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계수 감독 인터뷰 사진

ⓒ (주)트리플픽쳐스

 
"<러브픽션>을 기대한 관객 분들은 굉장히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2011년 개봉했던 로맨틱 코미디 영화 <러브픽션>은 17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하정우와 공효진의 현실 연인같은 호흡도 인상 깊었지만 '사랑해'라는 말을 '방울방울해'로 바꿔서 하는 등 재치 있는 대사가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러브픽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전계수 감독이 무려 7년 만에 새로운 영화로 관객을 찾아왔다. 지난 10월 개봉한 영화 <버티고>는 <러브픽션>과 달리 정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개봉을 앞두고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전계수 감독을 만났다. 

전 감독은 지난 7년의 공백에 대해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큰 프로젝트도 시도해 봤다. 처음으로 다른 작가가 쓴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드려고도 했지만 번번이 잘 풀리지 않았다. 그동안 공연을 두 번 연출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복귀작으로 <버티고>를 선택한 이유는 <러브픽션>과 완전히 달라서였다고. 전계수 감독은 "제 시나리오 창고를 뒤지다 보니 <버티고>가 현재의 제 감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러브픽션>과 아주 다른 결을 가지고 있어서 제작하고 싶어졌다"며 "<러브픽션>을 기대한 관객들은 굉장히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까"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영화 <버티고>는 고층빌딩의 사무실에서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30대 비정규직 직장인 서영(천우희 분)의 일상을 그린다. 전계수 감독은 20여 년 전 일본에서 했던 직장생활의 경험을 시나리오에 녹여냈다. 서영이 건물이 흔들리는 듯한 공포를 느끼는 장면 등은 모두 전 감독의 실제 경험담이다. 그는 '경계에 서 있었다'는 표현으로 당시를 회상했다.

"제가 1999년에서 2001년까지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IT회사에 다녔다. 그 건물이 일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는데, 70층짜리 건물에서 제가 일하는 사무실은 42층에 있었다. 일본은 내진 설계가 잘 돼 있어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건물이) 흔들린다. 바람이 좀 많이 불면 물컵의 물도 흔들릴 정도였다.

직원이 140명 정도였는데 한국인은 저 혼자뿐이어서 되게 외로웠다. 내가 경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도 그렇고 당시 밀레니엄을 지나기도 했으니까. 영화 속 서영처럼 현기증을 앓지는 않았지만 당시 건물의 흔들림이 주는 묘한 느낌이 있었다.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이 결코 안전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전계수 감독 인터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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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디자이너로 일하는 서른 살 서영은 기댈 곳 하나 없는 외로운 인물이다. 하나뿐인 혈육인 엄마는 서영에게 안정이라기보다 짐같은 존재다. 연인 진우(유태오 분)와의 관계도 부쩍 소원해졌다. 서영은 재계약 시즌을 앞두고 불안해 하며 하루하루를 견딘다. 이런 서영의 모습은 현실을 견디고 있는 평범한 30대 직장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전계수 감독은 영화를 통해 지금 시대를 사는 청춘들의 불안을 표현하려 했다고 털어놨다.

"서른이라는 나이가 묘한 것 같다. 20대 때는 어떤 시도를 해도 (우리 사회가)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주고, 그 시도를 긍정적으로 바라봐 준다. 하지만 (나이 앞에) 3자가 붙으면 이제는 좌충우돌 하는 게 잘 허용이 안 된다. 무엇보다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에 진짜 어른으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준비가 안 된 것 같고. 여전히 나를 둘러싼 인간관계들은 불안하고 직장도 불안하지 않나. 청춘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명하는 영화들이 많이 나왔지만 나는 내 방식으로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영화를 만들고 나서 드는 생각은, 그 불안이 꼭 그(젊은) 세대의 얘기만은 아닌 것 같다. 저는 내일 모레 쉰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여전히 불안하고 어른이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내 얘기 같기도 하다.

제가 서른살 즈음일 때 직장에 사표를 내고 영화 일을 시작했다. 20년이 됐는데 지금도 '내가 한국 영화계에 정말 필요한 존재인가, 직업을 바꿔야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을 견디고 있다. 나이를 먹다보니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나', '뭔가 자리잡아야 하는 나이는 아닌가' 그런 고민도 한다. 여전히 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은 없고, 지금 서영과 저는 거의 비슷하다."


최근 여성 서사를 다루는 영화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버티고> 역시 여성의 이야기이지만, 남성 감독이 그리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우려 섞인 시선도 많았다. 전계수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 "그 부분을 가장 많이 신경 썼다"고 고백했다. 

"남자 감독이 여자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떻게 해도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영의 입을 통해서 제 이야기를 한다는 건, 어쨌든 (영화는) 감독의 발언이지 않나. 어떤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다. 적당한 선을 지키는 게 굉장히 어려웠다. 영화 시작할 때 PD님한테 '나는 욕먹을 각오가 돼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어 전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 GV 행사에서 관객에게 위로를 받았던 일화를 공개했다. 한 여자 관객이 "감독이 누군지 모르고 봤다. 당연히 여자 감독이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남자 감독이 인사를 해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는 것. 전계수 감독은 "그게 큰 위로가 됐다"고 털어놨다.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었다. 딱 서른 즈음의 여성 관객이었는데, 그 분의 마음을 건드린 게 아닐까. 그렇다면 아주 보편적이지는 않더라도, 그 세대의 불안을 충분히 존중하면서 뭔가 이야기를 건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봐주신다면 저한테는 가장 좋을 것 같다."
 
 전계수 감독 인터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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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근 등장하는 여성 서사 영화들에 비하면 <버티고>의 서영은 상대적으로 인내하고 속으로 참는 부분이 많은 인물이다. 이를 두고 '수동적인 여성상'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전계수 감독은 "여전히 녹록지 않은 현실을 말하는 서사도 필요하지 않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그 부분을 많이 걱정했다. 극 중에서 서영이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게 사실이고 관객들은 보통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내가 하지 못했던 것들을 대신해주는 데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나. 여성 히어로들은 대부분 주체적이다. 저는 그런 영화, 그런 서사를 가진 드라마와 영화도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현실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도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버티고>는 아직도 여전히 여성이 현실을 살아가는 게 녹록지 않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영화다. 이런 서사도 필요하지 않을까."

영화 팬들이 아주 오랜 기간을 기다린 끝에 <버티고>를 만난 만큼, <버티고> 이후 차기작에 대해 그에게 물었다. 전계수 감독은 "또 8년 걸리지는 않을까"라는 농담을 하다가도 경계를 부수는,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제가 영화를 만들게 된 가장 큰 동인은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게 저한테 즐거움을 주는 요소다. 데뷔작이었던 영화 <삼거리 극장>도 저는 '족보 없는 영화'라고 표현한다. 갑자기 튀어나온 뮤지컬 영화이니까. <러브 픽션>도 이동진 평론가가 당시에 '안드로메다에서 온 로맨틱 코미디'라고 말했더라. 이번 <버티고>도 마찬가지다. 요즘 트렌드와 다르게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어떤 주제인가'보다 '어떤 스타일로 플롯을 전달하느냐'가 내게 더 중요했다.

아마 다음 영화는 <버티고>와는 또 다른 스타일이 될 것 같다. 다시 한 번 수다스러운 영화를 만들 수도 있지만 그건 <러브픽션>같은 수다는 아닐 것이다. 전쟁 영화 같은 걸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런데 어찌 됐든 저는 경계를 부수고 새로운 방식의 영화를 만드는 게 좋다. 또 한 8년 걸리지 않을까. 그만큼은 안 걸렸으면 좋겠다는 게 지금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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