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는 영화 <조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조커>(2019) 한 장면

영화 <조커>(2019)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꿈은 있지만 현실의 속박이 너무 커 시궁창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조커>(2019)에서 묘사된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전형적으로 그런 인물이다.

코미디언이 되고 싶지만 늙은 어머니를 부양하며 시급한 생계를 책임져야 하고, 생활의 빠듯함은 당장 무엇이든 하게 만든다. 사람들에게 값싼 웃음을 팔지언정 광대 일을 선택한 그의 모습에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자신의 가치를 고수하겠다는 의연한 다짐이 느껴진다. 허나 영화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듯, '아서 플렉'에게도, '꿈꾸는 이들'에게도 세상은 결코 관대하지 않다.

홀로 터트리는 웃음의 진짜 이유

아서 플렉은 조커로 각성하기 직전까지 맥락도 없이 틈만 나면 웃어대는 자신의 증상을 질병인 줄로 알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깨닫게 된다. 그것은 질병이 아니라 정말로 우스꽝스러운 일을 당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폭소라는 걸. 극중에서 그가 폭소를 터트리는 장면은 항상 아서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거나, 멸시 혹은 조롱을 받았거나, 혹은 그럼에도 삶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이다. 즉, 그의 웃음은 발작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시궁창 같은 인생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세상의 처절한 멸시 속에서 탄생한다. 그러므로 질병으로 분류될 만큼 무수한 실소를 뿜은 그의 인생을 돌아보면 그가 얼마나 차가운 멸시 속에서 살아왔는지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남들이 웃을 때 정색하고, 남들이 정색할 때 웃는 그의 모습(특히 클럽에서 농담을 듣는 장면)은 타인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자신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그는 언제나 남들보다 한 박자 늦게 웃는다. (아서를 경멸하며) 남들이 먼저 웃은 뒤에 웃음거리가 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웃기 때문이다.     

그가 터트리는 웃음의 진짜 원인은 극 초반부 버스 안에서 아이를 즐겁게 해주고도 되레 욕을 먹는 장면에서 명징하게 드러난다. 가만히 있어도 벌레 취급을 당하지만 좋은 일을 하고도 질타와 비난을 받는다. 악행을 저지르면 '그럼 네가 그렇지'라고 할 게 뻔하다. 그럼 한 인간으로서 대체 뭘 하란 말인가? 과연 실소가 나오지 않으면 이상한 상황이다.     

아서 플렉을 옥죄는 가장 큰 고통은 존재 가치의 부정이다. 그는 그가 가진 외양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부정당하지만 그 자신의 근원인 가족으로부터도 부정을 겪는다. 아버지로부터도, 심지어 어머니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한 존재. 믿었던 어머니마저도 자신을 부정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아서는 어김없이 폭소를 터뜨린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어머니를 위해 애써왔던 자신이 너무도 우스웠던 것이다.      
 
"내 인생은 코미디예요."     

존재하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아서 플렉의 인생은 그야말로 말장난 같다. 그가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던 것은 그야말로 자기 자신(농담 같은 인생)을 사람들에게 던져볼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자신의 인생을 가장 웃기다고 말하는 그에게 사실 재밌는 농담이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조커>(2019) 한 장면

영화 <조커>(2019)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코리아(주)

 
세상은 밀쳐낼 뿐만 아니라 즐거워 한다   

아서가 조커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지하철 살인사건이다. 그가 아직까지는 꿈을 안고 살아갈 때, 그는 세상을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 평소처럼 살았을 뿐이지만 남들보다 더 가혹하게 적용되는 오해와 의혹은 그의 생계마저 빼앗는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종종 방영되던 뉴스의 '시궁창 쥐가 창궐하고 있어 박멸해야 한다'는 내용은 고담시민들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그런 시민들이 '부적절한 삶'을 살고 있고, '바른 삶'으로 인도해야한다는 그들의 엘리트주의적 시선이 그대로 투영돼 있다. 그런데 바르게 살아보아야 무엇 하는가? 아서처럼 선량한 마음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든 결론은 늘 한결같다. 상종 못할 쓰레기라는 것이다. 어차피 그들이 어떻게 살게 되든 관심도 없다. 무료상담소의 직원이 던지는 말처럼 말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상류층은 사람들을 벌레 취급하면서도 정작 그들이 말하는 '계도'를 실천하지도 않는다. 그저 영원히 분리되면서 군림하고, 말뿐인 대책을 내놓으면서 위선적인 품위를 가지려고 애쓴다. 그것은 마치 두 발로 뛰어서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경계를 만들어놓고 뒤쳐진 사람들이 우스꽝스럽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사람답게'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 낄낄대며 웃는 것과 같다.

아서가 토마스를 찾아 잠입한 극장에서 상류층 사람들이 보는 무성영화 내용이 딱 그러하다. 구멍이 휑하니 뚫린 바닥 경계면을 배우가 아슬아슬하게 반복해서 스칠 때마다 상류층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린다. 함께 웃는 아서는 영화가 우스워서 웃는 게 아니라 그런 고약한 취미를 가진 상류층 인간들의 행태가 웃긴 것이다.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인데도 나락으로 몰아내는 세상. 그 중심에 있었던 아서는 극단에서 쫓겨난 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여자에게 시비를 거는 남자 셋을 발견한다. 아서는 그 모습을 보며 마치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당하며 사는 자신의 '코미디 같은 인생'을 보는 듯 폭소를 터뜨린다. 그런데 여기서도 사실 놓고 보면 아서의 행동이 이상할지언정 괴롭힘 당하거나 죽도록 맞을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남자 셋은 어김없이 아서에게 다가와 무자비한 폭력을 가한다.

여느때 같았으면 그는 그저 맞으며 버텼겠지만, 이때 아서에게는 애써 자신을 망치려 드는 세상의 방식을 거부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응축돼 있었다. 모든 순응에도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신이라면, 세상에게 내밀 수 있는 답은 한 가지다. 바로 'No'다.  

아서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남자들을 죽인 것은 아니다. 그저 마지막 방법을 선택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하필 그것이 부유하고 젊은 상류층이었고, 그저 상류층들이 규정하는 삶에 아무런 대꾸도 못한 채 살아가던 고담 시의 또 다른 조커들을 깨우기에 이른다. 여기서 아서는 인생의 모든 것, 심지어 꿈마저도 빼앗긴 상태에서 No라고 외칠 가능성만을 발견한 상태지만, 그 하나의 행동이 본래 자기가 꿈꾸던 일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을 본다. 광대가 되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이나, 세상에 정면으로 대적해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도 결국은 같은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세상의 방식을 거절했던 광대의 탈을 자신의 얼굴로 삼기로 맘먹는다.
 
 영화 <조커>(2019) 한 장면

영화 <조커>(2019)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조커의 탄생     

아서가 좋아하는 농담은 <캐치 미 이프 유 캔>(2002)에 등장하는 형사 칼(톰 행크스)이 즐겨하는 것이기도 하다.
 
"뭐 좀 물읍시다. 핸래티 요원. 매사에 원래 그렇게 심각합니까?"
"그래서 불편합니까? 앰더스키씨?"
"좀 그렇죠."
"그럼 재밌는 이야기(조크) 해줄까요?"
"그거 좋네요."
"낙, 낙(똑똑)"
"누구십니까?"
"가서 X이나 쳐 드세요"

 <캐치 미 이프 유 캔>(2002)     

이 대화가 웃긴 이유는 그럴싸한 농담이 튀어나올 것을 예상하던 이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데 있다. 조커가 머레이 쇼에 나가서 '예상을 뒤엎는' 행동을 하는 것 역시 같은 이치다. 그는 깨달은 것이다. 세상을 조롱하는 방법을 말이다.

조커가 처음 자기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고 보여주는 것이 춤이다. 춤은 인간의 자유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특히 계단에서 춤을 추며 내려오는 장면은 그 자신의 자유를 탐닉하기 위해 밝은 세계에서 지하로 내려온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굳이 나를 괴롭히는 세상이 가르치는 방식쯤은 무시해도 좋은 것 아닐까?

조커는 소위 '바람직한 삶'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는 형사들을 바로 앞에 놓인 범인도 잡지 못하는 바보로 만들어버린다. 보란 듯 군중들에게 매 맞는 경찰을 보면서 조롱하고 경찰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는 조커는 세계를 조롱하는 완벽한 방법을 터득한다.

조커가 추구하는 것은 그의 인생을 코미디로 만든 세상을 역으로 우습게 만드는 것이다. 방법이 달라졌을 뿐, 그가 추구하는 것은 한결같다. 그래서 때로 그는 광기어린 악행을 행하지만 무자비하지 않다. 예컨대 그의 옛 극단 동료를 살해할 때, 드미트리만은 문까지 열어 배웅해주는 장면이 그러하다.     

조커의 광기는 자신을 블랙코미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린 세계를 우습게 만들겠다는 신념에 집중돼 있을 뿐, 사이코패스처럼 무자비하게 악행을 일삼지는 않는다. 과대망상증에 빠진 미친 나르시스트이지만 그의 행보가 악해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가 맨몸으로 더 커다란 악에 대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내심 그의 광기가 세계를 절망으로 이끄는 절대자들의 조롱을 부수길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황경민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이곳저곳에서 영화 관련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영화의 의미를 읽어드리겠습니다.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