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존무상> 포스터.

영화 <지존무상> 포스터.ⓒ 태흥영화주식회사

 
1980년대 홍콩영화는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그 인기는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쳐서 당시 한때 미국영화 보다 더 우월한 포스를 뿜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할리우드 영화'처럼 '홍콩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브랜드였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할 운명이었다. 1990년대 초부터 기울기 시작해 1990년대 말이 되기 전에 쇠퇴하고 만다.

그 짧은 시기, 성룡으로 대표되는 무술, 주윤발로 대표되는 홍콩 느와르, 주성치로 대표되는 개그, <천녀유혼>으로 대표되는 무협판타지 등의 장르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성공에 힘입어 수많은 후속작 또는 아류작를 양산했는데 확대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선 장점으로 작용했을지 모르나 결국 가장 결정적인 쇠퇴의 단점으로 작용했다. 와중에, 도박 또한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 시작이 1989년작 <지존무상>이다. 
 
3개월 만에 <도신>으로 도박영화 셀프 복제를 하여 큰 성공을 거둔 왕정 감독의 히트작이자 황화승 감독의 유일한 연출작으로, 홍콩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훨씬 더 많은 인기를 구가했다. 알란 탐과 진옥련이 주인공이지만, 주연으로 분한 유덕화와 관지림이 수혜를 입었다. 특히 유덕화에겐 <열혈남아> <천장지구> <무간도>와 더불어 <지존무상>이 그가 출연한 수많은 작품들 중 압도적 대표작으로 남아 있다.

아해와 아삼의 의리, 그리고 비극

교도소에서 출소한 아해(유덕화 분)는 친구 아삼(알란 탐 분)과 함께 다시 홍콩 도박계에 발을 붙인다. 이내 미국에서 용 형이 지원요청을 해오는데, 일본인 도박사들이 수법을 쓰는 것 같으니 이를 해결해달라는 것이었다. 아해와 아삼은 어렵지 않게 수법을 간파해 해결하곤 미국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아삼은 카렌이라는 여인을 만나 결혼까지 약속한다. 

홍콩으로 돌아온 아해와 아삼, 일상을 즐기다가 아삼이 조직원들로 보이는 이들에게 습격을 당한다. 미국에서 그들이 일망타진시키는 데 도움을 준 일본인 도박사들과 얽혀 있는 마피아 미야모토 부자가 사주했던 것이다. 아해는 아삼을 구하려다 왼손을 못 쓰게 되고 힘든 생활을 이어간다. 한편 아삼은 카렌과 결혼하며 장인어른께 사업을 배우는가 하면 도박을 끊겠다고 약속한다. 힘들어 하는 아해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지만 아해는 거절한다. 상심해 있는 아해와 아삼의 도박 파트너 보보는 연인관계가 된다. 

아해는 미야모토 부자의 아들인 타로한테서 거액의 돈을 따 보보와 함께 브라질로 가 행복하게 살겠다는 마지막 각오로 아삼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아삼은 거절하고 아해 혼자서 향한다. 왼손을 다쳐 타로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아해는 사전에 보보와 짜고 타로의 돈을 강탈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에 타로는 복수로 아삼과 카렌의 아버지가 사업 차 호주에 가 있는 사이 카렌을 납치하곤 아해에게 알린다. 아해는 죽음을 각오한 채 카렌을 구하러 떠나는데...

홍콩 도박영화의 시작이자 상징

영화 <지존무상>은 몇몇 작품과 함께 '홍콩영화'의 상징 같은 작품이다. 하여 연출력과 만듦새와는 별개로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인정받을 것이다. 영화는 홍콩 도박영화의 시초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 이전에 홍콩 느와르 장르에 속한다. 다만, <영웅본색> <첩혈쌍웅>과 다르게 조직 이야기가 아니라 도박 이야기가 주이다. 

홍콩 느와르는 조직 즉 갱단에서의 비극적인 이야기와 화려하고 비현실적인 총격전과 죽음도 불사하는 의리가 가장 중심이자 모든 것이다. 이미 홍콩에선 1950~1960년대부터 존재해왔지만, 1986년 <영웅본색>으로 본격적으로 알려져 양산되고 홍콩영화 자체를 상징하고 이끄는 장르가 되었다. <지존무상>은 <영웅본색>으로부터 불과 3년 후의 영화지만, 그 사이 무수히 쏟아져 나온 홍콩 느와르들에서 느꼈을 피로감과 별개로 떨어질 수 없었다. 즉, 이 영화는 홍콩 느와르 장르에선 늦은 편이자 일각에선 이미 퇴화되고 있을 때 나온 작품이라고까지 평한다. 

이미 정통이라고 할 만한 홍콩 느와르는 다 나왔을 때 <지존무상>이 출현했고, '도박'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기회로 만들 것일 테다. 그 결과 지금에 이르러서는 홍콩 도박영화의 시작이자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엔 총격전과 의리와 비극이 존재한다. 특히 의리와 비극은 원류인 <영웅본색> 못지 않다. 심금을 울리는 상징적 장면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의리와 비극의 길목에서 이루어지는 실존적 도박

홍콩 도박영화 하면 사실 <도신>을 가장 앞에 세운다. 당대 최고 주윤발과 유덕화를 내세운 무협 기반 도박 소재의 코믹 영화로, 왕정 감독의 작품이다. 그에 살짝 앞서 개봉한 <지존무상>이 느와르 기반의 나름 진지한 영화였던 것과 확연히 다르다. 한편, 이들 뒤를 이은 <도성>은 주성치를 앞세워 <도신>을 향한 오마주와 패러디로 중무장한 코믹 영화이다. 도박영화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이어지는 때의 홍콩영화계를 점령한 주류였던 것이다. 

<지존무상>은 이들 중 홍콩 현지에서는 가장 낮은 흥행성적을 기록했지만, 한국에선 가장 좋은 성적을 냈다. 홍콩 느와르에 도박을 입힌 점과 너무나도 멋지게 나온 유덕화가 큰 몫을 차지했겠지만, 귀에 착 감겨서 떠나지 않는 제목도 한몫했을 듯하다. 다만, 영화에선 정작 도박하는 모습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신, 의리와 비극의 주요 길목에서 실존적 도박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지점이 <지존무상>만의 백미이다. 

오래된 영화를 다시 보면서 추억을 되짚는 건 축복받은 일이다. 홍콩영화는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콘텐츠인 것 같다. 그 시대에 화려하게 꽃 피고 금방 져버려서 이제는 흔적도 찾을 수 없으니 말이다. 오직 추억으로만 복기할 수 있을 뿐이다. <지존무상>은 그 한복판에서 가장 빛났던 존재 중 하나이다. 왕정 감독과 유덕화 배우는 여전히 열일 중이지만, 알란 탐이나 관지림이나 진옥련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홍콩영화가 다시금 기지개를 펼 날이 요원한 가운데 하염없이 옛날을 그리며 전설을 추억할 수밖에 없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형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singenv.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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