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라>.

<나의 나라>.ⓒ JTBC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의 역사를 다루는 JTBC 드라마 <나의 나라>는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부터 스토리를 시작했다. 10월 3일 시작한 드라마는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이 최영 장군과 함께 추진한 요동정벌(만주정벌)에 대한 고려 내부의 반발에서부터 이야깃거리를 끄집어냈다.
 
요동정벌을 반대하는 벽서를 붙이는 주점 직원 한희재(김설현 분)의 행동은 정벌을 반대하는 아래로부터의 반대 움직임을 반영하고, 사석에서도 노골적으로 정벌을 반대하더니 출정 뒤에도 진격 왕명을 거부하는 이성계(김영철 분)의 행동은 위로부터의 반대 움직임을 반영한다. 드라마는 이 두 흐름을 교차시키면서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고려왕조를 배신했지만, 이성계는 충성스럽고 신뢰할 만한 신하로 알려졌었다. 여진족 지역에서 몽골에 충성하며 살다가 1356년 스물한 살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투항한 이래, 이성계는 고려왕조에 충성을 다하며 살았다. 몽골군·홍건적·여진족·왜구의 침입을 격퇴했을 뿐 아니라 고려 내부의 반란도 그가 직접 진압했다. 최영과 쌍벽을 이루며 그는 고려왕조의 수호신 역할을 다했다.
 
위화도 회군 때까지 32년간, 그는 고려의 충신으로 살았다. 한두 해도 아니고 이렇게 오랫동안 전장을 돌며 충성을 증명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가 배신하리라고는 쉽게 예측하기 힘들었다.
 
그랬던 이성계가 조민수 장군과 함께 5만 군대를 지휘하게 되자, 갑자기 태도를 바꿔버렸다. 우왕과 최영 장군은 요동을 정벌하라고 5만 군대를 맡겼지만, 그는 그런 용도로 그 군대를 쓰지 않았다. '요동정벌이 현실성이 없다'며 왕명을 거부한 그는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남진한 뒤 우왕 정권을 전복하고 그 아들인 창왕을 옹립했다.
 
이듬해인 1389년에는 또 다른 명분을 내세워 창왕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우왕이 공민왕의 친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으므로 우왕의 아들인 창왕 역시 그냥 둘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런 뒤 왕족 왕요(공양왕)를 새로 옹립하더니, 1392년에는 고려왕조의 간판마저 내리고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올랐다.
 
충성밖에 모르는 신하로 비쳐지던 이성계, 그러나

오랫동안 충직성을 보였던 이성계가 1388년~1392년 4년간은 이처럼 정반대 행보를 보였다. 1388년까지만 해도 그는 충성밖에 모르는 신하로 비쳐졌다. 그랬던 그가 1388년부터는 배신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비쳐졌던 것이다. 이성계를 충실한 장군으로 알았던 사람들은 1388년부터 연이은 충격을 거듭 받았을 것이다. 알고 보니 이성계는 배신을 잘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성계(김영철 분).

이성계(김영철 분).ⓒ JTBC

  
사실, 이성계가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이미 그 전부터 감지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이성계가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았다고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역사 기록 속의 행간을 살펴보면, 그가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았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 발견된다.
 
위화도회군 5년 전인 1383년이었다. 지금의 함경남도 함주에 있는 사병부대(개인 부대) 막사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이성계를 찾아온 낯선 선비가 있었다.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지만 공민왕 사후에 동맹정책을 반대했다가 정계에서 쫓겨나 8년째 야인 생활을 하고 있던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공민왕의 정책을 뒤엎고 친몽골 정책으로 돌아가려는 우왕 정권을 반대했다. 그로 인해 귀양이를 하게 된 정도전은 함께 유배 떠난 사람들에 비해 훨씬 심한 보복을 당했다. 귀양 2년 만인 1377년에 유배가 해제된 뒤에도 그는 정계에 복귀하지 못했다. 우왕 정권이 그 정도로 그를 경계했던 것이다.
 
그런 '위험인물' 정도전이 함주 막사의 이성계를 찾아왔다. 그러니 이성계 입장에서는 초면인 정도전이 어느 정도는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정도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욱 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태조실록>에 수록된 '정도전 졸기'에 따르면, 함주 막사에 발을 들인 정도전은 그곳에 있는 이성계의 사병들에게 매료됐다. 군기가 엄하고 군대가 잘 정비됐다는 사실에 상당한 감흥을 받았다. 그래서 초면인 이성계에게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라는 말을 던졌다.
 
군대로 무슨 일이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정치군인이 된다. 최고사령관이 시키는 일 외에는 그 무엇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군인의 숙명이다.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라는 말은 군인에게는 해서는 안 될 말이다.
 
정도전의 말을 듣고 이성계는 "무슨 말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정도전은 말끝을 흐렸다. "동남방의 왜구를 격퇴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라고 화제를 돌려버렸다.
 
이성계는 안 그래도 왜구를 잘 격퇴하고 있었다. 정도전이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정도전의 말 속에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이성계가 몰랐을 리 없다. 이성계는 전장만 누빈 게 아니라 개경의 중앙정치에도 관여했다. 그랬기 때문에 일반 군인들보다 정치적 감각이 더 나을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의 말뜻을 못 알아들었을 리 없다.
 
그런데도 이성계는 정도전을 경계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이했다. 거기다가 정도전의 정계 복귀를 도왔다고 볼 만한 정황까지 있다. 재기의 계기를 만들지 못하던 정도전은 이성계를 만난 직후부터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얼마 뒤 정도전은 정계 복귀에 성공했음은 물론이고, 1384년에는 정몽주가 이끄는 사신단의 서열 3위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오기까지 했다. 이 시기에 정도전을 도울 만한 사람은 이성계밖에 없었다. 이성계가 복귀를 도왔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다.
 
힘의 변화에 민감하다 보면 충신이 될 수 없다

함주막사에서 정도전이 했던 말은 반역을 부추기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성계는 정도전을 멀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를 도왔을 가능성까지 농후하다. 이는 고려왕조에 대한 이성계의 충성심이 바위처럼 단단하지 않았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성계의 태생적 조건도 그의 충성심에 영향을 줄 만했다. 사회생활이 가문을 중심으로 영위되던 그 당시, 이성계는 여진족 지역에 거점을 둔 가문에서 성장했다. 전통적인 여진족 거주지인 이곳은 몽골시대에는 몽골의 영향을 받다가 공민왕 이후로는 고려왕조의 일원이 됐다. 이런 곳에서 이성계 가문은 세력을 행사했다.
 
한반도 내에서도 비주류였던 당시의 함경도 사람들은 한반도나 중국의 정세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지역 정치세력이 살아남은 길은 시대 흐름과 힘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힘의 변화에 민감하다 보면 충신이 될 수 없다. 힘의 변화에 관계없이 초심을 지켜야만 충신이 될 수 있다. 이성계는 태생적으로 힘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대도 그랬고 그의 출신지도 그랬고 그의 가문도 그랬다. 더 강한 것에서 시선을 뗄 수 없는 운명에 몸이 묶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성계한테 정도전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라는 말을 던졌으니, 이성계의 심장이 얼마나 꿈틀댔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가 가문 대대로 계승되는 사병 부대까지 있었으니, 이성계한테 야심이 생기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성계는 '요동정벌이 비현실적이서',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씨여서' 왕조를 배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비쳐졌지만, 정도전과의 일화로 보나 가문 배경으로 보나 출신 지역으로 보나 그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딱한 것은 이성계가 아니라 고려왕조였다. 상황에 따라 배신을 꿈꿀 수밖에 없는 이성계한테 의지해서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됐을 정도로, 멸망 직전의 고려왕조는 군사력이 허약했다. 사병을 가진 세력가들한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이 같은 고려왕조의 허술함이 이성계의 숨은 야망에 날개를 달아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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