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작의 중심에는 김종규가 있었다. 프로농구 창원 LG가 한때 우승을 꿈꾸는 강팀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이제는 꼴찌를 걱정해야하는 초라한 현실에 내몰린 것도, 모두 김종규의 존재감에서 비롯됐다.

시작은 훈훈했다. 2013년 신인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당시 대학 최대어이던 김종규를 품에 안았을 때 LG는 환호했다. 정상급 토종 빅맨이 사실상 우승의 보증수표로 여겨지는 KBL에서 김종규를 얻었다는 것은 곧 LG가 단숨에 우승후보로 급부상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종규는 "KBL을 뒤집어보겠다"며 패기넘치는 출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김종규를 얻는 과정은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다. 당시 리빌딩 중이던 LG는 플레이오프 진출 가능성이 남아있던 시점에 주축 선수를 트레이드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신인드래프트를 염두에 둔 '탱킹' 의혹에 휩싸였다. KBL은 이 사태 때문에 드래프트 로터리 확률을 챔피언결정전에 올라가는 두 팀을 제외한 모든 팀들에게 동일하게 부여하도록 규정을 개정했지만 시행 시기는 이듬해부터였기 때문에 당시 LG를 비롯한 탱킹 의혹에 휩싸인 구단들은 끝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김종규를 얻은 이후 LG는 승승장구했다. 김종규가 입단하기 전 2시즌간 7위-8위에 그쳤던 LG는 김종규가 가세하자마자 2013-14시즌 일약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비록 울산 현대모비스의 벽에 막혀 챔프전 우승은 실패했지만 LG의 창단 이래 한 시즌 최다승(40승)이자 최초의 정규리그 제패였다. 김종규도 신인왕을 차지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이후로도 비록 부침은 있었지만 김종규는 창원 LG의 기둥으로 건재했다. LG가 매년 6강 이상의 전력으로 평가받을수 있었던 데는 김종규의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김종규는 LG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지난 2018-19시즌에는 데뷔 후 가장 많은 51경기에 출전하여 11.8점, 7.4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을 정규리그 3위, 플레이오프 4강으로 이끌었다. 한 TV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현주엽 감독과 뜻밖의 아기자기한 '갑을 케미'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LG와 김종규의 동행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지난 여름 김종규와 LG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FA 자격을 거머쥔 김종규가 이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LG 구단이 김종규와 타 구단간의 템퍼링 의혹을 제기하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LG 측은 현주엽 감독과 김종규의 통화 내용을 무단으로 녹취한 것을 KBL에 증거로 제출했다. 그러나 KBL 재정위원회는 증거불충분으로 LG의 이의제기를 기각했다. 김종규는 결국 KBL 역대 최대인 12억의 거액에 원주 DB로 이적했다.

김종규의 공백을 메우기는 역부족
 
 김종규가 지난 12일 원주종합체육관에서 열린 2019-2020 현대모비스 프로농구 정규리그 홈 경기에서 패스를 하고 있다.

김종규가 지난 12일 원주종합체육관에서 열린 2019-2020 현대모비스 프로농구 정규리그 홈 경기에서 패스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여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김종규의 몸값이 과도한 것 아니냐는 평가와는 별개로,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무단으로 통화 내용을 녹취한 구단의 행위는 선을 넘은 것이었다. 예능 출연으로 한창 훈훈하고 유쾌한 이미지를 만들어가던 현주엽 감독과 LG 구단의 이미지까지 한순간에 망가졌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애초에 김종규를 영입할 때 노골적으로 탱킹을 저질렀던 구단이 이제와서 템퍼링 의혹을 제기하며 공정성을 운운하는게 '내로남불'-'언어도단'에 불과하는 싸늘한 비아냥만 돌아왔을 뿐이다.

KBL에서 서장훈-오세근-김주성-하승진-함지훈 등 정상급 토종빅맨들은 모두 소속팀을 최소 두 차례 이상 챔피언전 우승으로 이끌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역대 토종빅맨의 계보를 잇는다는 김종규만 유일하게 첫 소속팀에서 챔프전 우승을 경험하지 못한 선수가 됐다. 심지어 LG는 창단 이래 지금까지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있다. 김종규의 이적은 LG의 오랜 염원이던 우승의 희망이 다시 저만큼 멀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하지만 '종규드라마'가 LG에 미친 진정한 후폭풍은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김종규의 이적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던 현주엽 감독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시즌 구상이 기본부터 완전히 헝클어졌다. LG는 부랴부랴 외국인 빅맨 영입으로 골밑을 보강하며 김동량-정희재 등을 영입했으나 김종규의 공백을 메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애초에 LG라는 팀 자체가 김종규를 중심으로 짜여진 팀이었기 때문이다.

현주엽 감독의 계약 마지막 해이기도 한 2019-20시즌, LG는 5연패라는 최악의 출발을 보이며 꼴찌로 추락했다. 개막 5연패는 팀 창단 이래 최초다. 단순히 결과만이 아니라 내용도 최악이다. 개막전이었던 삼성전만 1점차로 석패했을 뿐 최근 3경기에서 15점차 이상의 대패를 거듭했다. 11일 KCC전(59점)과 13일 DB(53점)에서는 2경기 연속 올시즌 프로농구 한경기 최소득점 기록을 경신하는 굴욕을 당했다.

반면 김종규는 이적 이후 본인도 소속팀도 상승세다. DB는 김종규 영입 효과를 톡톡히 누리며 4연승 무패행진으로 초반부터 단독 선두에 등극했다. 공교롭게도 김종규의 이적 후 첫 창원 원정이었던 지난 13일 경기는 김종규와 LG의 엇갈린 현 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 경기였다.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6년이나 한솥밥을 먹었던 사이였건만 양측의 분위기는 냉랭함 그 자체였다. 김종규가 볼을 잡거나 슛을 실패하면 관중석에서 야유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김종규는 흔들리지 않았다. 드러내놓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지만 평소보다 더 악착같은 집중력을 가지고 경기에 임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김종규는 17점-10리바운드로 더블-더블을 기록하며 친정팀을 5연패로 몰아넣는데 기여했다. 현주엽 감독을 박인태를 김종규의 마크맨으로 붙여서 견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김종규가 없는 LG는 보여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보인다. 현주엽 감독은 '(김)시래만 잘하면 된다'며 김시래를 팀의 중심으로 지목했다. 그런데 김시래가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팀 성적은 신통치 않다. 김시래는 좋은 가드지만 그는 우수한 동료들과 함께 뛸 때 더 빛이 나는 스타일이지 스스로 한 팀을 이끌어갈만한 유형의 에이스는 아니다. 강병현-조성민은 이름값에 비하여 전성기가 지났고 버논 맥클린-김동량-정희재 등은 극심한 슬럼프에 빠져있다. 현재 팀내에서 두 자릿수 득점을 올려줄수 있는 선수가 캐디 라렌과 김시래 밖에 없다.

지난 시즌의 제임스 메이스처럼 위기 상황에서 일대일로 해결해줄 수 있는 선수도, 김종규처럼 안정적으로 골밑을 사수하고 상대 수비를 분산시켜줄 토종빅맨도 없다보니, LG는 김시래를 중심으로 한 2 대 2 게임 외에는 할 수 있는 플레이가 많지 않다. 더구나 이런 뻔한 전술 패턴은 상대 팀들에게 쉽게 파악당하는 데다, 현주엽 감독은 갑작스럽게 전술에 변화를 줄 수 있을 만큼 임기응변에 강한 스타일도 아니다. 

LG 입장에서 더욱 두려운 것은 현재보다 미래다. 첫 승을 신고하지도 못했는데 팀 전력에는 별다른 반등요소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창단 최악의 시즌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인연에서 시작하여 악연으로 끝난 '종규드라마'가 LG에 가져온 씁쓸한 나비효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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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규 인과응보 나비효과 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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