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의 역사는 이성계와 정도전으로부터 쓰여지지만, 이 역사는 얼마 안 가 이방원의 역사로 대체된다. 이방원은 건국 6년 만인 1398년 '왕자의 난'을 일으켜 조선을 자기의 나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성계·정도전이 등장하는 사극을 시청하다 보면, 조선 건국 직후부터 이성계·정도전과 이방원이 갈라져 대립하는 장면을 지켜보게 된다. 23일 종영한 JTBC <나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는 이성계(김영철 분)과 이방원(장혁 분)이 부자지간인데도 거칠게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최근 방영분에서는 이방원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성계를 '식물 임금'으로 만들어버리자, 이성계가 넷째아들 이방간(이현균 분)을 움직여 다섯째아들 이방원을 견제하는 장면이 나왔다.
 
역사책에서든 사극에서든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편해 한다. 아버지와 아들 간에 권력투쟁이 벌어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면도 없지 않지만, 이 장면이 나올 때마다 개혁가 정도전의 꿈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는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조선의 실질적 건국자인 정도전

고려시대에 비해 조선시대에 노비 지위가 개선된 사실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듯이, 조선의 실질적 건국자인 정도전은 당시 관념으로 볼 때 상당히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어머니 쪽으로 노비의 피를 물려받은 그는 백성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이었던 노비들의 지위 개선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권문세족이라 불린 고려 후기 지배층을 약화시키고자, 토지 전문가인 조준을 앞세워 과전법이라는 토지개혁도 단행했다. 또 귀족들의 힘을 빼고 그들을 국가 공권력 하에 두고자 사병 혁파도 실시했다. 요즘으로 치면, 구사대 비슷했던 사병 부대를 없애려 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고구려의 땅인 요동(만주)의 수복도 시도했다. 몽골이 기울었지만 아직 완전히 약해지지 않았고, 명나라가 떠올랐지만 아직 완전히 강해지지 않은 동북아 패권의 공백기를 타, 한민족의 가슴에 내재된 열망에 불을 지피고자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이방원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물론 이방원이 정도전의 개혁을 전부 다 부정한 것은 아니다. 노비 지위 개선이라든가 사병 혁파 같은 것은 정도전 사후에도 추진됐다. 그렇지만, 정도전의 개혁이 이방원에 의해 상당부분 무산된 것은 사실이다.
 
이방원의 이미지
 
 이방원이 묻힌 헌릉.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소재.

이방원이 묻힌 헌릉.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소재. ⓒ 김종성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시대의 한 획을 그은 정도전을 제거하고 그의 개혁을 무산시켰으니, 이방원에게 낡은 세력의 이미지가 덧씌워질 만도 하건만 이방원한테서는 그런 이미지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피도 눈물도 없는 철권통치자라는 이미지는 강해도, 낡음의 이미지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신생 국가의 세 번째 군주라서 낡은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당대 최고의 개혁가를 죽이고 그의 꿈을 짓밟았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생길 만도 한데, 이방원은 용케도 그것을 피해나갔다. 또 그가 최후의 승자가 되고 그의 혈통에서 왕들이 배출됐기 때문에, 그가 그런 이미지가 생기지 않은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진보와 보수의 대결 구도에 관한 오래된 패턴이 작동하고 있다. 오랫동안 역사를 움직여온 그 패턴이 이방원의 이미지를 '보호'하고 있다. 이 덕분에 그가 낡은 이미지와 결합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발전의 패턴

정치적 격변이 벌어지면 정치판이 새롭게 개편된다. 구세력은 도태되고 신세력 내부에서 새로운 진보와 새로운 보수가 파생되곤 한다. 1567년 선조 즉위 전만 해도 진보세력이었던 사림파(유림파)는 집권 후에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고 다시 남인·북인과 노론·소론으로 갈라졌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진보와 새로운 보수가 그 내에서 생겨났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보수를 대표한다는 자유한국당의 모습은 어떨까? 2016년 촛불혁명 이전을 지배한 구세력이었던 이들은 별다른 인적 쇄신이나 이념적 혁신도 없이 새로운 시대에도 계속해서 보수의 대표주자로 남으려 하고 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에 보수 정당을 이끈 노태우와 김영삼은 민주화 세력이나 노동운동권 출신을 대거 수혈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보수의 대표주자로 남을 수 있었다.
 
지금의 한국당에서는 그런 노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 때 인적 쇄신이 시도된 적은 있지만,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거기다가 이념적 쇄신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항상 똑같은 주장만 나오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보수가 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김세연 한국당 의원이 "한국당의 존재 자체가 역사의 민폐"라고 발언한 것은 역사발전의 패턴을 잘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혁신을 거부하면서도 한국당은 정치개혁을 저지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공수처 설치 반대와 선거법 개혁 반대를 외치며, 이 추운 날씨에 노상에서 단식하는 황교안 대표의 행보가 한국당의 처지를 잘 반영한다.
 
새롭게 거듭나지 않는다면, 한국당은 촛불혁명 이전의 새누리당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낡은 세력으로 한국 현대사에 기억될 수밖에 없다. 이런 류의 정치집단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힘든 것은 물론이고 역사에서도 낡은 세력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보수적, 사대적인 입장에 선 이방원... 그러나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왼쪽)이 22일 오후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단식 중인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를 찾아 지소미아 효력정지 연기 관련 설명을 하고 있다.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왼쪽)이 22일 오후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단식 중인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를 찾아 지소미아 효력정지 연기 관련 설명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당은 이방원이 정도전의 개혁을 무산시키고도 낡은 세력으로 기억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방원이 이미지를 보호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와 정도전의 대결이 새로운 시대의 개막 직후에 벌어진 것과 관련이 있다.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로 이성계·정도전의 동지였던 정몽주는 1392년 조선 건국 직전에 적으로 돌아섰다. 토지개혁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이성계·정도전과 함께 새 나라를 세우게 될 사람들은 토지개혁을 찬성했지만, 정몽주와 그 지지자들은 반대했다.
 
이때 이방원은 정도전과 함께 개혁을 지키는 편에 섰고, 정몽주의 공격으로부터 이성계·정도전을 보호하고자 정몽주 습격을 단행했다. 이것이 낡은 세력의 와해와 정치판의 물갈이로 이어지고, 개혁파들의 정치권 장악으로 연결됐다.
 
이렇게 개혁파 중심으로 정계가 꾸려지고 왕조가 창업된 1392년 직후에, 1567년 이후와 유사한 양상이 벌어졌다. 1567년 이후에 사림파가 동인당과 서인당으로 갈라지듯이, 조선을 건국한 세력도 진보와 보수로 갈라졌다. 정도전은 진보적이고 민족적인 입장에 섰고, 이방원은 보수적이고 사대적인 입장에 섰다.
 
이방원이 1392년에 보수가 됐다고 해서 그가 이전 시대의 보수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토지개혁 같은 개혁조치를 찬성하는 전제 하에서 새로운 개념의 보수, 새로운 시대의 보수가 됐을 뿐이다.
 
이처럼 토지개혁과 조선 건국이라는, 당시로서는 진보적 업적을 함께 이룬 세력 내에서 정도전 편과 이방원 편이 갈라졌기 때문에, 이방원 편이 보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낡은 세력으로 기억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토지개혁과 조선 건국을 반대했던 세력이 정도전 정권을 와해시켰다면, 그 세력은 역사에서 낡은 수구세력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도전과 함께했던 이방원이 새로운 시대의 보수를 이끌었기 때문에 낡은 세력이란 이미지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나라>에서 아버지 이성계를 압박하는 이방원은 그런 이유로 이미지를 보호할 수 있었다.
 
정치적 격변이 벌어지는 시대에는 인적·이념적 쇄신으로 거듭나야만 이방원처럼 새로운 시대의 보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이 드라마에서 느낄 수 있다.
 
추운 날 단식하는 황교안 대표 옆에 물병과 함께 스마트폰이 있다. 비록 노상에서나마마 그 폰으로 <나의 나라>를 시청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나의 나라 이방원 정도전 황교안 자유한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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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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