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강지혜.

배우 강지혜.ⓒ 서정준

 
만약 현실에 마리코(강지혜가 맡은 극 중 인물)가 있다면 바로 그가 아닐까?

지난 8일 대치동 KT&G 상상아트홀에서 연극 '왕복서간'에 출연 중인 배우 강지혜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오는 17일까지 공연되는 연극 '왕복서간'은 일본의 유명작가 미나토 가나에가 쓴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갑자기 남태평양의 오지 섬나라로 가버린 '준이치'와 그를 기다리는 연인 '마리코'가 15년동안 비밀로 부쳐뒀던 과거의 이야기를 편지로 풀어내는 서스펜스 드라마인 <왕복서간>의 이번 재연에는 김다현, 에녹, 김규종, 이정화, 강지혜, 송영미, 홍나현, 진태화, 황성훈, 조원석, 조훈, 이진우가 출연한다.

주인공 '마리코' 역으로 출연 중인 강지혜는 "요즘 쉬는 날이 아예 없다"며 근황을 전했다.

"요즘 정말 쉬는 날이 아예 없어요. '키다리 아저씨'랑 '왕복서간' 공연이 교차로 계속 있고, 낮에는 '2019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뮤지컬 '안테모사'를 연습하고 있어요. 12월에 공연이 올라가거든요."

강지혜는 사실 다작을 하는 스타일의 배우는 아니다. 앙상블이나 조연을 맡던 데뷔 초부터 '빨래'의 나영이, 재연·삼연·사연을 이어온 '키다리 아저씨'의 제루샤, '안나 카레니나'의 키티까지 대부분의 작품을 한 번에 하나씩 출연해왔다.

"갑자기 3개를 하게 돼서 정신이 없어요. 전 원래 한 작품 할 때 온전히 시간이나 정신을 투자하는 편이거든요. 작품에 더 매진하기 위해서 저 혼자 연습을 따로 잡기도 해요. 그런데 어쩌다보니 이번에는 스케줄이 이렇게 됐네요."

거의 데뷔 후 처음으로 경험하는 타이트한 스케줄 때문에 어렵진 않을까 궁금했다.

"정신은 없지만 그래도 시간 활용을 잘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키다리 아저씨'도 '왕복서간'도 대사량이 많잖아요. 지금도 공연 전날이나 시간을 따로 내서 처음부터 끝까지 연습을 다 해보거든요. (참여중인 작품)어느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애정을 쏟고 있어서 그러다보니 더 정신이 없는 거 같기도 해요(웃음)."

강지혜는 '빨래'와 '키다리 아저씨'를 거치며 관객들에게 '실력파 배우'로 입소문을 탔다. 그 비밀은 탄탄한 연습량에서 뒷받침됐음을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지금도 대본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일까.

"배우가 당연히 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하는 자신감도 필요하지만, 기준을 낮게 잡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배우로서 거기(높은 기준)에 닿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해요. 시간, 돈, 여러가지를 투자해서 오는 관객들에게 책임감을 갖고 해야한다는 생각때문에 연습량을 늘리는 것 같아요."
 
 배우 강지혜.

배우 강지혜.ⓒ 서정준

 
평소 생활에서도 대충이 없다는 강지혜. 하지만 '왕복서간'은 배우에겐 상당히 어려운 작품이다. 많은 인물이 무대에 오가지만, 마리코와 준이치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허공에 대고 하게 된다. 강지혜의 마리코가 바라보는 곳은 어디일까?

"마리코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 이해하고 듣고 싶어해요. 초점 자체가 준이치에게 맞춰진 사람이라서 저 역시 대사를 하며 준이치에게 집중하려고 하죠. '내가 이랬고 내가 저랬어' 이런 '내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런 이야기를 건네는 이유도 사실은 준이치가 더 마음을 열고 내게 말을 해줬으면 좋겠다. 그런 식의 (마리코가 가진)출발점이 있어요. 저는 공연 올라가기 전에 늘 기도하곤 하는데 '준이치를 무대에서 더 진짜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기도 해요. 저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강지혜에게 '왕복서간'은 첫 연극이다. 그에게도 이 점은 특별한 듯 보였다. 강지혜는 이야기하면서도 꼬박꼬박 '첫 연극이라서', '첫 작품이라서'라는 말을 보태곤 했다. 어느덧 종연을 앞둔 '왕복서간'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사실 첫 연극이라서 늘 긴장돼요. 우리가 가진 이야기를 온전히 대사만으로 전달해야 하는데 그게 잘 됐는지 늘 스스로를 의심하며(웃음) 계속 잘 전하려고 상기시키거든요. 매번 긴장되지만 매번 기대가 되고, 재밌게 했던 것 같아요. 노래 없이 연기만, 이야기만 하잖아요. 그런데서 오는 색다른 느낌도 있고요. 끝나는 게 좀 아쉽기도 해요. 첫 연극이어서 애정이 있는 것 같아요. 또 같이 하는 배우들도 너무 좋고, 상대의 눈을 보며 연기할 때 느끼는 감정이 뮤지컬과는 다르니까 그걸 느껴보는 좋은 기회였던 같아요. 한편으론 대사가 너무 많고(*기자 주: '왕복서간'은 마리코와 준이치 두 사람의 대사가 정말 많다. 러닝타임 100분 중 대부분을 채운다) 늘 긴장하며 했기 때문에, 긴장이 확 풀릴 것 같기도 해요(웃음)."

배우 강지혜가 최근에 연기한 인물들은 대체로 힘들지만 세상과 부딪치며 맞서거나('키다리 아저씨'의 제루샤, '빨래'의 나영) 반대로 묵묵히 속으로 삭이는('안나 카레니나'의 키티, '왕복서간'의 마리코) 인물들이다. 그중에서도 마리코는 강지혜가 기존에 무대 위에서 보여줬던 모습들과는 조금 다른 이미지를 지녔다. 외유내강형의 이미지를 지니면서 남성의 보호나 구애를 받은 것은 비슷하지만 마리코는 그 이상으로 준이치와 동등한 입장, 혹은 그를 감싸는 모습을 잃지 않는다. 한편으론 극의 특성상 조금은 알 수 없는 어려움도 남아있다.

그는 "제가 맡았던 배역들은 쉽게 흔들리거나 그렇지 않고 자기가 지키고자 하는 면을 노력하는, 내면이 강한 인물들이죠. 그 중에서 마리코는 속도가 조금 느린 편인 것 같아요"라며 마리코의 차이를 설명했다.

"제루샤나 나영이도 그렇고 예를 들면 궁금한 게 있다면 참지 않고 바로바로 물어보잖아요. 마리코는 준이치가 섬으로 떠난다고 했는데 문자나 전화가 아니라 편지로 하죠. 속도가 느린 거에요. 만약 제 성격이라면 준이치에게 어떻게든 물어봤을 거 같아요. 연습 초반엔 왜 이럴까 싶어서 좀 답답하기도 했어요. 일본인 친구가 있는 지인들에게 물어보기도 했죠."

강지혜가 내린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마리코의 느린 속도에 대한 해답을 또다시 준이치를 향한 마음에게서 찾아냈다.

"제가 연기하면서도 느낀 건 결국 마리코는 (느린 속도가)상대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만큼 더 상대를 이해하고, 알아보려고 애쓰는 면이 있는 게 좀 다른 점 같아요. 좀 더 성숙하기도 하고요. '당신이 정말 내가 약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기대줬으면 좋겠다'고도 하잖아요. 그렇게 더 단단한 면도 있고요. 또다른 대사에서도 '그때 이후로 소리내서 웃은 적은 한번도 없었어'라고 하잖아요. 준이치에게 무언가 있다는 점을 15년간 느꼈을 거에요. 그런데 그걸 파헤치려고 한 게 아니라 기다려왔으니까요. 속도는 느리지만 마음은 단단한 인물이에요."
 
 배우 강지혜.

배우 강지혜.ⓒ 서정준

 
'왕복서간' 재연은 윤상원 연출이 맡았다. 윤상원 연출은 '라흐마니노프' 조연출을 비롯해 '더 픽션', '러브 쏭 쓰루', '정백광전' 등 다양한 작품에 참여한 젊은 창작자다. 그가 맡은 '왕복서간'은 이기쁨 연출이 만든 탄탄한 초연을 따라가는 듯하면서도 조금 다른 느낌을 전해줬다.

이에 대해 강지혜는 "연극 자체가 처음이라서 색달랐어요. 또 연출님의 스타일이 (배우들에게)열려있는 분이어서 감사했어요. 우리의 가장 큰 틀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 안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던 게 앞으로의 제 연기에 대해서도 많이 도움될 것 같아요. 연습과정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며 인물이 움직이는 과정이나 디테일, 이유를 찾을 수 있었거든요"라며 새로운 장르, 새로운 스타일의 인물과 작업한 즐거움을 전했다.

"무대 가운데 스툴(등받이와 팔걸이가 없는 작은 의자)이 두 개 있어요. 연습하며 그 위에 서보기도 하고, 장애물인 척 넘어가보기도 했죠. 그게 진짜 극에 반영된건 아니지만 그걸 장애물처럼 생각하면서 넘어가보니까 (스툴 너머의)상대 마음을 더 느끼거나 하는 부분들이 찾아져서 재밌었어요. 극에선 좀 이상할 수도 있지만 연습하며 아무거나 시도해볼 수 있으니까요(웃음)."

연극 '왕복서간'은 마리코와 준이치가 서로 주고받는 편지를 통해 둘의 사랑 이면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쳐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재연에선 서스펜스적인 면모보다는 두 사람의 로맨스에 좀 더 집중된 느낌을 받았는데 강지혜 역시 이를 두고 '우리가 집중하려 한 건 두 사람의 사랑'이라고 대답했다.

"배우들끼리 대본도 읽어보고 이야기를 나눠가며 느낀 건 '왕복서간'에는 비밀을 파헤쳐가는 면도 있지만, 저희가 집중하려고 했던 건 단단한 사랑, 서로를 바라보는 사랑이었어요. 거짓말도 상대를 위해서 이야기하고 내가 가진 비밀도 결국 상대를 위해서 이야기하게 되죠. 연출님과 저희가 같이 이야기했던 의도도 서스펜스적인 면을 드러낸다기보다 둘의 사랑에 초점을 더 맞췄어요. 만약 비밀을 파헤쳐가는 과정에 집중했다면 오히려 마리코와 준이치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배우 강지혜.

배우 강지혜.ⓒ 서정준

 
강지혜는 연이어 관객들의 주목을 받는 역할을 꿰차며 몇 년사이 큰 존재감을 가지게 됐다. 한편으론 이제 본격적인 30대를 눈 앞에 두고 있기도 하다. 신인 배우에서 조금씩 경력을 쌓아온 그가 '30대의 배우 생활'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변하고 싶은 방향성이 생겼어요. 연습을 철저히 하고 가져가는 그런 면도 무대를 책임져야 하는 배우로서 가져가고요. 또 (전)미도 언니를 좋아하기도 하고 여러 좋은 선배 배우들을 무대에서 볼 때처럼 저도 좀 더 자연스러워지고 싶어요. 저는 머물러 있거나 어디에 매여있고 싶진 않아요. 무대에서 좀 더 자유로움을 갖고 싶어요."

마리코를 통해 성숙한 여성의 이미지를 갖춘 강지혜의 새로운 도전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냐고 물었다.

"'연기변신을 하고 싶어!' 그런 느낌보다는(웃음) 모두 다 살아가는 게 힘들잖아요. 그런데 관객들께서 공연보시는 만큼은 좀 휴식을 얻고 저희가 표현하고자 하는 사랑이나 따듯함을 느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런 공연을 할 수 있는 건강한 통로가 되고 싶지. 내가 이런 역을 할 거야 저런 걸 할 거야. 그런 생각은 사실 갖고 있지 않아요. 맡겨주시는 역에 최선을 다하고 그 안에서 더 전달할 수 있는 걸 전달하고 싶어요. 배우는 '나'를 드러내기보단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인물로서 관객에게 주고 싶은 걸 전달해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면에 더 초점을 맞추고 싶어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서정준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twoasone/)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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