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2019 부산국제영화제

2019 부산국제영화제 ⓒ 부산국제영화제


01.

시리아 내전의 참상을 카메라에 옮겨 담고 그 엄혹한 환경 속에서 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민간 구조대 '화이트 헬멧'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알레포의 마지막 사람들>. 페라스 파야드 감독은 이 작품으로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바 있다. 다시 한번 시리아의 참상을 들여다 보기로 한 감독이 주목한 곳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의 동부에 위치한 구타 지역. 정부군과 러시아군에 포위되어 지속적으로 폭격을 당하는 이 지역에서 목숨을 걸고 부상자들을 돌보는 이들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쏟아지는 폭격을 피해 지하에 마련된 이 병원의 이름은 '케이브'. 이 작품의 중심 인물인 의사 아마니와 그의 동료들 역시 이곳에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시리아 독재정권 군부와 러시아군에 포위된 이 지역은 의약품과 식료품 등의 물품이 부족한 것은 물론, 계속되는 폭격과 피해로 인해 실제로 크게 다친 곳이 없는데도 통증을 호소하는 이들로 가득 차 있다. 멈추지 않는 상흔의 트라우마 탓이다. 병원에 실려온 이들의 가족 모두가 죽거나 다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150명이 넘는 직원들이 한 끼에 쌀 5kg을 나눠 먹어야 할 정도이며, 마취제 대신 클래식 음악을 들어야 할 때도 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쏟아내는 폭격에 병원에 실려오는 환자의 종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아마니와 동료들이 버티고 있는 이곳 '케이브'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지상을 피해 만들어진, 미약한 희망이나마 가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최후의 보루나 다름없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케이브> 스틸컷

다큐멘터리 영화 <케이브>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2.

남들처럼 단순한 동기로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의사 아마니는 이 곳 케이브에 도착해 현장의 참혹한 광경을 지켜보고 경험하는 동안에 많은 것들이 변했다고 말한다. 이 직업은 어느새 분노를 표출하는 직업이 되고 말았고, 자신이 속해있는 세상의 구조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제대로 된 처치 도구도 주어지지 않는 환경 속에서 힘든 삶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는 하지만 정직한 삶이기에 이 길을 따라 근원적인 문제를 찾아 변화시키길 바라는 그녀다.

하지만 일상에서 부딪히는 많은 부분이 그녀의 그런 마음을 무너뜨린다. 두려움을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드는 폭격기의 굉음과 울부짖으며 병원으로 뛰어들어오는 환자, 그리고 가족들. 특히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 고통스럽다. 뿐만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운운하며 여자는 집에서 가정일이나 해야한다는 몰상식한 지역 남성들의 잣대까지. 시시각각 조여오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그녀를 무너지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실제 폭격이 이루어지고 지하 병원으로 부상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날에는 그들이 믿는 신 알라가 정말 세상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03.

다큐멘터리가 진행될수록 상황은 점차 악화되고 케이브의 의료진들은 점차 더욱 큰 무력감을 느끼게 되지만, 일부러라도 조금 더 웃으며 아직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장미빛 희망을 하나씩 꺼내는 모습도 모인다. 평화가 찾아오면 리프팅 시술을 통해 쳐진 얼굴을 시술 받는다든가 혹은 교정을 통해 치열을 바르게 만든다든가. 물론 지금의 상황에서는 조금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수술을 집도하는 중에는 클래식 음악이 꺼지지 않는 모습도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데, 이들의 이런 장면들은 모두가 '여유'가 아닌 '절박함'처럼 다가온다.

유일하게 행복한 장면으로 기억되는 의사 아마니의 30번째 생일 파티, 옥수수를 튀긴 팝콘을 놓고 겨우 이루어지는 이 장면에서조차 서로를 감정적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인다. 내전이 일어나고 케이브가 운영되기 시작한지도 벌써 5년. 아마니의 올해 나이가 30살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녀가 이 지옥과도 같은 현실에 처음 발을 들이던 게 26살이라는 소리가 되지 않나. 현실을 감당하기에 결코 충분한 나이가 아니었을 것임을 그 이면을 통해 우리는 알 수가 있다. '널 이런 세상에서 살게 해서 미안하다'는 아마니 아버지의 말은 이 모든 상황을 함축해 전달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케이브> 스틸컷

다큐멘터리 영화 <케이브>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4.

처음에 다짐했던 것과는 달리, 변화는 커녕 현재를 유지하는 일도 급급하기만 하다. 아니, 그 일이나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의심하게 된다. 병원에 실려오는 아이들은 먹을 게 없어 영양실조가 걸리고, 영양 회복을 위해 처방되는 비타민은 환자 본인이 아닌 가족 구성원 모두가 나눠 먹어야 할 지경인데도 다음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는 이유로 밥을 삼켜야 하는 것도 여기 케이브에 모인 의사들에게는 죄스럽게만 여겨진다.

무엇보다 그렇게 노력하고도 더 이상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에 커다란 무력함을 느끼는 의료진. 이때부터 시리아 정부와 러시아군은 병원이 위치한 지점을 향해 미사일이 아닌 화학무기로 공격을 감행해 오기 시작한다. 방벽을 쌓고 지하로 숨으면 어느 정도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미사일과 달리, 갈 곳이 없이 포위된 상황에서는 피하는 것조차 용이하지 않은 화학무기. 이번에도 약한 아이들이 가장 먼저 쓰러지기 시작하고, 이제는 정말 막다른 골목에서 아마니와 그의 의사 동료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어째서 죽이는 일은 살리는 일보다 쉬운 걸까.

05.

폭격 중에 다친 아들을 찾아 병원으로 달려온 어머니가 자신의 몸 상태는 어떤지도 모르고 목을 놓아 아들을 부르는 장면이나, 폭격으로 인해 자신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지금 곁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담담하게 이어가는 한 소녀의 이야기. 이들 모두를 살리기 위해 이 엄한 지역까지 들어와 헌신 중인 의사 살람이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의 가족들과 나누는 대화와 같은 장면들이 이 작품을 입체화 시키며 내전의 참혹함을 극대화하는 요소로 활용된다.

아마니와 의사 동료들은 이 곳 케이지에서 5년이 넘는 시간을 버티고 견디면서 1000명이 넘는 부상자들을 생존시켰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정부군과 러시아군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케이지가 있는 이 곳 구타 지역을 떠나게 되고 말지만, 그 누가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비난의 목소리를 보낼 수 있을까. 영국에 본부를 둔 시리아내전 감시단체 시리아인권관측소의 집계에 따르면 내전이 시작된 2011년부터 2018년 9월까지 총 36만 4792명이 사망했으며, 생화학 무기 사린 가스로 인한 사망자는 2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부산국제영화제 BIFF 시리아내전 케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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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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