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베트남 축구 대표팀 감독이 7일 오전(현지시간) 베트남 축구협회에서 베트남 축구 대표팀 재계약에 서명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9.11.7

박항서 베트남 축구 대표팀 감독이 7일 오전(현지시간) 베트남 축구협회에서 베트남 축구 대표팀 재계약에 서명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9.11.7 ⓒ 연합뉴스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축구 대표팀을 최대 3년간 더 이끌기로 했다. 베트남 축구협회(VFF)는 7일(한국시간) 기자회견을 열고 박항서 감독과의 2+1년 재계약을 발표했다.

현재 약 24만 달러(약 2억8천만 원)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박감독은 이번 계약을 통해 역대 베트남 감독 가운데 최고 대우를 받게 될 예정이다. 또한 박 감독은 지금과 같이 베트남 성인 축구대표팀(A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U-23) 감독을 겸임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박 감독은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으며 베트남과 함께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소감을 밝혔다.

박항서 감독은 지난 2017년 10월 베트남 축구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다. 사실 박감독이 처음 부임할 때만 해도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이전까지 해외무대에서 활동한 경험이 전혀 없었던 데다 국내 무대에서도 박감독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베트남의 지휘봉을 잡기 직전까지 국내에서의 마지막 직책은 K리그 내셔널리그 창원시청의 감독이었다. 베트남 현지에서도 "고작 한국 3부 리그 수준의 감독을 데려왔다"며 냉소적인 여론이 나왔을 정도였다. 베트남 축구의 수준이 높지 않은 데다 박감독 이전에 이미 여러 명의 지도자들이 교체되는 '감독들의 무덤'이라는 인식이 워낙 강했다.

하지만 지난 2년간 모두가 알다시피 베트남 축구는 박 감독의 지휘 아래 새로운 역사를 썼다.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준우승을 시작으로 같은 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4강 진출, 10년 만의 아세안 축구연맹(AFF) 스즈키컵 우승이라는 업적을 이룩했다. 2019년에는 아시안컵에서 12년 만에 8강에 진출했으며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에서 지난 9월 태국과 비긴 뒤 지난달 10일과 15일 각각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를 꺾으며 순항하고 있다. 심지어 성인대표팀과 23세 이하 대표팀을 겸임하는 '투잡 감독'으로서 이룬 성과이기도 하다.

박항서 감독이 불러온 '축구 한류'는 베트남 사회를 열광시켰다. 박감독은 일약 축구를 넘어서 베트남의 '국민 영웅'이 됐다. 모국인 한국에서도 덩달아 박항서 감독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박감독이 미친 영향으로 역사적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던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 개선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백 명의 외교 전문가도 해낼 수 없는 업적을 이뤄낸 '민간 외교관'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박항서 감독의 신드롬에 더욱 주목하는 이유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박항서 감독은 5060 세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묵묵히 성실한 외길 인생을 걸어온 5060 세대는 어느덧 세월이 흘러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할 위치에 있다.

박감독의 축구 인생은 선수로서나 지도자로서 완전한 무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연의 삶과도 거리가 있었다. 2002 한일월드컵 당시 히딩크호의 코치이자 부산 아시안게임 사령탑으로 팬들에게 잠깐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이후로는 박 감독은 경남 FC, 전남 드래곤즈, 상주 상무, 창원 시청 등 주로 국내 리그 중하위권팀들의 감독직을 전전하며 크게 주목받을 기회가 없었다.

최근 K리그에 스타플레이어 출신의 젊고 신선한 인물을 감독으로 선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박감독과 같은 5060세대 지도자들은 자연스럽게 현장에서 밀려나게 됐다. 

박 감독은 그러나 지도자 인생의 황혼기에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에 평생을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지켜온 경험과 지식을 모두 쏟아부어 도전정신을 발휘했다. 그리고 모두가 찬사를 보내는 국민적 영웅으로의 '인생 역전'에 성공했다. 열정 만큼은 식지 않은 5060 세대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로망'이다. 박항서 감독의 성공은 5060 세대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증명했다.

물론 기회가 주어진다고 모두가 박감독처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박항서 축구가 베트남에서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가 '준비된 지도자'였기에 가능했다. 사실 박감독이 베트남에서 보여준 축구 철학이나 전술은 사실 크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박감독은 K리그 시절부터 전력이 떨어지거나 선수수급에 한계가 있는 K리그 지방 구단들의 지휘봉을 잡더라도, 항상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끌어내는 성과를 보여줬다.

특히 박감독의 연륜이 빛나는 대목은 선수들의 심리를 휘어잡는 능력에서 나온다. 외국인 감독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박감독이 베트남 선수들과 적극적인 스킨십으로 소통한 에피소드들은 유명하다.

박감독은 외모에서부터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먼 구수하고 서민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모습 뒤로 홍명보, 황선홍, 안정환, 최용수 등 당대의 내로라 하는 스타 출신 축구인들조차 하나같이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게 만드는 위엄도 가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박항서 감독의 재계약을 두고 '박수칠 때 떠나야 한다'는 식의 반응도 있었다. 이미 베트남 축구를 통해 최상의 성과를 이루고 기대치가 높아진 상황에서 재계약 이후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그간 공들여 쌓은 명성에 흠집을 남길 수 있다는 우려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에서 계속 도전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박항서 감독에게 베트남은 쇠락해가던 축구인생 말년에 잃어버린 열정과 인생의 전성기를 되찾아준 기회의 땅이다. 앞으로의 인생은 또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박감독이 베트남에서 이미 이뤄낸 업적들이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어쩌면 한국축구 내에서 재능과 경험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조용히 묻혀진 제2, 제3의 박항서가 있을지도 모른다. 비단 축구계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 사회는 새로움, 신선함, 젊음에 대한 갈증이 크지만, 한편으로 연륜과 경험의 가치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측면도 있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고, 혹은 예전에 실패했던 인물이라고 해서 가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베트남이 무명에 가까웠던 박항서의 잠재력에 투자하여 엄청난 대박을 이뤄냈듯이, 우리 사회도 또다른 박항서를 발굴해내기 위한 노력과 고민이 필요하다. 박항서처럼 얼마나 깨어있고 준비되어 있는지가 중요할 뿐, 5060은 새로운 도전과 열정을 펼치기에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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