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포스터

영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포스터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MBC <주말의 명화>를 아는가? 알고 있다면 당신은 요즘말로 '옛날 사람'이다. 그리고 나 또한 '옛날 사람'이다.
 
인터넷 클릭 한번으로 영화를 예매하고, 상영시간에 맞춰 지정된 좌석에 앉아 영화를 보는 것이 당연해진 요즘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아날로그 방식만이 존재하던 시절, 때는 바야흐로 1990년대이다. 극장에서 인기영화를 보려면 단관극장에 직접 가서, 쭉 늘어선 줄을 기다려 영화표를 사야 했다. 표를 두 손에 꼭 쥔 채 현장예매를 마치고, 주변에서 어슬렁어슬렁 시간을 때우다 상영시간에 맞춰 다시 극장으로 돌아가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관에서 관람을 놓친 영화는 비디오테이프로 출시되길 기다렸다. 비디오대여점에서 VHS테이프로 빌려야만 영화를 볼 수 있던, 3분 만에 영화를 다운받아 보는 지금과는 너무도 다른,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던 시절이었다.
 
영화를 보는 게 쉽지만은 않았기에 더 소중했던 <주말의 명화>. 어느덧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가 되었지만, 당시 영화를 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토요일 10시에 TV에서 틀어주는 주말의 명화를 보는 것이었다. 토요일이면 으레 신문에 있는 TV 편성표를 끌어 앉고 오늘 보아야할 프로그램들에 동그라미를 쳐놓았는데, 특별히 주말의 명화는 볼펜으로 박박 긁어가며 그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켜 놓곤 했다. 한국 성우들의 더빙이 덧입혀진 주말의 명화는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던 낭만이었다.
 
나에겐 아직도 기억나는 그날이 있다. 한창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고 있던 초딩 6학년(당시는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그날도 방바닥에 배를 깔고 주말의 명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의 방구석 상영작은 '터미네이터'. 출연배우들이 누군지도 모른 채,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 덩치 큰 남자와 뽀글이 노랑머리가 인상적인 여자가 나오는 그 영화를 보고 내 꿈은 결정되었다.
 
내 꿈은 '사라 코너'였다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스틸컷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사라 코너, 극 중 여자주인공의 이름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기는 하지만 당시 난 몹시 진지했다. 내가 미래의 사라 코너가 되겠다며 나의 인생을 다시 설계했다. 그리고는 아마 일주일간 영화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거 같다. 너무 충격적일 만큼 재미있어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영화, 13년의 인생 동안 이런 걸 모르고 살았다니 억울하다며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든 영화. 나의 인생작 <터미네이터>와는 그렇게 만났다.
 
영화는 비디오로 빌려보는 게 제맛이라며, 비디오가게에서 목을 빼고 기다리다 드디어 손에 넣었던 터미네이터2. 덩치 큰 아저씨 터미네이터 역에 아놀드 슈왈제네거, 스트레이트 헤어시술 후 여전사로 변신한 나의 미래, 사라 코너 역에 린다 해밀턴, 그리고 그들이 지켜야 하는 그녀의 아들 존 코너가 나오는 터미네이터2는 '아일비백'을 외치던 터미네이터의 컴백을 오매불망 기다리게 만들며 나의 인생작 1순위로 가뿐히 안착했다.
 
그 뒤로 3편, 4편, 5편. 판권이 어쩌고, 어느 영화사로 넘어가 저쩌고, 어느 감독이 찍었고 하더라만, 그건 난 모르겠고. 이게 정녕 무슨 일이람. 내 인생작이 갑자기 삼류영화가 되어 돌아왔다. 할리우드 한복판에 누워 '내 인생작 돌려내' 진상이라도 부리고 싶지만, 깽판을 쳐도 달라질 게 없으니 추억에나 젖어보자며 비디오테이프 대신 파일을 다운받아 지난날의 영광을 다시금 되돌려보고는 했다.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스틸컷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그러던 어느 날 보게 된 사진 한 컷. 할매가 된 사라 코너가 '날아라 슈퍼보드'에서 저팔계가 끼고 다니던 바주카포를 어깨에 이고 누군가를 겨냥하고 있다. 주름진 얼굴에 어느덧 할매가 되었지만 곱디고운 이목구비는 그대로인 사라 코너를 보니 잊고 있던 허무맹랑한 나의 꿈이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마치 30년간 잊고 지냈던 할머니를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갑고 또 반갑다. 더군다나 할매전사라니... 역시 원조는 죽지 않았다.
 
심지어 사라 코너와 터미네이터가 함께 한국에 내한을 하셨단다. 버선발로 뛰어나가 열렬한 환영이라도 해드렸어야 되는데, 어느 누구한테도 뒤지는 정보력 덕에 한국땅을 뜨신 뒤에나 알게 되었다. 그래도 괜찮다. 영화에서 만나면 되니까. 원년 멤버가 함께 나오는 터미네이터라니!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을 되새기며, 기대를 고이 즈려밟아 보려 해도 문득 고개를 내미는 기대감에 설레는 마음만 커져간다.
 
아직 영화를 보지도 않았는데 서론이 A4 1장을 넘겼다. 그만큼 나에게 의미가 있는 영화다. 원년 멤버의 등장만으로 어린 날 나의 꿈과 추억은 이미 소환 완료. 그래서 오늘 영화를 보러간다. 미천한 체력 덕에 퇴근 후에 다른 일정을 잡는 건 과분한 일이라며 '퇴근=집에 가서 눕기'를 칼같이 지키던 나였지만 오늘은 나의 할매전사를 만나러 간다. 벌써 마음이 콩닥콩닥하다.
 
기대를 너무 많이 했나, 나의 저질체력과 맞바꾼 영화는 조금 실망이다. '마이더스의 손' 제임스 카메론의 명성도 예전 같지 않음을 절감하며, 북미에서의 흥행 저조로 다음 편 제작에 빨간불이 들어왔다는 소식이 근거가 없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나름 수확은 있다. 어릴 적 좋아하던 배우를 세월이 흘러 아들·딸을 지나 손주들마저 여럿 있을 것만 같은 할머니, 할아버지로 맞닥뜨렸을 때, '세월에는 장사가 없구나'를 실감하며 왠지 서글퍼진다. 그런데 나의 할매전사 사라 코너에게는 그런 느낌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탄탄히 관리된 몸, 새하얀 백발, 얼굴에 새겨진 주름에서 세월의 서글픔보다는 연륜의 멋이 느껴진다. 어르신이 아니라 굳센 전사의 면모가 보인다. 멋지다, 나의 할매전사.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아마 그리움 때문인 것 같다. 컴퓨터그래픽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던 그때, 수은이 흘러 모여 사람으로 변하는 장면은 레볼루션,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 모두에게 혁명이었다. 짜릿한 전율과 놀라움을 넘어 경탄을 안겨준 그 영화의 감동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던 나의 영웅들, 터미네이터 그리고 사라 코너. 그 혁명의 뒤를 잇는 건 내가 될 거라는 얼토당토않은 꿈을 꾸던 사춘기 소녀는 사라지고 이제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린 나에게 사라 코너와 터미네이터는 그리움이자 향수였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왔다.
 
터미네이터란 제목으로 지난날의 영광을 재현할 세기의 명작을 다시 만날지 의심이 들지만, 나의 소중한 할매전사 사라 코너, 죽지 않는 노장 터미네이터를 다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추억팔이를 싫어하는 나지만 영화를 보면 볼수록 옛 생각이 더 많이 나게 하는 오늘의 추억팔이에는 기꺼이 동참하며 그들의 현재와 과거에 동행했다. 왜인지 모르게 그들이 문득 고맙게 느껴졌다.
 
'운명은 없다'며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던 그녀, 사라 코너는 28년이 지난 지금도 나에게는 여전히 강인한 울트라파워 전사다. 나의 영웅의 귀환을 환영한다. 나의 소중한 사라 코너, 포에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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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에도 여전히 꿈을 꾸는, 철없는 어른아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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