린 정어리를 찾는 유치원생이 되었다. 미소시루를 끓여 엄마에게 가져다주는 아이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리틀 포레스트>나 <하나와 미소시루> 속 자녀는 모두 딸이고, 엄마들은 딸에게 요리를 가르친다. 하지만 남녀를 떠나서 먹는 일은 생명의 바탕이며, 잘 먹기 위해서는 잘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아들의 엄마인 나는 아들이 스스로 먹을 요리를 만들 줄 알며, 이왕이면 건강을 지켜줄 좋은 음식을 만들기를 바란다. 인스턴트 음식, 가공식품,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즉석식품이 몸과 마음의 허기를 어느 쪽도 채워줄 수 없으며, 점차로 심신의 건강을 해친다는 걸 직접 겪었기 때문에 그러한 소망은 절실하다.
 
청소와 빨래, 고장 난 물건 고치기, 물건을 사고 올바르게 돈을 사용하는 법, 자기 일은 스스로 하기 등 아이가 무엇이든 스스로 하는 습관을 길러주고 싶다. 귀한 자식이라 해서 "엄마 아빠가 뭐든 다 해줄게", "엄마가 지켜줄게"가 아니라,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서툴러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리틀 포레스트>의 스틸 사진

<리틀 포레스트> 스틸 컷 ⓒ 메가박스㈜플러스엠

 
이렇게 썼지만, 실제로는 아직 말도 못하는 26개월의 어린 아들을 위해 여전히 '하수(下手)'인 엄마는 밥과 국물을 흘리는 게 싫어 밥을 떠먹여주고, (엄마의) 시간 절약 및 체력 소모를 막는다는 명분 하에 양말과 신발도 신겨주며, 뭐든 대신 해주는 습관을 아직 고치지 못했다. 하지만 엄마인 내가 아들을 위해 진정 해주어야 할 일은 아이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엄마인 나도 연습 중이다.
 
엄마로서 아이에게 심어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또 이런 것들이 있다.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자존감, 어떤 사람이든 존중할 줄 아는 태도와 예의를 가르쳐주고 싶다.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할 뿐 아니라 옳은 것을 밀고 나아갈 줄 아는 당당함과 씩씩함도 심어주고 싶다. 그러려면 엄마인 나부터 자연과 사람과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존중할 줄 아는 태도를 갖추어야 할 것이고, 매끼 소홀함 없이 건강한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먹여주고 먹어야 할 것이다.
 
어려움에 맞닥뜨렸을 때 남 탓을 하거나 타인에게 의존하기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씩씩하게 해결해나가야 할 것이다. 또 아이가 잘 못 한다고 해서, 엄마가 원하는 것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아이의 일을 대신 해결해주기보다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돕고 응원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리라. <리틀 포레스트>는 두 번, 세 번 보아도 여운이 남는 영화다.
리틀 포레스트 요리 부모됨의 생각하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주부이자, 엄마입니다.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