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KBS <다큐 인사이트>는 내레이션을 과감히 생략하고 영상 자료와 인터뷰만으로 구성된 새로운 문법의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를 선보이는 중이다. KBS 영상 아카이브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하여 대한민국의 오늘을 돌아본다는 기획 하에 시작한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는 1편 ‘우리의 소원’ 편에선 1980년대 민주화의 에너지가 분출하던 순간을 찾았다. 2편 ‘대망’ 편은 각종 영상을 통해 1999년 대우 그룹 해체의 시간을 재조명했다.

지난 14일엔 세 번째 이야기 ‘수능의 탄생’ 편을 방송했다. ‘수능의 탄생’ 편은 과외 망국론의 대두, 강남 8학군의 태동, 전교조의 탄생 등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을 다각적으로 살펴보며 21세기로 향하던 대한민국의 대학 입시 제도를 되돌아보았다.
 
<다큐 인사이트> '수능의 탄생' 편 프로그램의 한 장면

▲ <다큐 인사이트> '수능의 탄생' 편 프로그램의 한 장면 ⓒ KBS


우리나라의 대학 입시 제도는 1945년 광복 이후 지난 70년 동안 큰 틀만 18차례나 바뀌었을 정도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국가가 주관하는 대학 입학시험 제도는 1969년 ‘대학입학 예비고사’를 시행되면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1980년 발표된 과외 전면 금지와 맞물려 1982년부턴 대학별 본고사가 폐지되고 대학입학 예비고사는 ‘대학입학 학력고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현재는 1994년 대학 입시부터 도입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20여 년째 이어지고 있다.

흔히들 “대학 입시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라고 말한다. 고3 학생과 학부모의 생각은 다르다. 예전부터 학부모들은 “고3이 한 집안의 주인”이라고 했다. 온 가족이 힘을 모아 대학 입시를 도왔다는 소리다. 당연히 고3이 느끼는 입시 부담감도 엄청났다. 80년대까지만 해도 4시간 자면 합격하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4당5락’이 금과옥조처럼 사용되었다.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대학 입시에 집착하는 걸까? 사교육계의 대부라 일컬어지는 손주은 메가스터디 회장은 대한민국의 과열된 입시 열풍의 원인을 명문대가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한국 사회에서 입시가 갖는 의미는 대학 진학이 아니다. 대학 진학을 통한 사회적 지위 획득이다.”
 
<다큐 인사이트> '수능의 탄생' 편 프로그램의 한 장면

▲ <다큐 인사이트> '수능의 탄생' 편 프로그램의 한 장면 ⓒ KBS


치열한 교육열은 자연스레 과외를 부추겼다. 대학입학 예비고사 시절엔 지나친 사교육 열풍과 고액 과외 성행으로 인해 ‘과외 망국병’이란 표현이 방송과 신문에 등장했다. 12, 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신군부는 서민들의 지지를 얻고자 사회개혁정책으로 1980년 7월 30일 전면적인 과외 금지를 담은 교육 개혁 조치를 발표한다.

과외를 금지하자 갖가지 불법이 속출했다. 전화를 이용한 과외를 하거나 친척 등으로 위장하는 방법 등이 동원되었다. 심지어 차를 이용하여 고속도로를 오가면서 그 속에서 과외를 하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은 과외 금지 조치가 비현실적인 정책이었다고 회상한다.

“현실적으로 (단속이) 불가능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고3) 아이들 숫자만큼 경찰을 만들어야 한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에 걸쳐 정부는 한강 남쪽의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강북의 명문 학교들을 강남으로 보냈다. 그러자 강남구와 서초구에 위치한 고등학교 학군을 이르는 ‘8학군’이 형성되며 강남의 집값이 상승했다. 교육 격차도 벌어졌다. 한강을 가르는 강남과 강북의 계층 분단이 일어난 것이다.
 
<다큐 인사이트> '수능의 탄생' 편 프로그램의 한 장면

▲ <다큐 인사이트> '수능의 탄생' 편 프로그램의 한 장면 ⓒ KBS


전두환의 5공화국과 거리를 두고 싶었던 노태우의 6공화국은 1989년 과외를 허용하는 새로운 교육 정책을 발표한다. 그러나 단순 암기식 시험인 대학입학 학력고사의 문제점을 고치지 않은 채로 사교육 시장의 빗장을 풀어버리자 전국적으로 과외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경쟁은 심화히고 스파르타 학원이 성행했다. 외국엔 없는 ‘입시장애증후군’ 환자가 발생하고 해마다 50~60명에 가까운 입시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극장가엔 입시 지옥을 그린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가 걸렸다.

비교육적인 입시 흐름과 6월 항쟁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열기는 두 가지 결과를 잉태했다. 하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태동이다. 1989년 전국의 2만여 명의 교사들은 교육의 자주성/전문성 확립, 교육 민주화 실현, 교직원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과 민주적 권리의 획득 및 여건의 개선, 학생들이 민주시민으로서 자주적 삶을 누릴 수 있게 하는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의 실현, 자유/평화/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여러 단체 및 교원단체와의 연대 등을 골자로 한 강령을 선포하고 전교조를 결성한다. 당시 이수호 초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사무처장은 전교조의 당위성을 묻는 기자에게 ‘교육의 정상화’를 강조했다.

“지금 우리 교육을 정상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교사들은 그 책임을 스스로 묻고 있다. (교육을) 고쳐나가기 위해선 우리가 단결할 수밖에 없다. 단결할 방법은 자주적인 교사 단체를 만드는 것이다.”
 
<다큐 인사이트> '수능의 탄생' 편 프로그램의 한 장면

▲ <다큐 인사이트> '수능의 탄생' 편 프로그램의 한 장면 ⓒ KBS


교육의 민주화 흐름 속에 입시 제도에 대한 비판도 커졌다. 주입식 교육과 과열된 입시 시장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목표 아래 미국의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SAT를 참고하여 종합적인 고등 사고 능력을 평가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도입된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개발한 박도순 교수는 “단편적인 지식 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설명한다.

일곱 차례의 걸친 실험 평가 후 수능은 1993년 8월 20일에 치러졌다. 대학 입시 사상 처음으로 듣기 평가도 도입되었다. ‘탈 암기’와 ‘창의성’을 기치로 내건 수능의 평가는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문제를 예측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호평도 받았다.

수능 첫해인 1993년엔 8월 20일과 11월 16일 두 번 시험을 보았다. 중요한 시험이니만큼 두 번의 기회를 주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수능 1차에 비해 수능 2차가 어렵게 출제되어 대부분 수험생의 점수는 떨어졌다. 이를 두고 국가적 자원의 낭비이고 입시생을 두 번 고생시킨다는 비판이 거세지자 이듬해부턴 1회로 축소된다.
 
<다큐 인사이트> '수능의 탄생' 편 프로그램의 한 장면

▲ <다큐 인사이트> '수능의 탄생' 편 프로그램의 한 장면 ⓒ KBS


이후로도 대학 입시 제도는 크고 작은 변화를 있었다. 매년 언론을 장식한 대입 관련을 뉴스를 살펴보자. ‘대입 크게 바뀐다’, ‘어떻게 변하나’, ‘특차 모집 대폭 확대’, ‘지원 판도 바뀐다’, ‘40% 특별전형’, ‘학생부 비율 50%’, ‘영어 시험 안 보나’, ‘새 입시 제도 도입’, ‘절대평가 검토’, ‘수시, 정시 통합 검토’ 등 끊임 없이 변화 일색이다. 이번엔 ‘대입제도 개편 착수, 정시 확대되나’란 소식이 들린다.

‘수능의 탄생’ 편의 초반부엔 1980년대 고3 학생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이들은 “너무 강요하는 공부가 불만이다.”, “선생님들이 성적에 따라 학생들을 다루는 것이 심하다.”, “아름다운 청춘이 대학 입시에 얽매여 빛이 바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이야기한다.

강산은 몇 차례 변했건만, 입시 현실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명문대 진학이 계급의 상승 수단에서 계급의 세습 수단으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평생 사교육 시장에 몸담으며 예비고사, 본고사, 학력고사, 수능을 모두 경험한 손주은 메가스터디 회장은 대한민국의 교육에 위해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대입제도에 있어서 정책의 변화가 크면 클수록 사교육 시장은 커진다. 복잡하면 할수록 사교육 시장은 훨씬 커진다. 교육의 중심에 입시가 서 있다. 언젠가는 한국 교육이 입시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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