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서울문화재단

 
같은 상황을 겪어도, 서로 다른 기억이 남는다. 우리들이 그렇다. 서로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강한 자극만 기억해, 인상에 남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같은 작품을 보고 나온 선후배와의 이야기 속에서도 다른 시각과 생각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다른 기억을 형성한다. 과연 우리가 바라본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시간이 흐른 뒤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기억에 대해 재고하게 한다. 학창시절, 동급생 영훈을 살해한 남자와, 남자의 연인이었던 여자. 복역 후 15년 만에 출소한 남자는 '우주알 이야기'라는 책을 써 여자가 일하는 출판사로 보내고, 여자는 남자를 찾는다. 영훈의 엄마는 남자와 여자의 곁을 맴돈다.
 
스토리 라인은 명확하지만, 작품을 마주하는 순서는 순차적이지 않다. 파편난 유리처럼, 흩어진 퍼즐처럼, 조각조각 흩어져 있다. 찢어진 책을 마구 붙여 읽는 듯, 장면이 툭툭 튀어나오고 대사와 사건이 톡톡 튄다.
 
남: 처음이라는 개념을 버려야 해
여: 우주에는 시작이 있잖아
남: 우주에는 시작이 없어. 하나의 덩어리일 뿐이야.
여: 내가 말하는 시작은 시간 적인 거야. 공간 적인 게 아니라
남: 우리들한테 시간과 공간은 그렇게 분리된 개념이 아니야. 시공간 연속체 바깥에는 시간이 없어.
 

 
우주와 행성을 연상케 하는 둥그런 두 개의 무대가 마치 공전하는 듯하다. 배우들의 몸짓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유연하지만, 물처럼 어느 틀에 갇혔다가 다시 벗어나기를 반복한다.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회전하는 인물들의 움직임은 행성처럼 묘하다. 그러면서 시공간 연속체 바깥에 있는 듯하다. 시공간을 벗어난 듯, 산산 조각난 장면 장면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남자의 기억인지, 흩어진 책을 마구잡이로 주워서 스테이플러로 쿡 찝어 읽는 건지, 아리송하다.
 
하지만 감정 라인은 이어진다. 남자가 학교를 그만두자 말수가 줄어든 여자, 다시 만나 서로에 관해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놓는 남녀, 동급생 살인을 떠올리는 남자, 남자를 가슴으로 낳았다며 자꾸만 쫓아다니는 영훈의 엄마. 그리고 남자가 늘어놓는 자신의 미래 모습까지. 그믐날, 우주알을 만나고 과거와 미래를 느낄 수 있게 된 남자의 이야기는 마냥 터무니없지 않다.
 
앞으로만 흐르는 시간을 뒤집는다고 해서 아름다운 게 아니다. 시공간을 벗어난다고 해서 시간이 멈추지는 않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서로 다른 추억들 역시, 지금의 우리를 감싸고 있기애 알게 모르게 '내'가 되고, '우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제20회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한 장강명의 동명소설을 각색해 작년 9월에 초연됐다. 제 55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선정, 월간 한국연극공연 베스트7 선정 등 주요상을 휩쓸었다. 김석주, 김문희, 유은숙, 신소영, 최태용, 윤민웅, 김정아가 출연하며 10월 27일까지 남산예술센터드라마센터에서 공연된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포스터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포스터 ⓒ 서울문화재단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장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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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전문 프리랜서 기자입니다. 연극, 뮤지컬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 전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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