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 컷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 82년생 김지영 >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김지영이 아이 어린이집 엄마들 모임에 참여했다가 다른 엄마들의 출신 대학과 전공을 알게 되는 장면.

김지영은 그 자리에 있는 엄마들이 누구는 서울대 수학과를 나왔고, 누구는 연기를 전공했고, 누구는 공대를 졸업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지금은 모두 같아 보이지만 한때는 모두 꿈이 있고, 직업이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란다.

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는데, 결국 여성이라면 어떤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든, 얼마만큼 열심히 공부를 했든, 대부분은 아이 엄마 신분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과장이나 허구가 아니다. 실제로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한, 서울대를 졸업한 내 친구는 퇴사 후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있다. 연세대에서 박사까지 한 나의 시누이 역시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나의 동창, 선후배를 비롯하여 많은 명문대 졸업생 친구들이 모두 집에 있다. 회사에서 존경하던 여성 선배 중 많은 이들이 결국 못 버티고 퇴사 후 아이를 돌보고 있다.

서울대를 졸업한 다른 친구 한 명은 몇 년 전 카카오 스토리에 이런 내용을 적기도 했다. "이럴 거면 공부는 뭐하러 했나 싶은 생각이 들고 자꾸 눈물만 난다." 물론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나 또한 퇴사 후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영화 속 '엄마들 모임' 장면에 쏟아진 비판

그런데 < 82년생 김지영 > 속 이 장면을 두고 또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유는 대학을 나오지 않은 엄마들을 소외시켜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대졸자인 것도 아니건만 그런 부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어서. 엄마들 중에는 마치 저런 사례만 있는 것처럼 다루어서. 사실 이 비판은 < 82년생 김지영 >에 줄곧 제기되는 문제점과도 상통한다. 말하자면, 김지영이 '대졸 중산층 여성'의 삶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

사실 말 자체는 맞는 말이다. 엄마들이라고 모두가 대학을 나온 것은 당연히 아니고, 그 와중에도 더 힘들고 더 소외된 여성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아예 부각조차 되지 않는 여성들의 삶이 있다.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 컷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런데, 이런 비판이 나올 때마다 조금 의아한 지점이 있다. 예를 들어 드라마 <미생>에서 장그래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다루었을 때, 장그래가 계약직 신분으로 겪는 온갖 미묘한 차별이나 서러운 에피소드를 두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봤자 저건 공부 좀 한 사무직들의 이야기잖아! 지금 이 시간에도 안전한 노동환경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대학도 못 나온 소외된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미생>을 보면서도 소외감을 느낀다고!"

이는 아마도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가 그 자체로 개별성을 획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그래가 모든 남성의 삶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불쌍한 청춘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비정규직과 계약직의 인생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에. 장그래는 그냥 장그래니까.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직 여성의 문제라든가, 다른 집단의 남성이 겪는 고충이라든가, 블루칼라 남성의 문제라든가, 이들보다 더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하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생>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 문제를 다루는 영화, 드라마, 문학 또한 마찬가지다. 모두가 개별적인 서사로 다루어진다. 단, 그것이 여성 문제일 때만 빼고 말이다.

대졸자 중산층 여성에게도 고통과 고민이 있다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 컷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켄지 요시노의 <커버링>과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보면, 더 약자이고 소수자일수록 입체성과 개별성을 획득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기득권자는 각자의 개성을 인정받기 쉬운 반면, 비기득권은 하나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퉁쳐지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남성은 개개인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반면, 여성이나 장애인, 성소수자 등은 무언가 목소리를 낼 경우에 주변에서 그 집단에게 갖는 스테레오 타입, 혹은 대표성을 띤 이야기를 하기를 자동으로 기대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인간'이라는 것은 이미 건장한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세팅된 경우가 많다. 따라서 비정규직 남성인 장그래의 이야기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불안정한 비정규직'이라는 차원에서 인물 한 명 한 명의 특별한 이야기가 되어 버리지만, 그렇지 못한 김지영의 경우 왜 여성 '보편의' 서사를 다루지 않느냐, 왜 소외되는 모든 집단을 다루지 않느냐 라는 비판을 듣게 된다는 말이다.

김지영의 이야기가 대졸자 중산층 여성의 삶, 그 안에서의 문제점만을 다루고 있다는 비판은 일견 맞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김지영 이전에는 대졸자 중산층 여성의 서사가 거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대졸자 중산층 여성에게도 고통과 고민과 괴로움이 있다. 오히려 '저 정도 가지고 뭘', '더 힘든 사람 쌔고 쌨는데', 하는 시선들 때문에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있다. 김지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러한 것들이 이야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늘 그렇지만, 나는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김지영은 모든 여성을 대변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럴 수도 없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ㅍㅍㅅㅅ'와 개인 페이스북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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