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까불이가 잡혔다. KBS 2TV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공효진)과 주변 인물들은 물론 시청자들까지 긴장하게 만들었던 까불이가 잡혔다. 무척이나 몰입해서 이 드라마에 빠져 있었던 나는 지난 두 달간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었다. 까불이가 잡히고, 동백이가 맘 편히 살게 되는 그 순간을.
 
그런데 막상 까불이가 잡힌 36회 방송분을 시청한 후 나는 오히려 마음이 답답해져왔다. 동백이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응원했던 나로서는, 동백이 까불이를 잡고 활짝 웃는 용식(강하늘)에게 "저 그냥 엄마 할래요. 여자 말고 그냥 엄마로 행복하고 싶어요"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동백꽃 필 무렵>은 드라마 초반, 비혼모 동백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편견을 내밀히 보여주어 호평을 받았었다. 나는 이 드라마가 동백이 '모성'에 대한 편견까지 극복하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로 진행될 것이라 기대했었다. 때문에 줄곧  모성애를 과다하게 강조해왔을 때도 '설마'하며 동백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기를 응원했었다. 이런 내게 동백의 선택은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다.
 
 KBS <동백꽃 필 무렵>은 동백과 용식의 로맨스로 포장되지만,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힘은 '모성'이다.

KBS <동백꽃 필 무렵>은 동백과 용식의 로맨스로 포장되지만,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힘은 '모성'이다. ⓒ KBS

 
 엄마, 엄마, 엄마

<동백꽃 필 무렵>은 동백과 용식의 로맨스를 중심축으로 삼지만, 드라마를 견인한 실질적인 힘은 '모성'이었다.

동백은 종렬(김지석)과의 사이에서 필구(김강훈)를 가진 후, 종렬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도 않은 채 홀로 필구를 키운다. 스스로 엄마가 되기로 결정한 동백은 드라마 중반까지는 무척 능동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까불이의 위협에도 자신의 일상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것은 물론, 주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용식과의 연애를 당당히 해낸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일상을 제한하려는 용식에게 "배달을 하든, 돈을 뜯기든, 까불이가 덤비든, 그거 다 제 인생이에요. 제 인생, 제 입장, 제 몫의 산전수전 그거 다 존중해주세요.(25회)"라고 말하는 그녀의 주체성에 나는 반했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동백은 전통적인 '모성'에 의해 움직인다.

동백의 엄마 정숙(이정은)과 용식의 엄마 덕순(고두심)은 무척이나 희생적인 엄마다. 동백을 고아원에 버렸다는 이유로 평생을 숨죽여 산 정숙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자 자신의 사망보험금을 주기 위해 동백을 찾는다. 딸을 버린 후 목숨 값으로 속죄하는 모성이라니 불편할 만큼 뭉클했다. 드라마 초반 주변의 손가락질을 받고 힘들어하는 동백을 돌보아 주었던 덕순의 모성은 용식과 동백의 사이가 깊어지자 아들만을 위하는 폐쇄적인 모성으로 돌변한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동백에게 모진 말을 하는 장면도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규태(오정세)의 엄마 은실(전국향)과 상미(제시카, 지이수)의 엄마 화자(황영희)는 성인이 된 자녀들의 일상을 밀착 마크한다. 은실은 의존적인 아들 규태의 결혼생활에 사사건건 관여하고 심지어 아들의 이혼법정에까지 함께 간다. 화자 역시 딸을 대신해 모든 것을 한다. "너는 가만 있어. 엄마가 알아서 할게"하며 딸의 인생을 자신이 책임지려 한다. 자신의 인생과 자녀의 인생을 구분 짓지 못할 만큼 자식에게 올인하는 엄마들이다.
  
 향미(손담비)는 엄마없이 살아온 자신의 삶을 비관한다.

향미(손담비)는 엄마없이 살아온 자신의 삶을 비관한다. ⓒ KBS

 
'엄마 때문에'라는 말에 무너지는 엄마들

이들 엄마들은 모두 지극한 모성으로 움직인다. 자기 자신의 삶보다 자식의 행복을 우선하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남에게 상처 주는 말도 마다하지 않으며, 자식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각오까지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렇게 전전긍긍 자식을 위하면서도 이들 엄마들은 '나 때문에'라고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엄마 때문에'라고 비난하는 소리를 듣는다.

동백은 35, 36회 필구가 자신을 닮아가는 것 같다며 끊임없이 자책한다. 그러다 '엄마의 혹'이라는 말을 들은 필구가 일부러 아빠를 선택했음을 알고서는 몸서리친다. 결정적으로 "엄마는 나를 두고 결혼하려 하냐"는 필구의 말에 용식과의 사랑을 끝내고 '엄마로 살기'로 다짐한다. '나 때문에' 필구가 힘들어 한다고 믿는 동백은 자기 자신의 삶의 반경을 스스로 제한하고 만다.
 
까불이의 희생양이 된 향미(손담비) 역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때마다 엄마를 떠올린다. 17회 향미가 정숙과 대화를 나누다 "엄마 없으면 인생 망나니라니까"라고 푸념하는 장면은 모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엄마를 비난하는 분명한 메시지였다.

규태는 아내 자영(염혜란)과 이혼 후 "엄마가 나를 이렇게 애처럼 키워서 그렇다"며 절규한다. 상미 역시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신세에 대해 "엄마가 맨날 다 알아서 하니까 내가 등신천치가 됐잖아(34회)"라고 엄마를 원망한다.

도대체 아빠들은 어디에 있나

그런데 정말 모든 것들이 엄마 탓일까? 동백이 고아원에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사실 엄마의 무정함이 아니라 '생활고'다. 정숙은 남편 없이 어린 동백을 양육했다. 싱글맘으로 주변의 편견어린 시선 속에 홀로 아이를 양육하는 일은 분명 생활고로 이어졌을 것이다. 즉, 동백을 고아원에 맡길 수밖에 없게 한 직접적인 원인은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 아빠이다. 그리고 아빠 없이 아이를 키운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회인 것이다.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짐작하건대 규태의 아버지는 바람을 피운 인물이다. 분명 가정에 소홀한 채 아버지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은실은 홀로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모든 정성을 아들에게 쏟아 부었을 것이다. 또한 남편과 나누지 못한 친밀함을 아들로부터 보상받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니 은실의 과잉모성 역시 남편, 즉 아버지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상미(제시카) 어머니도 비슷한 처지다. 35회 잠깐 등장한 상미의 아버지는 "상미가 다시 집에 오면 당신까지 쫓겨날 줄 알아. 당신이 애를 저 모양으로 키웠으니까 그렇지"라고 윽박지르는 폭군이다. "넌 아빠 무섭지 않아?" "아빠 알면 큰 일이야"라는 대사들에서 볼 수 있듯 상미의 어머니는 끊임없이 폭군 남편의 눈치를 보며 지내왔다. 그리고 이 폭군으로부터 딸을 보호하기 위해 딸의 인생에 더 깊이 관여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결국 상미의 철없음과 '관종'같은 삶은 엄마의 모성탓이 아니라, 폭군같은 아버지 때문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 속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엄마 때문에'만을 외친다. 그 누구도 아버지의 부재를 문제 삼거나, 자식을 내친 아버지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엄마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아이에게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게 만드는 세상을 문제 삼지도 않는다. 대신 필구를 위해 자신의 욕구를 포기한 동백, 사망 보험금을 주기 위해 동백을 찾은 정숙, 자기 자식을 위해 모진 소리도 마다 않는 덕순의 모성을 마땅하고 거룩한 것으로 찬양한다. 결국 이 드라마는 비혼모 동백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편견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다루면서 동시에 모성에 대한 편견은 강화시키는 모순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엄마의 혹'이라는 말을 들은 필구(김강훈)는 엄마를 위해 아빠와 살겠다고 한다.

'엄마의 혹'이라는 말을 들은 필구(김강훈)는 엄마를 위해 아빠와 살겠다고 한다. ⓒ KBS

  
36회 동백이 '엄마로서의 삶'을 선택한 이유가 정말 필구 때문인 걸까. 남편 없이 아이를 키우는 엄마도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음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사회 분위기였다면 어땠을까. 미혼모 엄마의 연애에 아이가 '혹'이 되지 않는 사회였다면, 필구가 엄마를 떠나려고 결심하는 일 자체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동백이 그토록 따뜻한 용식의 사랑을 거절하고 자신의 삶을 '엄마'로 제한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남은 방송분에서는 제발 이런 지점을 읽어내 주었으면 좋겠다. 드라마 속 인물들의 불행은 엄마 때문이 아니라, '엄마 탓'으로 몰고 가는 사회분위기에 있다고. 그 책임은 드라마 속 보이지 않는 아빠들도 함께 져야 한다고 말해줬음 좋겠다. 드라마 초반에 보여줬던 '열린 시선'으로 마무리가 되기를, 그래서 이 드라마가 올바른 인권감수성을 지닌 수작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에도 실립니다.
동백꽃필무렵 공효진 강하늘 모성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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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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