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에서는 한 시즌을 치르다 보면 주전 7명(리베로 포함) 외에도 반드시 필요한 백업 포지션이 있다. 먼저 주전과 큰 기량 차이가 없는 백업 세터. 세터는 코트 안 5명의 공격수를 진두 지휘해야 하는 '야전사령관' 같은 자리지만 세터 역시 컨디션이 나쁘거나 몸 상태가 안 좋을 때가 있다. 따라서 주전 세터를 대신할 백업 세터의 존재는 긴 시즌을 치르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V리그에는 외국인 선수라는 특수 포지션(?)이 있어 대부분의 팀들에서 외국인 선수가 주 공격수로 활약한다. 외국인 선수들도 한국에서 뛰면 많은 공격 점유율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공격 부담을 떠안는 외국인 선수 역시 잦은 부상의 위험에 노출돼 있기 때문에 구단에서는 언제나 외국인 선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토종 공격수를 대기시켜야 한다.

지난 16일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는 외국인 선수 루시아 프레스코가 맹장 수술을 받으면서 최소 2주 정도의 결장이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흥국생명은 루시아가 빠진 후 두 번째 경기였던 21일 KGC인삼공사전에서 세트스코어 3-1로 승리하며 승점 3점을 챙기고 연패에서 탈출했다. 프로 5년 차 공격수 이한비가 17득점을 올리며 루시아의 공백을 완벽히 메워줬기 때문이다.

2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한 원곡고 창단 멤버
 
 이한비는 루키 시절부터 강한 파워를 앞세운 뛰어난 공격력을 인정 받았다.

이한비는 루키 시절부터 강한 파워를 앞세운 뛰어난 공격력을 인정 받았다. ⓒ 한국배구연맹

 
김연경(엑자시바시)과 황연주(현대건설 힐스테이트), 배유나(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는 V리그를 대표하는(또는 대표했던) 스타 선수라는 점 외에도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안산 원곡중학교 동문이라는 점이다. '화성 머리띠' 김수지(IBK기업은행 알토스)의 아버지이기도 한 김동열 감독이 이끌던 원곡중학교는 V리그의 많은 스타들을 배출하며 여자배구 유망주의 산실로 떠올랐다.

하지만 김동열 감독은 힘들게 키운 선수들이 중학교 졸업 후 타지역으로 진학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결국 김동열 감독은 지난 2013년 7월 안산시의 도움을 받아 원곡고 배구부를 창단했다. 이번 시즌 1라운드 MVP에 선정되며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GS칼텍스 KIXX의 토종 에이스 강소휘와 흥국생명이 자랑하는 '슈퍼서브' 이한비가 바로 원곡고등학교의 창단 멤버다.

2014년까지는 이재영(흥국생명), 이다영(현대건설) 자매와 하혜진(도로공사)이 버티던 선명여고에 가려 힘을 쓰지 못하던 원곡고는 강소희와 이한비가 3학년이 되던 2015년 태백산배 중·고 배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원곡고 배구부 창단 2년 만에 달성한 쾌거였다. 그리고 이한비는 이 대회에서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 강소휘를 제치고 대회 MVP에 선정됐다. 

하지만 프로 입단 후 강소휘와 이한비의 희비는 엇갈리고 말았다. 전체 1순위로 GS칼텍스에 입단한 강소휘가 첫 시즌부터 두각을 나타낸 반면에 3순위 이한비는 이재영과 테일러 쿡(도로공사)에 가려 좀처럼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이한비는 시즌 후반 테일러가 부상으로 교체된 후 간간이 출전 기회를 잡아 16경기에서 64득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27경기에 출전해 154득점을 올리며 뛰어난 공격력을 과시한 강소휘에게 신인왕 자리를 내줬다.

2016-2017 시즌 프로 2년 차가 된 이한비는 팀 내 비중이 더욱 줄었다. 수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박미희 감독이 공격력이 좋은 이한비 대신 '살림꾼' 신연경을 주전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가끔씩 전위에서 높이와 공격력이 필요할 때에도 이한비보다는 경험이 더 많은 정시영(현대건설)이 주로 투입됐다. 결국 이한비는 8경기에 출전해 단 21득점을 올리며 '2년 차 징크스'를 겪어야 했다.

서브리시브 부담 없다면 코트에서 충분히 제 몫 할 수 있는 공격수
 
 수비에 대한 부담만 없다면 이한비는 흥국생명에서 충분히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선수다.

수비에 대한 부담만 없다면 이한비는 흥국생명에서 충분히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선수다. ⓒ 한국배구연맹

 
이한비는 신인 때부터 공격력 만큼은 프로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팀 선배 이재영이나 친구 강소휘처럼 뛰어난 탄력을 갖추진 못했지만 타고난 힘을 바탕으로 한 과감한 공격은 마치 V리그 여자부 최고의 파워를 자랑하는 '표장군' 표승주(기업은행)를 연상케 한다. 꾸준한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재영과 외국인 선수를 보좌할 '제3의 공격수'가 부족했던 흥국생명에서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로 인정 받았다.

하지만 흥국생명은 이한비에게 기회를 주는 대신 작년 FA시장에서 윙스파이커 김미연을 영입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김미연이 가세한 흥국생명은 지난 시즌 '김연경 시대' 이후 10년 만에 챔프전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한비는 흥국생명이 우승의 기쁨을 누렸던 지난 시즌 발목 부상에 시달리며 정규리그 5경기(4득점), 챔프전 1경기(무득점) 출전에 그쳤다.

이한비는 이재영, 김해란 등 국가대표 언니들이 빠진 지난 9월 코보컵에서 김미연과 함께 흥국생명의 주공격수로 좋은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정작 V리그 시즌이 시작된 후에는 이재영-김미연-루시아에 가려 웜업존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한비는 뛰어난 공격력에 비해 서브리시브나 수비에서는 약점을 보이는 선수이기 때문에 김미연에 비해 코트에서의 활용도가 썩 높지 않다.

하지만 흥국생명은 루시아의 맹장수술로 아포짓 스파이커 자리에 공백이 생겼고 박미희 감독은 21일 인삼공사전에서 이한비를 선발 출전시켰다. 결과적으로 이한비 선발 카드는 기가 막히게 적중했다. 17.31%의 공격점유율을 기록한 이한비는 48.15%의 높은 성공률로 17득점을 적립했다. 오랜만에 풀타임으로 경기를 치르며 자신감이 생긴 이한비는 3개의 서브득점과 1개의 블로킹을 곁들이며 흥국생명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이한비는 윙스파이커 자리에 들어갈 때는 상대의 집중적인 목적타 서브에 흔들려 공격리듬까지 깨지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인삼공사전에서 루시아의 자리에 들어간 이한비는 서브리시브에 대한 부담을 내려 놓고 공격에만 전념하며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박미희 감독이 공격력 만큼은 이미 충분히 검증된 이한비를 적재적소에 활용한다면 흥국생명의 시즌 운영에도 분명 큰 보탬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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