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블> 배보람 유승락

<앙상블> 배보람 유승락 ⓒ 극단 산울림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오빠만 생각했다. 엄마의 따뜻한 눈길을 한 번 더 받고 싶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어떻게 하면 더 사랑받을 수 있을까 늘 궁리했다. 하지만 엄마의 관심을 받을 수 없었다. 엄마의 눈빛에는 오빠로 가득했다. 엄마의 사랑이 그립다가, 이내 미워졌다. 오빠도 미웠다. 오빠 때문에 엄마가 힘들어 하는 것 같다. 엄마가 웃지 않는 것도, 아등바등 사는 것도 다 오빠 때문이라는 생각에 점점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다, 결국 집을 나왔다. 
 
그랬던 산드라는 10년 만에 집에 돌아왔다. 결혼을 앞두고서다. 다시는 안 돌아올 줄 알았던 집에 들어섰지만, 그곳은 다른 가족의 터전이 돼 있었다. 하지만 금세 가족들의 행방을 알 수 있었다. 같은 아파트의 다른 층으로, 이웃 누구나 알 수 있는 곳으로, 엄마와 오빠는 거주지를 옮겼다. 마치 산드라를 기다린 것처럼.

연극 <앙상블>에서 산드라 역을 맡은 배우 배보람을 지난 9월 23일 서울 마포구 산울림 극장 2층에서 만나 산드라의 생각을 들어봤다.
 
"받자마자 대본을 단숨에 읽었어요. 부드럽게 진행되면서도, 그 안에 공감이 있고, 울림이 느껴졌죠. 물론 관객들마다 다르겠지만, 엄마와 딸이 공감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엄마와 아빠를 향한 마음이 다 다르니까요. 가족 간에 느끼는 그 애틋한 감정을 어떻게 말로 설명해요. 각자가 지닌 스토리가 있잖아요. 그 안에 담긴 감정을 누가 말로 전할 수 있을까요. 작품을 보면 그런 감정을 '툭' 건드리기 때문에 관객들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거 같아요."
 
<앙상블>은 지적 장애를 겪는 미켈레, 그런 미켈레를 보살피는 엄마 이자벨라, 그런 엄마가 늘 안타까운 딸 산드라의 얘기다. 작품은 '지적 장애'이 아니라, 가족 간의 이해와 사랑, 배려 등에 초점을 뒀다. 극단 산울림 창단 50주년을 맞아 국내 초연됐다.
  
 <앙상블> 배보람

<앙상블> 배보람 ⓒ 극단 산울림

 
"극 중 가족의 상황이 특별하다면 특별할 수 있고, 흔하다고 하면 흔할 수도 있어요. 지적 장애를 겪고 있다고 하지만, 심부름하고 남은 돈을 모아서 엄마가 갖고 싶어 하던 가방을 선물하는 미켈레의 모습.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그런 오빠에게 산드라는 '비정상'이라고 하지만, 미켈레의 순수한 마음은 정상, 비정상 범주가 아니라, 마냥 아름답게 느껴질 뿐이에요."
 
산드라는 지적 장애를 겪는 오빠를 두고, 이자벨라에게 "오빠가 정상인가"라고 묻는다. 이자벨라는 "오빠를 부끄러워하고, 통신사에 다니면서 10년이 넘게 가족에게 연락하지 않는 것은 정상인가"라고 되묻는다. 통신사에서 인사과에 있는 산드라. 그는 면접을 보는 과정에서, 자신과 미켈레를 아는 이를 만나자, 이력서를 찢어 버린다. 자신과 오빠 미켈레를 아는 이의 존재 자체로 불편하고 힘든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이라고 범주를 나눴지만, 결국은 '기준'에 대한 이야기 같아요. 산드라가 떠난 것도 남들이 정한 기준 때문일 거고요. 시선을 견딜 수 없었겠죠? 사회가 정해진 나이에 따라 해내야 하는 역할이 있잖아요. 가족을 위하고, 진심으로 마음 표현하고, 그런 미켈레를 돌보는 이자벨라는 물론 힘들게죠. 하지만 그렇다고 미켈레가 어떻게 비정상일 수 있나요? 산드라의 마음속에는 애증이란 감정도 크지만, 분명 증오도 있을 거예요. 그런 감정을 마주 보기 쉽지 않지만요. 참을 수 없었을 거예요."
 
<앙상블>은 자신과의, 가족 간의, 친구, 등 구성원 '관계'의 앙상블을 생각하게 만든다. 배보람이 다가간 감정은 무엇일까.
 
"전 남동생이 있어요.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해서 애틋한 감정이 있어요. 제가 연기하려고 가족들과 떨어져 살았거든요. 부모님 곁을 함께 해준 동생을 의지하면서도, 미안함 마음도 커요. 그래서 더 잘해주고 싶고요. 가족에게 미안한 감정과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부모님 같은 분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배우를 한다고 했을 때도 반대하지 않고, 지금까지 지켜봐주고 바라봐 주셨거든요. 작품 제목이 <앙상블>이잖아요. 각자의 기준이 다르겠지만, 결국에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가족이라는 생각이에요. 가족이기에 가능, 불가능이 아닌 '앙상블'을 이룰 수 있는 거죠."
 

<앙상블>에 임하면서 가족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게 됐다는 배보람. 하지만, 이자벨라와 산드라와 달리, 실제 '엄마'와 사이가 친구같이 좋다고.
  
 <앙상블> 산드라 배보람

<앙상블> 산드라 배보람 ⓒ 극단 산울림

 
"산드라처럼 저 역시 집을 떠나긴 했어요. 연기하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엄마와 사이는 엄청 좋아요(웃음). 부모님의 사랑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자랐죠. 하지만 '당연'하지 않더라고요. 어느 날, 제가 엄마와 통화하는 것을 들은 친구가 '엄마와 전화한 거야?'라고 묻더라고요. 엄마와 그렇게 친근하게 통화할 수 있다는 게 그 친구한테는 놀라운 경험인 거죠. 저 역시 놀라는 친구의 표정이 잊히질 않아요. 당연하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어요."
 

극을 통해 만난 이자벨라, 엄마 예수정과의 호흡은 어땠을까. 예수정은 앞서 열린 프레스콜에서 산드라 역을 맡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배보람은 "제가 이자벨라, 예수정 선생님이 산드라"라고 말했다.
 
"예수정 선생님과의 만남, 정말 너무 좋아요. 감사한 마음이 커요. 지적이고 멋진 분이에요. 연기할 때도 편하게 할 수 있게 항상 열어주셨어요. 긴장도 되고, 어떤 분일지 궁금하기도 했는데, 정말 밝고 유쾌하시더라고요. 사실 선생님이 산드라와 가깝고 제가 이자벨라예요. 리딩할 때 한 번 역할을 바꿨는데, 정말 재밌었어요. 제 어머니가 정말 정이 많은 분이거든요. 자랄 때 정말 사랑 많이 받고 자랐어요. 그래서 그런지 저 역시 타인을 챙겨주는 등 마음을 많이 써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그러죠. 그런 면이 이자벨라와 비슷하다고 생각됐어요. 좀 억척스러운 부분도 그렇고요. 예수정 선생님은 정말 쿨하고, 타인을 존중할 줄 아는 분이에요. 화법 역시 잘 맞고요. 차갑고 세련된 산드라와 딱이라는 생각이었죠."

산드라는 미켈레 때문에 이자벨라가 웃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두를 위한답시고, 미켈레를 시설에 보낸다. 하지만 미켈레가 없는 집에서 이자벨라는 마음껏 쉴 수 없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한다. 이런 이자벨라의 모습에, 산드라는 가슴이 아프다. 
 
"'나는 뭐야? 오빠는 특별해. 오빠가 내 모든 걸 가져갔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가슴 아파요. 화가 벌컥 날 거 같기도 하고, 눈물이 날 거 같은데, 그런 감정을 억눌러요.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참잖아요. 그 장면이 정말 어렵고 힘들기에 기억에도 많이 남아요."
 
산드라는 자신이 아닌, 오빠 미켈레에만 관심을 쏟는 엄마가 미웠고 또 미웠다. 이런 마음은, 그를 더 힘들게 했고 외롭게 했다. 현실적이고, 이기적인 어른으로 성장했다. 배보람이 다가간 산드라 역시 그렇다. 그러고 싶어서가 아닌, 환경 안에서 그럴 수밖에 없이 자랐을 산드라 말이다. 산드라와 이자벨라가 속을 나누는 과정에서, 미켈레가 태어나서부터가 아닌, '사고'로 인해 지적 장애를 앓게 됐다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산드라가 이자벨라 뱃속에 있을 때, 폭력성이 강한 아버지 때문에 벌어진 사고다.
 
"만약에 산드라와 미켈레에게 자상한 아빠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산드라가 집을 나가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이자벨라는 산드라를 위해 진실을 숨겼지만요. 가정환경 때문에 산드라는 스스로 자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거예요. 현실적인 인물이 되고 싶어 그런 게 아니잖아요.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상황과 상황이 더해지면서 어느 순간 그를 견딜 수 없게 했을 거예요. 엄마의 관심도 받고 싶었겠지만, 그럴 수 없었고, 타인의 시선도 그에게 견딜 수 없었을 거예요. 그뿐만이 아닐 거예요. 가족을 떠나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했을 거고요."
 
그럼에도, '연극'이기에 느낄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가 있다. 떠났던 산드라가 돌아온 것처럼, 미켈레의 생일에 산드가나 나타나기 때문이다. 미켈레가 갖고 싶어하던 자동차 장난감을 손에 쥐고서 말이다.
 
"떠나버리는 게 자식의 한계 아닐까요. 그것까지 끌어안을 줄 알기 때문에 부모고요.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자식은 자식 밖에 안 돼 봐서 부모의 마음을 모르죠. 산드라가 결혼을 하고 가족이 생겼어요. 다시 찾아올까 고민을 많이 했겠죠. 집 나가서 산 시간이 10년이나 되잖아요. 그동안 마음속 응어리를 외면하고 살았는데, 재회 한 뒤에도 '역시 말이 안 통해' 라고 느끼고 다시 떠날 수도 있어요. 단절된 채 살아가는 가족들도 많잖아요. 하지만 산드라는 돌아와요." 
  
 <앙상블> 배보람

<앙상블> 배보람 ⓒ 극단 산울림

 
가족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산드라, 그를 기다리는 이자벨라와 미켈레. 상황을 마주하는 방식도 다르고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지만, 결국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맺는 '사랑'은 다른 감정과 '결'자체가 다르다. <앙상블>은 해피엔딩으로 그려지지만, 그들의 앞날도 마냥 행복할까.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앙상블>은 가족과 사랑에 관해 스며들게 하는 힘이 있는 작품이에요. 정상, 비정상을 떠나 서로를 '받아들이는' 거죠. 내버려두고 한 발자국 물러서는 게 아니라, 한 번 더 손을 내미는 거죠. 그런다고 모든 것이 해결될까요? 굳이 그래야 하는 걸까요? 그들은 또 싸울 거예요. 하지만, 분명 전과 다를 거예요. 가족이란 게,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잖아요. 밖에서 보는 가족의 모습은 집에서 보는 것과 다르죠. 가까운 타인 같다고 할까요. 우리는 가족에게 왜 그럴까요? 존재 자체로 감사한데 말이죠. 참 아이러니 하죠?"

현실적이고 차가운 인물로 그려진 산드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을 보면 마음이 저릿해진다. 배보람에게 산드라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물었다. 함께 지낸 시간 안에 애틋함이 묻어나왔다.
 
"엔조라는 좋은 남자를 만나면서 '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됐을 거예요.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참 멋지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다시 이자벨라와 미켈레 곁으로 온 것은 정말 잘한 거라고요. 가장 가깝지만, 모를 수 있는 가족을 이해할 수 있는 '한걸음'을 내딛은 거잖아요. 대단한 거 같아요."
 

연극 <앙상블>은 20일까지 소극장 산울림에서 공연된다.
연극 앙상블 산드라 배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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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전문 프리랜서 기자입니다. 연극, 뮤지컬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 전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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