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는 영화 <터미네이터 : 다크 페이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터미네이터 : 다크 페이트> 한 장면

영화 <터미네이터 : 다크 페이트>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터미네이터 : 다크 페이트>(2019)는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충격적이다. 그동안 쭉 이어져 내려오던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DNA를 완전히 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할리우드를 비롯한 요즘 세계 영화계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이야기에 목말라 있는 듯하다. 세계적 흥행돌풍을 일으킨 <어벤져스> 시리즈에서도 '아이언 맨(로다 주)'만큼이나 '완다(엘리자베스 올슨)'의 역할은 꽤나 비중이 높았다. '남자의 영화'로 유명한 터미네이터 시리즈까지 이젠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꿔놓는다. 그런데 나는 그게 꼭 달갑지만은 않다. 세계는 남자든 여자든 하나의 성별로 구성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에서도 '카일 리스' 역할을 여성 캐릭터가 맡고, 이런 장르에서 여성이 특정 역할을 맡기 어려웠던 부분을 감안해 '강화 인간' 콘셉트를 적용해 개연성을 획득한 것까지도 좋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 알았던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의 재등장은 전율이 일게 했다. 그런데 거기서 한술 더 떠 굳이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원동력인 '존 코너'를 부정해가면서까지 히로인을 만들어야 했나? 그건 아니라고 본다.

모든 사람이 사회의 구성에 필요하다. 다만 그 구성원들이 남자거나 여자일 뿐이다. 남자가 됐든 여자가 됐든 간에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잘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지, 한 존재의 특정한 페르소나 혹은 가치를 억지로 탈취해가면서 그걸 다시 대표하는 게 좋은 일인 것 같진 않다.

사람들은 때로 단순한 사실을 망각한다. 이를테면 격투기는 두 사람이 링 위에 올라가 싸움으로 승부를 가리는 경기고, 남자 격투기 선수들은 '체급'이라는 걸 가지고 있다. 남자라고 해서 무작정 링 위에 올라가는 게 아니라, 체급에 맞게 올라간다. 예컨대 헤비급 선수(약 120kg)가 페더급 선수(약 65kg)와 만나면 경기의 의미가 없어진다.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헤비급 선수가 페더급 선수를 압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됐든 남자가 됐든 상관없다. 힘이 좋은  헤비급 선수는 당연히 페더급 선수보다 유리하다. 그러므로 격투기 링 위에서는 단순히 '헤비급'이 유리할 뿐인데, 요즘 미디어의 문제점은 자꾸 남녀를 '격투기 링'위에 올려놓고 계체량도 거치지 않은 채 싸움을 붙인다는데 있다.

왜 하필 격투기 장일까? 야생에서 매머드를 사냥하던 시대도 아닌데 왜 자꾸 여성들을 근육 싸움에 몰아넣고 남자들에게 뒤쳐지는 듯한 인상을 심은 뒤 이를 극복하는 방식을 선택할까? 나는 우리가 진짜 문제 삼아야 할 부분은 여성이 불리한 곳에서의 싸움이 아니라, 유리하게 싸울 수 있는 곳에서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의 편견과 제약이라고 생각한다. 유리한 부분은 언급하지 않고 불리한 부분에 자꾸 뛰어들게 하니까 여성들의 능력이 제한받는 것은 아닐까. 또 나아가 '그런 식'으로 성공해야지만 '참된 여성'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런 부류의 영화들이 애초에 '포커싱' 자체에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가 억지로 생리적 특성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분야는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한 장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

 
'미란다 프리슬리'로 생각해 보는 여성의 가치

나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미란다 프리슬리'가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기 분야에 대한 전문성으로 같은 업계의 꽤 성공한 남자들조차 엎드리게 만든다. 기업에서 벌어지는 온갖 간계와 권모술수까지 파악하고 대응하는 그녀의 모습에선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권력을 향한 강한 야망'도 느껴진다. 그런데도 이런 모든 요소들이 전혀 이질감이 없다. 왜냐하면 확실히 그러한 일들을 잘할 수 있는 데는 남녀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13년 전에 개봉된 영화가 요즘 나오는 영화보다 '여성의 사회적 중요성'을 반영하는 데 더 좋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기왕 미란다 프리슬리가 나왔으니 계속 더 이야기해보자. 앞으로 세계는 IT산업만큼이나 인간의 취향을 만족하는 산업, 예컨대 패션, 디자인 관련 산업도 중요하게 된다. 그런 점을 상기하고 당장 길거리에 나가보면 대체로 여성들의 패션 감각이 남성들을 압도한다. 그런데 이런 세계를 선도할 만한 중요 산업이자 '여성의 근력이 압도적인' 분야에서도 실질적으로 권력과 성공을 쥐고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남성들이었다.

칼 라거펠트, 입 생로랑, 크리스티앙 디오르, 조르조 아르마니, 랄프 로렌 등 굵직한 패션 산업의 거성들은 모두 남성인 가운데 코코 샤넬과 같은 여성 디자이너가 간간이 거성의 반열에 보일 뿐이다. 진짜 여성의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자아를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일에 더 이상함을 느껴야 되지 않을까?

나는 여성이 '근육 싸움'보다는 훨씬 더 많이 능력을 발휘하면서 멋지게 등장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그런 곳에서는 오히려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가 드물다는 걸 느낀다. 예컨대 금융 범죄나 사기극 등을 다루는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대부분 남성들이다.

<빅 쇼트>(2015)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 같은 영화도 남자의 시선에서 그려지지만 사실 여자가 주인공이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분명 월가에서 일하는 실력 있는 여성 금융인들도 많을 텐데 말이다. 혹은 꼭 그런 분야가 아니더라도 공학이나 의학 분야의 영화도 계산을 하고 천재적인 통찰력을 가진 주인공은 모두 남성으로 등장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머리 쓰는 일에 남녀가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런 분야에서의 여성의 등장은 적고 근육질 싸움에만 여성을 동원하려고 애쓰는 사실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같은 영화나 <컨택트>(2016) 같은 영화가 더 많이 나온다면 여성도 사회의 핵심에서 충분히 활약하고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진실로 영화 제작자들이 그러한 일에 관심이 있다면 말이다.

그러니 '터미네이터'는 '터미네이터' 명작으로 놔두고 이제는 진짜 여성의 역할을 그리는 영화를 논할 때가 아니겠는가.
덧붙이는 글 해당 기사는 황경민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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