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때는 지금처럼 가요 시장이 크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총독부가 친일 분위기 조성을 위해 이 시장을 이용할 필요성도 그리 크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가수들 쪽에서는 친일파가 많이 배출되지 않았다. 백년설·반야월·남인수 같은 몇몇 가수만 친일파로 이름을 남겼을 뿐이다.
 
친일파의 숫자가 적은 것은 대중가수 쪽뿐만 아니라 성악가 쪽도 마찬가지였다. 성악에 대한 수요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 식민당국이 전시동원을 위해 이 분야를 활용할 필요성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악 분야에서 친일파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있다. 바로 바리톤 가수, 고종익(1915~1995년)이다. 글을 써서 친일을 하고 강연을 해서 친일을 하고 대중가요를 짓거나 불러서 친일을 하는 친일파 예술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종익은 바리톤 가수의 음성으로 친일 행위에 가담했다. 각양각색으로 친일을 한 수많은 군상 중에서, 그는 비교적 특이한 존재에 속했다.
 
국권 침탈 5년 뒤인 1915년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한 그는 지금의 중학교에 해당하는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도쿄제국음악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18세 때인 1933년 졸업했다.
 
2년 뒤 9월에는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전조선 남녀음악 현상경연대회' 성악부에서 1등 없는 공동 2등상을 받고, 다음달에는 조선일보사 개성지국 후원으로 독창회를 가졌다. 이런 경력을 기반으로 그는 서울(경성부) 무대에 발을 내디뎠다.
 
전쟁 중인 1941년부터 친일파로 본격 활동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는 29일 오전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명단' 3090명을 발표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는 2005년 8월 29일 오전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명단' 3090명을 발표했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고종익은 전쟁 중인 1941년부터 친일파로 본격 활동했다. 그의 친일 공연은 그해 6월 부민관(府民館)에서 있었다. 경성부(府)가 만든 부민관은 지금으로 치면 서울시민회관이다. 서울시청 건너편인 이곳은 오늘날에는 서울시의회 청사로 쓰이고 있다.
 
친일단체인 조선음악협회 주최로 부민관에서 열린 '음악보국(報國)주간 대연주회'에서 그는 초대 일왕(이른바 천황)으로 알려진 진무일왕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다. 제목이 '해도동정(海道東征)'인 이 노래는, 일본인들이 기원전 660년에 즉위했다고 믿는 진무(神武)일왕이 부산 건너편인 규슈섬을 출발해 동쪽의 일본 본토를 정복하는 과정을 찬미하는 작품이다.
 
사실 진무일왕이 한반도와 가까운 규슈섬에서 출발해 동쪽으로 정복해 갔다는 이야기는 일본 문명이 한반도에서 출발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를 거치고 규슈섬을 지나서 일본열도에 전파된 문명의 이동 경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자국 고대 문명이 한반도에서 기원했음을 애써 부정하려 하지만, '해도동정' 같은 노래에서도 그런 진실이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고 있다.
 
물론 <해도동정>은 한반도 문명의 일본 전파를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는 아니다. 일본의 정신을 한국인들에게 주입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진 노래다. 이런 노래를 고종익은 바리톤 음성으로 부르며 식민지 한국인들에게 일본 정신을 퍼트렸다.

월북한 뒤에도 명예로운 삶 이어간 고종익
 
그는 1942년 7월에도 조선음악협회 주최로 열린 부민관 행사에서 일본군국주의를 찬미했다. 일본군의 중국(지나) 침략을 기념하는 '지나사변 기념 음악회'에서 '군신(軍神) 이와사 중좌'와 '흥아행진곡'을 독창했다. 이 노래들에 관해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해설한다.
 
"'군신 이와사 중좌'는 태평양전쟁 때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해군 함정을 특수 잠함정으로 공격하다 전사한 해군 중좌 이와사 나오지를 기리는 곡이고, '흥아 행진곡'은 욱일승천하는 대동아의 위업을 세계에 떨치자는 내용의 곡이다."
 
어쩌다 한번 열리는 행사 때만 친일 노래를 부른 게 아니다. 고종익은 국민가창지도대 일원으로 지방을 순회하기도 했다. 지휘자 1명에 독창 가수 한두 명, 반주자 1명 등으로 편성된 국민가창지도대는 각지를 돌며 군국주의 노래를 전파했다.
 
이처럼 누가 봐도 명백한 친일파였지만, 8·15 해방은 그의 신상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그는 조선음악가동맹 창립에도 가담했다. 남한 땅에서는 친일청산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의 신상이 아무런 영항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주목할 것은, 그가 38도선 이북에서도 부정적 평가를 받지 않고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6·25전쟁) 발발 직후 월북한 뒤로 그는 북에서도 명예로운 삶을 이어갔다.

전쟁 발발 직후, 그는 북한 전선(戰線)경비사령부 협주단의 합창단원이 됐다. 그 뒤 월북해 음악활동을 계속했지만, 친일 경력이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조선예술단 일원이 돼 소련 및 중국으로 해외 공연을 떠난 적도 있을 정도다. 또 1956년부터 6년간은 평양시 인민대의원으로도 활동했다. 이런 활동들에 힘입어 다수의 훈장과 메달도 받았다. 그런 상태로 1995년 8월 5일 80세로 생을 마감했다.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음악 재능 활용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는 29일 오전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명단' 3090명을 발표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는 2005년 8월 29일 오전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명단' 3090명을 발표했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친일청산이 엄격했다. 그런데도 그의 경력은 남한에서뿐 아니라 북한에서도 문제시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행운아일 수도 있었다.
 
북한은 남한보다 2년 빠른 1946년 친일청산에 착수했다. 중앙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1946년 3월 7일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을 공포하고 친일파 처벌에 착수했다. 이 같은 친일청산은 이틀 전인 3월 5일부터 단행된 토지개혁과 더불어, 주로 지주계급인 친일파에게 일대 타격을 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친일 지주 상당수는 토지와 권력을 잃고 38도선을 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로 소작농이었던 일제강점기 하의 피지배층은 토지개혁과 친일청산에 힘입어 토지를 획득하고 자영농으로 올라섰다. '일제강점기 때 어떻게 살았는가'가 1946년 이후 북한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새로운 기준이 됐던 것이다.
 
그런데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이 여기에 중대한 변화를 가했다. 전쟁 중에 북한 땅 대부분이 점령되는 경험을 겪으면서, '전쟁 중에 어떻게 살았는가'가 북한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새로운 기준으로 떠오른 것이다. 정일영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선임연구원의 논문 '한국전쟁 전후 북한 사회계층의 변화 연구(1945-1961)'은 이렇게 설명한다.
 
"해방 이후 사회주의 세력이 주조한 사회계층구조는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경과하며 2차 변환을 겪게 되었다. 전쟁 초기의 역동적 상황 전개는 인민들의 이탈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피점령의 경험은 전선이 38선을 중심으로 안정화된 이후 구성원을 적(敵)과 아(我)로 구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전쟁의 피해를 공유하는 당원과 인민군대 그리고 전사자 가족 등이 김일성을 중심으로 강한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무의식적 충성 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반대로, 피점령 시기 적들에게 동조한 구성원과 월남자 가족 등은 이적 세력으로 규정되어 사회적인 숙청을 통해 고립되었다." - 한국정치학회가 2015년 발행한 <한국정치학회보> 제49집 제2호.
 
'일제 때 어떻게 살았는가'가 평가 기준이었던 북한 사회에서 '전쟁 때 어떻게 살았는가'가 또 다른 평가 기준으로 떠오른 것이다. 전쟁 중에 가족이 월남했는가, 피점령 중에 부역을 했는가가 새로운 기준으로 추가됐다.
 
두 기준이 공존하는 가운데, 아무래도 나중 것에 무게가 더 실릴 수밖에 없었다. 1950년 이후의 북한이 주로 대적한 상대방은 일본이 아니라 미국과 한국이었기 때문이다.
 
고종익은 친일파였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북한에서 환영받기 힘들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계기로 북한 사회의 인간 평가 기준이 바뀌면서, 그는 과거의 친일 경력을 별로 의식할 필요가 없게 됐다.
 
월북 뒤 종군 음악인으로 활동한 그는 1951년부터 3년간 조선음악동맹 연주분과위원으로 활동했다. 북한 정부의 전쟁 수행과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음악 재능을 활용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는 친일 전력을 가진 음악인이 아니라 북한 체제에 기여하는 음악인으로 거듭났다. 그가 다수의 훈장과 메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한국전쟁이라는 뜻밖의 변수가 그에게 그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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