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발견한 하루> 포스터

<어쩌다 발견한 하루> 포스터 ⓒ MBC

 
아주 주관적인 잣대로 드라마를 3등급으로 분류한다. 꼭 보라며 권하는 재미와 작품성을 갖춘 드라마, 그냥 습관적으로 보는 드라마, 싫어해서 안 보는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첫 번째 등급이다. 그런데, 사실 이 드라마는 싫어해서 안 보는 드라마의 설정을 모두 갖고 있다.
 
필자는 학원 로맨스와 재벌 3세 로맨스를 싫어한다. 고등학생 연애담 자체에는 불만이 없지만, 배경이 되는 학교가 비현실적이라서다. 재벌 3세 로맨스가 싫은 이유는 이제 우리나라가 '자수성가'는 불가능해진 나라가 된 것인가 하는 슬픈 생각이 들어서다. 
 
받아들일 수 있는 비현실성
 
MBC 수목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재벌 3세들이 다니는 귀족학교에서 고등학생들이 연애하는 내용의 드라마이다. 싫어해서 시청하지 않은 <꽃보다 남자>나 <상속자들>과 비슷한 설정이다. 그런데, 드라마의 배경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 만화 속이다! 가상 세계가 배경이다 보니 거부감이 사라졌다.

만화 속 세상이 무대라는 설정은 현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였으면 성토할 부분도 용납하게 해 준다. 고등학생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등교를 하고, 학교폭력선도위원회에 회부해야 할 수준의 괴롭힘을 학교와 학생 모두가 그냥 넘어가도, 만화니까 하고 수용할 수 있다. 물론 그래도 여자주인공을 괴롭히는 장면은 계속 맘에 거슬리기는 한다.
 
 만화의 주인공 오남주는 오토바이를 타고 고등학교에 등교한다.

만화의 주인공 오남주는 오토바이를 타고 고등학교에 등교한다. ⓒ MBC


만화 속에서는 엑스트라지만, 드라마에서는 여자주인공인 은단오(김혜윤)가 역시 같은 처지인 남자주인공 하루(로운)의 이름을 처음 만들어 주는 장면도 만화이기에 그냥 넘어간다. 학교에서 프로그램으로 남녀 학생이 1:1로 짝을 지어 손잡고 야밤에 산속 트래킹을 하게 하다니! 남자주인공의 이름이 생겨난 아주 중요한 장면이지만, 현실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혹시라도 학생들이 이런 프로그램 하자고 할까봐 못 박아 둔다, "얘들아 이건 만화잖아. 밤에 산길 걷다 다치면 어떡해??? 절대 안 돼!!!!"
 
드라마의 배경인 만화 속 세상은 그 만화를 창조한 작가가 직접 그리는 '스테이지'와 등장인물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섀도우'로 나뉘어 있다. 독자가 이 만화를 본다면 스테이지 부분만 볼 수 있고 스테이지 사이사이 비어있는 시간인 섀도우는 볼 수 없다. 섀도우는 작가가 직접 그리지 않았기에 의자와 휴지통 등이 둥둥 떠 있기도 하고, 시계 바늘이 거꾸로 가기도 한다.
 
등장인물들 중 몇몇은 '사각' 소리와 함께 갑자기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고, 스테이지에서 자신의 의지가 아닌 작가의 의도대로 말이나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등장인물들에게는 자아(自我)가 생긴 것이다. 그들은 스테이지와 섀도우 모두를 기억한다. 자아가 없는 만화 속 등장인물들은 섀도우에서 한 말과 행동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것이 <어쩌다 발견한 하루> 속 세상의 설정인데, 이러한 비현실적 설정만 받아들이면 그 다음부터는 재미와 작품성 모두를 갖춘 작품이 펼쳐진다.
 
상투적 설정으로 만든 신선함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비밀>이라는 제목의 순정만화 속 세상이 배경이므로, 순정만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상투적 설정을 사용한다. 그런데 사용 목적이 다르다. 어린 소녀들에게 백마 탄 왕자님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투적 설정을 비틀어 이야기 전개에 신선하게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만화 속 주인공 오남주의 생일파티

만화 속 주인공 오남주의 생일파티 ⓒ MBC

 
정관계의 주요 인사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고등학생들이 참석해 가든파티를 하는, 만화 속 남자주인공 오남주(김영대)의 생일파티는 흔해빠진 상투적 장면이다. 그런데, 은단오가 과연 하루의 도움으로 작가가 예정한 콘티와 다르게 스테이지를 바꿀 수 있는가 여부가 핵심으로 떠오르면서 흥미진진해졌다. 바뀐 스테이지에도 '내게 여자는 은단오 하나다'와 같은 오글거리는 대사가 등장하지만, 앞으로는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자아가 있는 서브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과의 스테이지에서 작가의 의도 때문에 바이올린을 켠다. 만화를 보는 독자라면 연주에 푹 빠져 눈물을 흘리는 감성적인 서브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로맨스 장면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정작 연주를 하는 이는 '바이올린을 갖다 버리고 싶다', '오글거려 미치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글거리는 스테이지가 끝나고 섀도우가 시작되자 "이 정도면 서브 남주가 아니라 배경음악 플레이어"라며 하소연한다.
 
자아가 있는 등장인물들은 순정만화의 상투적인 장면이 나올 때마다 스테이지에서는 속으로 거부감을 표시하거나 체념한 채 연기하고, 섀도우에서는 투덜거린다. 창의력도 없이 맨날 쓰던 걸 쓴다고, 게으르다고, 만화를 그리는 작가를 욕하기도 한다. 순정만화에 흔하게 등장하는 상투적 설정을 이렇게 사용하니 이 드라마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결말은 과연 어떻게 될지 쉽게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바이올린을 켜는 서브 남자주인공 도화

바이올린을 켜는 서브 남자주인공 도화 ⓒ MBC

 
'설정 값'이라는 계급
 
기사를 절반이 넘게 썼는데, 이제야 남녀 주인공을 제대로 소개하는 것처럼 만화 속에서 그들은 중요하지 않은 등장인물 '엑스트라'이다. 그나마 여자주인공은 설정 값이라도 있지만, 남자주인공은 처음에는 그마저도 없었다.
 
엑스트라 '은단오'는 심장병을 가진 18세 고등학생으로 약혼자인 백경을 일편단심 짝사랑한다. 이것이 드라마에서는 여자주인공인 은단오(김혜윤)의 설정 값이다.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만화 속 여자주인공을 좋아하는 서브 남자주인공은 이도화(정건주)의 설정 값이다. 그리고 남자주인공 하루(로운)는 설정 값도 없다. 눈, 코, 입도 제대로 그리지 않은 완벽한 엑스트라였다.
 
흥미로운 드라마적 설정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보았는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 '설정 값'이 계급에 대한 은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설정 값은 이것이기에 나는 여자주인공을 좋아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설정 값을 바꾸어 보겠다며 동분서주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얼핏 그런 느낌이 스쳤는데, 백경(이재욱)의 대사를 보며 그런 생각이 더 강해졌다.
 
은단오가 10년 째 짝사랑하는 백경은 잘생기고 똑똑하고 운동도 잘하는 남학생이다. 10년 짝사랑을 짜증나 했는데, 섀도우 속 은단오가 다른 남자애가 좋다며 변하기 시작했다. 내 것을 빼앗기니 화가 나서 백경에게도 자아가 생겨난 것 같고, 은단오가 사랑하는 하루와 갈등을 빚는다. 그 때 백경이 자주 했던 말이 설정 값이다. 설정 값 대로 행동해라, 스테이지에서 설정 값도 부족한 엑스트라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등의 말이었다.
  
 바뀐 스테이지. 오남주의 고백 장면이 백경의 고백 장면으로 바뀌었다.

바뀐 스테이지. 오남주의 고백 장면이 백경의 고백 장면으로 바뀌었다. ⓒ MBC

 
만화 <비밀> 속의 세상은 사실상 계급 사회이다. 모든 등장인물이 최고 계급인 남녀 주인공의 사랑에 방해자, 조력자, 주변 인물 등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 극적 중요도에 따라 마치 계급처럼 부여된 설정 값은, 과거의 계급처럼 등장인물 간에 갈등을 만들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설정 값이 계급이로구나 하며 지켜보던 필자에게 등장인물들은 조금 다른 시각의 이야기를 한다. 하루는 설정 값이 없으니 자유롭다고, 스테이지도 들어갈 수 있고, 작가가 신경 쓰지 않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그래서 하루가 스테이지를 바꿀 수 있다고.
 
설정 값이 없어서 미미하고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고 아쉬워했는데, 설정 값이 없으니 자유롭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존재라는 긍정적 메시지였다. 역사 속에서 혁명을 일으킨 이들은 계급의 맨 아래에 있는 민중이었다. 진보적 지식인들이 혁명을 이끌고 지도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혁명을 수행한 것은 민중이었다.
 
스테이지에서 누가 더 우월한지 보여주겠다며 쓰러진 은단오를 향해 걸어가던 백경의 눈을 피해, 은단오를 안고 뛰어가는 하루의 모습에서 귀족에게 저항하는 청년 민중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작가는 사랑스런 학원 로맨스의 외피를 둘러서 기득권층에 저항하는 민중의 성공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필자의 너무 나간 감상일 뿐이겠지만.
  
 설정 값이 없어서 자유로운 하루

설정 값이 없어서 자유로운 하루 ⓒ MBC

 
엉뚱한 감상을 하나 더하자면....
 
운명에 저항하며 고군분투하는 은단오를 보고 있자니 뜬금없이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들이 떠올랐다. 사실 이 감상은 정말 뜬금없다. 밝고 사랑스러운 운명개척 드라마에 웬 독립운동이란 말인가? 11월 3일이 광주학생항일운동 기념일이라서 괜히 겹쳐 떠오른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떠오를 만큼 은단오의 처지는 엄혹하다. 심장이 약한 설정 값을 가진 은단오에게 설정 값을 바꾸고 못 바꾸고는 목숨이 달린 절박한 문제이다. 바꾸지 못하면 곧 죽을 테지만, 창조주인 작가가 그리는 세상은 바뀔 것 같지 않다. 스테이지 속 작은 사건 몇 개가 사소하게 달라져 '나비효과'를 꿈꾸며 노력해 보지만, 실패가 더 많았다. 엑스트라인 하루가 갑자기 사라지고 기억을 잃은 채 돌아오는 사건을 겪자, 자기 때문이라며 다시는 스테이지를 바꾸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독립 운동가들이 그랬다. 1945년 8월 15일에 독립할 때까지 일본은 망할 것 같지도 않았고, 우리나라는 독립을 할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3.1운동으로 독립할 수 있겠다는 한 줄기 희망을 가져보았지만, 실패가 더 많았다. 가족이나 주변 인물이 고초를 겪게 되면 미안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고, 독립운동을 포기하겠다고 결심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분들 덕분에 해방된 후손들은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런 드라마를 만들었고, 행복하게 감상하고 있으며, 또 누군가는 엉뚱하게도 이 속에서 독립 운동가를 떠올린다.

 
 김혜윤

김혜윤 ⓒ MBC

   
마지막으로 배우 김혜윤을 칭찬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연기력이야 충분히 칭찬을 받고 있으니 거기에 더 보태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김혜윤은 자신의 미모를 작품에 필요한 만큼 적절한 수준으로 사용하는 배우 같다. 전작 <스카이 캐슬>에서는 그저 공부 잘하는 고등학생 역할이라고만 인식했다. 엑스트라로 등장한 <도깨비>에서는 6.25 때 헤어진 남편을 죽어서 만나는 장면에 젊은 새댁으로 등장했다. 어린 애인데 옛날 사람 같은 연기를 참 잘했다는 인상만 받았었다.
   
<어쩌다 발견한 하루>에서의 김혜윤은 더없이 사랑스럽고 예쁘다. 하루가 사라져 슬퍼하는 장면에서 말갛게 슬픈 얼굴로 펑펑 울 때, 백경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으며 보건실에 누워 있을 때, 하루와 함께 하며 더없이 행복해 할 때 배우 김혜윤은 정말 예뻤다. 전작들은 미모가 중요하지 않은 작품들이라 조금만 썼는데, 이번 작품은 장르가 연애물이니 충분히 투입해서 촬영한 모양이다.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MBC에도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 줄 작품이 될 것 같다. 그동안 드라마는 tvN, JTBC 등 종편에 밀리고 있었는데, MBC에서도 주변에 적극 추천하고 싶은 드라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시청률이 좀 아쉽다. 그래서 적극 권한다. 이 드라마 아주 신선하고 재미있으니 꼭 보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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