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금토드라마 <나의 나라>의 한 장면

JTBC 금토드라마 <나의 나라>의 한 장면 ⓒ JTBC

 
앙꼬 없는 진빵, 팥소 없는 찐빵이란 말이 있다. 그렇다면, '정도전 없는 이성계'란 말도 있을 수 있었을까? JTBC 금토 드라마 <나의 나라>가 그런 이성계를 보여주고 있다. 정말 정도전 없는 이성계가 이 드라마에 나오고 있다.
 
<나의 나라>에는 이성계의 핵심 참모인 남전(안내상 분)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남전은 드라마 속의 이성계(김영철 분)를 왕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이성계의 핵심 참모라는 점만 놓고 보면, 남전이 정도전에 대응하는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8일 금요일로 11회를 넘긴 이 드라마에 묘사된 남전은 실제의 정도전과 너무나 판이한 인물이다.
 
남전의 말이나 행보에서는 혁명가 풍모가 드러나지 않는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웅대한 설계 같은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중국의 쑨원(손문)이나 쿠바의 체 게바라 같은 혁명가들한테서 흔히 표출되는 특징들이 그에게는 없다. 그저 야심찬 권력 지향형 정치인일 뿐이다.
 
정치 9단이니 10단이니 하는 말이 있다. 그 정도로 정치를 너무 잘하는 사람은 결코 혁명가가 될 수 없다. 기성 정치의 논리나 가치관, 이해관계에 깊이 매몰된 탓에 그런 유형이 혁명가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 혁명가들은 기성 정치권에 잘 맞지 않는 인물들이다.
 
<나의 나라> 속의 남전은 기성 정치권에 너무나 잘 맞는 인물이다. 그래서 <나의 나라>는 정도전이 없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속의 이성계는 '정도전 없는 이성계'인 셈이다.
 
혁명가인가 참모인가
 
 충북 단양군의 도담삼봉에서 찍은 정도전 동상.

충북 단양군의 도담삼봉에서 찍은 정도전 동상. ⓒ 김종성

 
 
<태조실록>에 수록된 '정도전 졸기'에 따르면, 정도전은 조선 건국 즈음의 술자리 때마다 "한나라 고조 유방이 장량을 쓴 게 아니라, 장량이 한나라 고조를 쓴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한고조 유방이 책사 장량을 이용해 나라를 세운 게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이용해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이성계가 자신을 기용한 게 아니라 자신이 이성계를 기용했다는 뉘앙스를 풍겼던 것이다.
 
정도전이 공공연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성계가 이 말을 들어도 무방할 정도로 자신이 이성계에게 꼭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팥소 없는 찐빵'처럼 '정도전 없는 이성계'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게 누가 봐도 명백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정도전이 없었더라도 이성계는 역사에 기록되고도 남을 만했다. 최영 장군과 쌍벽을 이루며 말년의 고려왕조를 수호하는 명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도전 같은 혁명가형 참모가 없었다면, 이성계는 최영 같은 명장으로는 기록될 수 있어도 일국의 건국 시조로는 기록되기 힘들었을 수 있다. 1388년 쿠데타인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잡은 이성계가 1392년 조선 건국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혁명가 마인드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혁명가 마인드가 없었다면, 이성계는 고려왕실을 능가하는 실권자 정도로 기억됐을 가능성이 높다.
 
지도자나 지도부가 혁명의 마음을 품는다고 해서 혁명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세상도 함께 그 마음을 품어야 한다. 1388~1392년 기간에, 세상이 혁명의 마음을 품도록 유도하는 중대한 사건이 있었다. 세상의 마음을 설레게 해서 그쪽으로 기울게 만든 일이었다.
 
1391년, 이성계 그룹이 역사적인 개혁 조치를 내놓았다. 토지제도를 바꾸는 전제개혁이었다. 과전법이라 불리는 이 개혁은 크게 두 부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우선, 농민층의 심장에 불을 질렀다. 수확량의 50% 가까이를 지주에게 빼앗기는 일이 많았던 그들에게, 수확량의 최고 10%만 내면 되도록 하겠다고 이성계 그룹은 약속했다. 그러면서 기존 토지대장을 소각해버렸다.
 
<고려사> 축약판인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개경 시내의 시장 거리에서 그런 소각이 벌어졌다. 요즘으로 치면, 서울 명동시장에서 모든 토지대장·건물대장을 불태우는 일이었다. 이런 장면이 농민들의 마음을 얼마나 크게 흔들어놓았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둘째로, 관료층 상당수의 마음을 흔들어놨다. 당시 관료들 중에는 국가로부터 지급받아야 할 토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특권층이 토지를 과도하게 보유하다 보니, 국가가 관료들에게 나눠줄 토지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법에 정해진 것의 10분의 1도 받지 못하는 재상들이 있었을 정도다.
 
공약의 실천

이성계 그룹은 품계를 기준으로 토지를 새로 분배하겠다고 약속했다. 품계에 맞는 토지를 받지 못한 관료층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도 남을 만한 공약이었다.
 
이 같은 혁명적인 공약은 혁명가가 아니고서는 내놓을 수 없었다. 일반 정치인이 내놓을 수 있는 공약이 아니었다. 오늘날 표를 의식하는 정치인들이 자기 능력 밖의 공약을 발표하는 일은 많지만, 경제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공약은 감히 내놓지 못한다. 그럴 만한 의지나 능력, 배짱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성계 그룹이 대담한 공약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조준이라는 토지 전문가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혁명가 정도전이 이 그룹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마음을 뒤흔든 혁명가 정도전으로 인해 이성계 그룹은 백성들의 마음을 고려왕조에서 떼어놓을 수 있었다. '정도전 없는 이성계'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정도전 없는 이성계'가 할 수 없었던 게 또 하나 있다. 바로, 혁명을 혁명 같지 않게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왕조시대 사람들한테는 왕실의 성이 바뀌는 것, 즉 역성(易姓)이 곧 혁명이었다. '군주는 하늘의 명을 받아 통치한다'는 천명(天命) 사상이 지배했던 그 시절에는, 왕실의 성이 A에서 B로 바뀌는 것은 천명이 A에서 B로 이동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하늘의 뜻이 옮겨가는 사건이니 그들에게는 역성이 곧 혁명일 수밖에 없었다.
 
1392년, 왕실의 성이 왕씨에서 이씨로 바뀌었다. 이 사건은 그 시대 관념으로는 혁명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분명히 혁명인데, 과정은 그렇지 않았다.
 
이성계는 고려 조정의 법적 절차에 따라 임금 자리에 올랐다. 공민왕의 부인인 대비 안정비(정비 안씨)가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의 등극을 승인됐다. 고려 대비의 승인으로 왕이 됐으니, 형식적으로는 고려 임금이나 다를 바 없었다.
 
거기다가 이성계는 처음 7개월간은 '고려 주상' 타이틀을 썼다. 임금 자리에 오른 태조 1년 7월 17일(양력 1392년 8월 3일)부터 이듬해인 태조 2년 2월 15일(1393년 3월 27일)까지는 조선이 아닌 고려가 국호였다. 이성계가 '조선 주상'이 된 것은 1393년 3월 27일이다.
 
이처럼 이성계는 역성혁명으로 왕이 됐으면서도, 기존 왕실의 승인을 받고 기존 왕실의 국호를 한동안 사용했다. 혁명을 혁명 같지 않게 이뤘던 것이다.
 
이 같은 절충적이고 타협적인 방식은 불만세력의 저항을 최소화시키고 대중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 방식이 항상 옳다고는 볼 수 없지만, 토지개혁에 불만을 가진 세력과 고려왕조에 애착을 가진 세력이 받을 충격을 최소화시키는 데 도움이 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많은 귀족들이 여전히 사병 부대를 갖고 있었으니, 반혁명 세력의 무력 저항을 막는 방편이기도 했다.
 
이처럼 혁명을 혁명답지 않게 수행하는 것도 혁명가 마인드를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혁명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일반 정치인이 '혁명을 혁명답지 않게 해내는 기술'을 발휘하기는 힘들다. 혁명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야 그런 묘기도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에는 '정도전 있는 이성계'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정도전 없는 이성계는 그런 고난도 작업을 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신왕조 창업 자체도 해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의 나라> 속의 이성계는 정도전 없이도 그런 일들을 잘해내지만, 이는 실제와는 거리가 먼 장면이다.
나의 나라 정도전 이성계 역성혁명 조선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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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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