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 82년생 김지영 >(2019)을 보면서 그녀를 도와주었던 이름모를 수많은 여성들의 연대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그녀들 중 하나였던 버스의 스카프 여인의 입장에서 김지영에게 편지를 써 보았어요. 우리들 모두, 조금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연대해 보면 어떨까요? - 기자 말

그동안 잘 지냈어요? 이제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지영씨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어요. 즐겨보는 잡지에서 지영씨가 쓴 것만 같은 글을 읽다가, 불현듯 그날이 떠올랐어요. 지영씨가 작은 아이의 소중한 엄마가 되어있다는 소식에 환하게 행복해 지기도 했구요.

아, 내가 누구인지 소개도 안 했네요. 나는 1974년생 이창희예요. 우리는 아직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어느 날, 힘든 퇴근길 버스에서 만났지요. 불안한 얼굴로 내 옆에서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지영씨를 보았을 때,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처음에는 어딘가 아픈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답니다. 

지영씨는 급하게 전화기를 빌려서 아버지께 메시지를 보냈었죠. 그런데, 내리는 정류장에 어른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고, 지영씨를 따라 내리는 그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급해졌어요. 목청껏 기사 아저씨를 불렀고, 무슨 구실이라도 만들어서 지영씨 옆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 구실이란 것이 계속 내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였다니, 지금 다시 생각해도 우습죠?  

면접에서 나이 지긋한 임원이 건넨 말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 컷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 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지영씨. 내 얘기를 해도 될까요? 그날도 나는 하루 종일 회사에서 시달리고 퇴근하던 길이었어요. 당시의 나는 나름 좋은 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치고, 처음으로 직장이란 것을 갖게 되어 무척이나 신이 나 있었어요. 그런데 마주한 세상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다르더군요. (아마, 이제는 지영씨도 잘 알겠네요.) 첫 직장이었던 대기업의 연구조직은 200명 정도였는데, 그중 여자 연구원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어요. 면접에서 나이 지긋한 임원에게 들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해요.

"회사 정책(여성 할당제)이 있으니 너를 뽑기는 해야 하는데, 여자라고 안 봐줄 테니 제대로 해."

그때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어요.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나를 뽑지 않았을 것이라는 협박이잖아요. 그 말은 그 후의 내 삶에도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어요. 어떻게든 그들이 원하는 만큼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의 능력으로 그들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끝없이 나 자신을 다그쳤어요.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오랫동안 그들의 방식으로만 돌아가던 회사라는 거대한 조직은, 나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더라고요. 그런 느낌 알아요? 같은 제안을 해도 남자 동료가 하면 더 쉽게 받아들여지는 느낌, 말이에요.

그날도 그런 피곤한 논쟁이 밤늦게까지 이어졌던 하루였어요. 벌써 몇 번이나 수정한 보고를 계속 퇴짜 놓는 부장한테 '내일 다시 보고하겠다'는 약속을 한 후에야 빠져나올 수 있었던, 온몸이 젖은 솜뭉치처럼 느껴졌던 날이요. 매번 자료를 고치고 논점을 수도 없이 다듬으면서, 힘들게 만든 기회였지만 남자 동료에게 넘겨주는 게 나을까, 얼마나 고민했었는지 몰라요. 그렇게 하는 편이 나았을까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잘 버텨주었어요. 김지영씨, 고마워요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 컷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 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이 책임. 자네는 정말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결국은 과제를 중단하는 것으로 결정이 난 후, 자기 자리로 부른 부장이 던진 말이었어요. 나는 저 말이 무슨 뜻인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곱씹어야 했답니다. 그때까지,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일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다고 믿었는데 말이죠. 지영씨는 나를 잘 알지 못하니, 저 말이 쉽게 다가오지는 않겠군요. 나는 저 말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자'라는 뜻이라는 걸, 한참이나 더 시달리고서야 알았어요. 바보 같죠?

지영씨, 나는 그 후로도 직장을 몇 번이나 옮겼고, 아직은 버티면서 일을 지키고 있어요. 여전히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도 말하지도 않아서, 그들의 세계엔 들어가지 못했지만 말이죠. 이런 내 삶이 크게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그날 지영씨를 만난 그 버스의 기억은 꽤나 오랫동안 나를 깨어있게 했어요. 그날의 버스는, 세상의 규칙에 억지로 구겨 넣으려던 나를 깨닫게 했고, 그들의 규칙이 아닌 나의 방식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했어요. 하지만, 그동안 우리들이 살아야 하는 세상을 더 좋게 바꾸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네요.

오늘 오랜만에 지영씨의 삶이 느껴지는 글을 읽으면서, 그날의 지영씨를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어요. 지영씨가 힘들게 견뎌내야 했을 그 모든 순간들이 무척이나 대견했고 감사했답니다. 잘 버텨주었어요. 김지영씨, 고마워요.  

이 세상은 거대한 빙하 같아서, 우리의 속도로는 미처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천천히 변하는 것만 같아요.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는 것만으로 얼마나 빠르게 변화를 이뤄낼 수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느려지게 하거나 거꾸로 되돌리지는 않을 것이라 믿어요. 지영씨의 아이에겐 좀 더 나은 세상을 넘겨줄 수 있겠죠?    

이런! 반가움에 수다가 너무 길었어요. 항상 건강 챙기고요.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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