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자> 포스터

<신문기자> 포스터 ⓒ (주)팝엔터테인먼트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권 유지에만 열을 올리는 아베 정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일본 사회에서도 나오고 있다. 오는 17일 개봉을 앞둔 영화 <신문기자>가 대표적이다. 영화는 아베 정부의 부끄러운 민낯에 대해 꾸준히 고발해 온 일본 언론의 상징 모치즈키 이소코 기자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신문기자>는 '도쿄 신문' 사회부 모치즈키 이소코 기자가 집요하게 파고 들었던 아베 정권의 사학 스캔들과 '미투 운동'의 시발점이 된 이토 시오리 사건 두 가지를 다루고 있다. 그는 2017년 6월 8일 정례 회의에서 아베 정권의 2인자이자 대변인 역할을 하는 스가 요시히데 관방 장관에게 40분 동안 23회에 걸쳐 이 두 사건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당시 언론의 비판 기능이 약해지고 있었던 일본 사회에서 이소코 기자는 '일본 언론의 상징'으로 각인되었다.
 
 <신문기자> 스틸컷

<신문기자> 스틸컷 ⓒ (주)팝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이 두 가지 사건을 결합시켜 일본 사회가 지닌 집단주의의 문제점과 정언유착 때문에 비판의 목소리를 잃은 언론을 꼬집는다. 사회부 기자 요시오카(심은경 분)는 모든 신문사 지면에 똑같은 기사가 실린 걸 보게 된다. 장관과 여의원의 스캔들 기사였다. 요시오카는 이를 보고 정부 차원에서 자료를 뿌린 걸 알게 되고, 이 스캔들을 통해 감춰야만 되는 사건이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신문사에는 검은 눈을 가진 기괴한 양 그림이 표지에 그려진 문서가 팩스로 도착한다. 익명으로 도착한 문서의 내용은 문부과학성이 아닌, 내각이 직접 대학 신설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으로 요시오카는 이 사건을 취재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그녀가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정부로부터 외압이 가해진다. 그런 그녀 앞에 내각정보실에 속한 정보실 관료 스기하라(마츠자카 토리 분)가 나타난다.
 
외무성에서 일하다 정보실로 오게 된 스기하라는 상부의 지시로 정치인들의 뒷조사를 하고 트위터 계정을 통해 가짜뉴스를 올리고 여론을 조작한다. 그는 고위직 관료들을 보호하고 국가가 추진하는 정책을 이행하기 위한 일이라는 생각에 아무런 감정과 생각 없이 업무를 이행한다. 그러던 중 여기자 성폭행 사건이 총리실의 외압으로 기소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는 기자회견을 연다.
  
 <신문기자> 스틸컷

<신문기자> 스틸컷 ⓒ (주)팝엔터테인먼트

 
피해자를 야당 의원과 엮어 정치 공작으로 만들라는 상부의 명령에 스기하라는 처음으로 자신이 하는 일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에 대해 의문을 느낀다. 이 의문은 존경하는 선배 칸자키(다카하시 카즈야 분)의 자살로 더욱 깊어진다. 칸자키가 궁지에 몰리게 된 이유가 자신이 일하는 내각정보실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스기하라는 정보기관과 언론의 담합으로 인한 여론조작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그는 칸자키의 장례식에서 양심적인 기자 요시오카를 만나게 되고 혹시 그녀라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실을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된다.
 
일본 현 정권에서 벌어진 정치 스캔들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일본 최고의 문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6월 143개라는 열악한 상영관 수로 시작해 흥행수익 4억 엔(한화 약 45억 원)을 돌파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그만큼 현재 일본 사회가 직면한 문제와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지녀야 되는 긍지를 보여주며 공감을 일으키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작품은 크게 세 가지 소재를 통해 국가와 저널리즘의 이면을 날카롭게 조명한다.
 
첫 번째는 SNS다. 요시오카는 현 정권에서 벌어지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싶어 하지만 외부의 압력에 의해 기사화 하지 못한다. 열심히 기사를 써도 지면 뒤편의 모서리 자리에 위치하는 현실에 좌절을 느낀다. 이에 요시오카가 진실과 목소리를 내기 위해 이용하는 건 SNS다. 트위터를 이용해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요시오카의 모습은 국가의 통제와 억압 속에서도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런 SNS가 여론조작의 장치로 사용된다는 점은 씁쓸함을 안겨준다. 스기하라는 자신과 같은 직원들이 트위터를 통해 가짜뉴스를 유포하고 여론조작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공포를 느낀다. 그들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과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2차 대전 당시 "나는 국가에 소속된 공무원으로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아이히만의 말처럼 이들은 몇 자의 글이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지 생각하지 않으면서 국가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짓밟고 고통을 주는 행위를 반복한다.
 
두 번째는 집단주의다. 작품은 요시오카는 한 인터넷 시사방송을 보는 모습을 보여주며 저널리즘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의견을 그들의 입을 통해 대신한다. 이 시사방송에서 패널들은 일본의 집단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본 사회는 집단주의가 강하고 이 집단의 공격에 개인은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피력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이는 국가차원에서 미디어를 이용해 여론을 조작한다면 개인은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연약한 개인의 편에 서기보다 강한 집단에 속하기를 바라는 이 습성은 국가라는 거대한 집단과 이 집단의 뜻에 따르는 미디어의 폭력에 진실이 묻힐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요시오카와 스기하라 역시 이런 순간에 직면한다. 요시오카에게는 진실을 밝히려 노력했지만 집단에 의해 오보를 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자살한 아버지가 있다. 스기하라는 평생 조직에 충성했지만 그 조직에 배신당하고 미디어에 난도질당해 자살을 택한 칸자키를 목격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진실을 밝히려는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협박에 두려움을 느낀다. 실제 모치즈키 이소코 기자는 지난 몇 년간 민주주의를 짓밟는 국가의 불합리에도 불구 이를 묵인하는 관료들을 목격했다. 이를 통해 영화는 집단에서 벗어난다는 점에 두려움을 느끼고 집단과 맞서는 행위에 공포를 느끼는 일본인의 성향을 통해 보여준다.
  
 <신문기자> 스틸컷

<신문기자> 스틸컷 ⓒ (주)팝엔터테인먼트

 
세 번째는 희망이다. 이 희망은 '고질라' 시리즈에서 두 번째로 인간이 고질라를 이긴 모습을 보여준 <신 고질라>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이 작품은 고질라의 등장 앞에 무능한 관료들의 대처로 도시가 위기에 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젊은 관료들의 힘으로 고질라의 위협을 이겨냄으로 일본 사회의 변화의 가능성을 그려낸다. <신문기자> 역시 요시오카와 스기하라를 통해 변화와 미래를 그려낸다.
 
두 사람은 모두 조직에서 젊은 층이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각과 사유를 지니고 있다. 특히 요시오카가 진실을 찾기 위해 취재를 반복하며 동료들과 부장 진노의 마음을 바꾸는 지점은 젊은 세대를 통한 변화의 희망을 보여준다. 이런 변화는 스기하라의 아이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스기하라가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하는 지점에서 아기를 안는 장면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노력이 현 세대가 미래 세대를 위해 해야 되는 일임을 보여준다.
 
<신문기자>는 정부 권력과 미디어의 변화만을 촉구하는 작품이 아니다. 영화는 요시오카의 아버지가 쓴 글귀를 연달아 보여주며 주제의식을 강화한다. '자신을 믿고 의심하라'는 이 문구는 자신이 믿는 것에 신념과 의지가 있는지, 또 이 신념과 의지가 과연 올바른 방향을 지닌 진실인지 생각해 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는 현재의 일본을 바꿀 수 있는 존재는 정권의 내부고발자나 기자가 아닌 국민임을 보여준다.
 
민주주의의 주인은 국민이고 국가를 이끌 주인을 세우는 것도 국민의 몫이다. 국민이 변하지 않으면 국가는 바뀌지 않는다. 모치즈키 이소코는 "보도의 자유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서 누구도 묻지 않는다면 내가 물을 수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국민의 주인 된 권리가 망가질 때 이를 회복시키고 되찾을 수 있는 건 나 자신, 즉 국민이다. 작품은 이 당연한 긍지를 깊은 울림으로 전해주며 현재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를 강조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준모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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