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영화계 진보와 보수의 비율을 9:1이라고 한다. 그만큼 영화계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보수정권 시절 '블랙리스트'에 영화인 대다수가 이름을 올릴 정도로, 저항은 거셌다. 다른 문화예술계는 영화계의 단결력에 부러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물론 처음부터 한국영화가 이런 흐름을 보였던 건 아니었다. 젊은 시절 검열과 표현의 자유 제한에 문제 의식을 느끼고 저항해 온 영화인들의 노력이 수십 년 동안 쌓인 결과다. 이들이 한국영화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바로 '영화운동'이었다. '기획-한국영화운동 40년'에선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영화운동에 매진한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본다.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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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카이두 클럽 회원들. 왼쪽 위가 한옥희 아래가 김점선

1970년대 카이두 클럽 회원들. 왼쪽 위가 한옥희 아래가 김점선 ⓒ 한옥희

 
새로운 영화에 대한 갈망이 일어나던 1970년대에 특히 주목할 만한 활동은 '카이두 실험영화클럽(아래 카이두 클럽)'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여성들이 주체가 돼 활동했다는 것도 특이한데, 전위적이면서 실험적인 영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러 활동을 통해 시대를 앞서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생겨난 다른 영화 모임들이 주로 영화이론과 영화에 대한 시각을 넓히려는 등 기존 틀을 벗어난 다양성이 목적이었다면, 카이두 클럽은 그 방향이 달랐다. 인식의 확장이 아닌 시대적 상황에 대한 '저항'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물론 박정희 군사독재에 드러내 놓고 저항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신 행위예술을 저항의 도구로 선택했다는 점은 특별하다.
 
억눌린 사회 분위기, 장발·미니스커트 단속에 반감
 
당시 모임을 주도했던 한옥희 평론가는 카이두 클럽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카이두는 남성을 능가하는 몽골의 전설적인 인물의 이름을 따 와서 만든, 여성주의를 바탕으로 한 전위적인 영화 모임이었다.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억눌린 사회 분위기,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 등 개인의 자유를 짓밟는 과잉 단속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고, 작품 활동을 통해 사회변혁에 대한 의식을 담으려고 했다."
 

한옥희 평론가는 자신의 20대에 대해 "70년대에는 가부장적인 가치관과 여성의 사회 진출이 지극히 제한적인 사회 풍토가 형성돼 있었고, 여성은 '직장의 꽃'처럼 부수적인 존재였다. 당시 충무로영화계는 호스테스 영화의 전성시대였다"며 "젊음의 열정과 새로움이 넘치는 시절, 그 당시 나의 눈에 서른 살 이상의 기성인들은 속물들로 보였다"라고 말했다. 이어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미학에 관한 논문들을 썼지만, 나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은 사방을 둘러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라고 덧붙였다.
 
카이두 클럽은 1971년 이황림, 김현주, 박상천 등이 중심이 돼 결성한 서강대학교 '영상연구회'에서 활동하던 이화여대 학생 한옥희가 이듬해 따로 준비한 모임이다. 20대 한옥희는 당시 이화여대 입구에 있는 파리다방에 차를 마시러 들어갔다가 서강대학교 '영상연구회'의 발표회를 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전위영화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는 다음 날부터 이들과 어울려 영화를 찍으러 다녔다. 1972년 그가 이화여대생들과 실험영화 제작을 논의하고 이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 카이두 클럽의 출발점이 됐다.
 
 해외에서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한옥희(왼쪽)

해외에서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한옥희(왼쪽) ⓒ 한옥희

  
한옥희 평론가는 "당시 영상연구회가 영화만 공부하는 집단이었다면 카이두 클럽은 영화를 통해 세상에 맞서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며 "저항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라고 기존 영화 모임과의 차이를 강조했다.
 
카이두 클럽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파격적인 실험을 연속적으로 벌이면서 주목을 받았다. 구성원은 한옥희를 비롯해 김점선, 이정희, 한순애, 정묘숙, 왕규애 등 모두 이화여대생들이었다.
 
독립영화, 예술영화, 여성주의 영화
 
한옥희 평론가는 2015년 <선데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카이두 클럽에 대해 "회원들 각자의 개성이 천차만별이라서 작품의 스타일이나 색채는 모두 달랐지만 카이두 클럽이라는 집단이 공동으로 추구한 이념에는 독립영화와 예술영화, 여성주의적 영화라는 커다란 공통분모가 존재했다"라며 "기성체제에 대한 도전정신과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실험정신이 바탕이 되었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이념들과 회원들이 추구하는 강렬한 여성상 등의 이미지들이 공동작품 속에 담겼다. 실크로드를 찾아다니며 카이두의 전설을 반드시 밝혀내서 세상에 널리 알리자는 목표도 세웠다. 급진적인 여성운동의 성격이 담긴 영화를 추구했고 1974년엔 자체 영화제인 실험영화페스티벌도 개최했기에 이들의 퍼포먼스나 촬영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신문과 잡지들은 카이두 클럽을 흥미롭게 조명했다. <주간여성>은 세계 최초의 여성실험영화클럽인 카이두는 '여배우는 옷을 입고 여감독은 옷을 벗는 등 기존 관념의 파괴가 목표'라며, "7명의 여성만으로 이뤄진 이 전위영화인들은 필름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고난도 불사한다"고 전했다.
 
 '카이두 클럽'의 활동을 전하고 있는 주간지 기사

'카이두 클럽'의 활동을 전하고 있는 주간지 기사 ⓒ 주간여성

 
카이두는 회원 각자가 제작, 극본, 감독, 배우를 모두 겸해 작품을 만드는 시스템이었다. 가끔 카메라를 함께 들었고, 서로 연기자와 스태프가 되기도 했다. 당시 카이두의 대표였던 한옥희는 "한국 영화계를 향한 카이두의 혁명적인 도전은 프랑스의 누벨바그, 미국의 아메리칸 뉴시네마 운동과 의의가 같다"고 밝혔다. 외형적으로는 서구의 영화운동과 궤를 같이 한다고 밝힌 것이다.
 
카이두 회원들이 밝힌 활동 기조를 보면 전위적인 실험영화를 추구하던 그들의 지향점이 잘 드러난다. 상업영화가 남성만의 독점물이며 돈벌이 위주의 속물이기 때문에 반기를 든다는 것이 카이두의 인식이었다.
 
"정복되지 않는 여성이라야 예술 할 능력이 있다."
"추구(追求)에 과격하고 인습의 파괴에 용감함은 카이두의 생명"
"카이두의 영화인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트라이포드를 쓰지 않는다. 카메라가 고정되기 때문이다. 무겁지만 손에 들고 찍는다. 세트 촬영도 하지 않는다. 야외로 나가서 콘티없는 즉흥 촬영을 한다."
"기성 영화인들처럼 필름으로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라 필름을 제작하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다."

 
행위예술 시도하다 강제해산되고 연행
 
실험영화 <굿거리>는 이들의 전위적인 활동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다. 이들은 1975년 2월 서울 명동과 청량리역 앞에서 굿판을 벌이는 굿거리 행위예술을 시도했는데,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명동에서의 리허설 때 한옥희는 도로교통법위반으로 경찰에 연행됐고, 모여든 군중은 강제 해산됐다. 이들의 행위를 보고 누군가가 '계룡산에서 온 유사종교집단이 명동에 진출했다'고 신고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들은 객사한 영혼들을 위한 위령제를 목적으로 거리굿을 벌인 것이었다. 무당 역을 맡았던 배우가 구성지게 읊은 굿거리장단에는 그들이 위로하고자 했던 대상이 묘사돼 있었다. 굿이 다 끝난 후 한옥희와 이정희는 또 다시 도로교통법위반으로 경찰에 연행됐다.
 
"...젊은 처녀가 강간 끝에 애를 배고 목을 맷소 / 날이 새고 달이 차니 / 허리에 동여맨 헝겊이 한 필이나 두필이냐 / 늑대의 밥이 되고 이리에 할퀴었으니 깨끗하고 곱던 몸이 / 만신창이 되었구나 / 애고애고 서럽도다 얼씨구..."
 
전위적인 활동을 벌이다보니 해프닝도 여러 번 있었다. 당시 영화사들이 모여있던 충무로 인근에 중앙정보부가 있었는데, 남산에서 촬영을 할 때는 '수상한 여자들이 영화 찍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가 청량리정신병원에 끌려갈 뻔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 하길종 감독과 유현목 감독, 변인식 평론가 등 영화인들의 지원과 관심 덕분이었다. 1968년 유현목, 변인식 등은 전위영화 모임 '씨네포엠'을 만들어 <선> <손> 등의 작품을 발표했으나, 모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몇 년이 흐른 뒤 한옥희 등 카이두 클럽의 젊은 여성들이 실험영화에 뛰어들자 이들은 적극적인 관심과 함께 후원자 역할을 자임했다. 당시 유현목 감독은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 영화제나 시라즈 영화제를 주시하고 있지만 카이두의 작품은 이런 영화제에 내놓아도 당당한 작품이 될 것"이라며 카이두 클럽의 미래가 밝을 거라 예상했다.
 
기성 영화계에 자극제
 
 1974년 카이두 클럽 한옥희 연출 단편실혐영화 <구멍>의 한 장면

1974년 카이두 클럽 한옥희 연출 단편실혐영화 <구멍>의 한 장면 ⓒ 한옥희

     
당시 카이두 클럽이 만든 작품 <구멍>은 실험성을 바탕으로 사회 현실을 상징적으로 묘사했다. 영화는 작은 구멍 속에서 나온 사람이 세상을 떠도는 모습을 담았는데 사형수, 단두대 이미지 등 사회적으로 속박을 상징하는 장면을 넣었다. 

40년 전에 만들어진 실험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상을 은유적 기법으로 묘사했기에 요즘 봐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그 외의 작품들도 "의도적으로 대사와 음향효과를 배제하면서 한 여인이 갖는 욕구의 세계를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등의 실험"(여성영화인사전)을 담고 있다.
 
변인식 평론가는 이들의 작품에 대해 "한결같이 순수예술영화를 지향하면서 영화를 위한, 영화에 의한, 영화의 카이두임을, 카랑카랑한 사운드와 휘둘러치는 시각의 회전을 통해 보여주었다"며 "움직이는 영화의 동정을 지키면서 비영화적인 것을 파괴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러나 전체적인 포토제닉한 영화의 혼과 표현하고자 하는 오브제를 좀 더 다부지게 물고 늘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며 "이런 시도는 썩은 늪 속을 꿰뚫는 신선한 바람과 햇살처럼 기성 영화계에 하나의 자극제가 됐을 법하다"고 덧붙였다.
 
카이두 클럽은 1974년 자체 영화제인 '실험영화 페스티벌'을 시작해 2회 정도 개최했다. 72년부터 모이기 시작했지만, 1974년 각자가 작업한 작품들이 완성된 후 공식적으로 모임을 발족한 것이다.
 
한옥희는 16mm 실험영화 <구멍> <밧줄>, <중복>(1974년), <세 개의 거울>, <2분 40초>(1975년) , <색동>의 작품을 제작했고, 김점선은 < 74-A > < 75-13 >, 이정희는 < XXOX > <그러나 우리는 다시 출발해야 한다> 등을 남겼고, 회원들이 공동제작한 <몰살(沒殺)의 노래> <엘레베이터> 등의 작품을 남겼다. 카이두 클럽은 76년 이후 핵심 회원들의 유학 등으로 인해 자연스레 해체됐다.
 
카이두 클럽의 핵심이었던 한옥희는 1980년 광주항쟁이 일어나기 전 독일로 유학해 영화를 공부했고, 귀국 후에는 1991년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등 영상시집과 < 5000년의 신비 >, 1993년 대전 엑스포 정부관 영상물 <달리는 한국인>(70mm) 등 다수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이후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여성 주체의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활동이 상징적
 
 1974년 카이두 클럽이 작품을 발표하며 본격 활동을 알린 '실험영화 페스티벌'

1974년 카이두 클럽이 작품을 발표하며 본격 활동을 알린 '실험영화 페스티벌' ⓒ 한옥희

 
카이두 클럽은 한국영화운동이 본격화되기 전인 1970년대 유의미한 발자국을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엄혹했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이 중심인 모임이 한국영화운동의 바탕에서 선구자적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강성률 평론가는 "카이두 클럽은 1970년대라는 시대에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활동을 했었고, 무엇보다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활동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여성 영화인이 중심이 된 활동은 카이두 클럽 이후로 더 이어지지 않다가, 1980년대 후반 여성창작집단 '바리터'가 생겨나면서 맥을 이어간다. 물론 전위적 실험영화를 추구한 '카이두 클럽'과 독립영화가 중심이었던 '바리터'는 활동의 범위나 양상이 달랐다. 그러나 카이두 클럽은 한국 영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저항의식을 내면에 두고 사회변혁을 위해 전위적 행위예술을 펼쳤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작지 않다.
 
하지만 이를 다르게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평론계의 원로인 김종원 평론가는 "당시 영화를 공부하던 일종의 아마추어들의 모임으로 볼 수 있지, 한국영화 중심에서 진행된 새로운 영화 운동에선 벗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조직위원장인 변재란 교수는 "사회변혁의 시각들이 존재했고, 특별했던 것은 맞다"고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영화운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 있고 70년대라는 맥락과도 관련지어봐야 한다"며 "새로운 실험적인 면에서 중점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김형석 평론가는 "카이두 이전에 1969년 시작된 이익태 선생의 '필름70'이 있었고, 서강대학교의 영상연구회가 있었는데 카이두 클럽은 이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며 "한국의 독립영화를 이야기할 때 이 시기의 계보도가 가장 취약한데, 다들 인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조직이고 고문격으로 유현목 감독님이 계셨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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