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호는 호랑에게 묻는다. "호랑아, 너는 결혼이 왜 하고 싶어?"

호랑은 "이제 옷장 열면 나도 모르게 안 튀는 색 옷만 집게 된다. 어딜 가도 튈 일이 없잖아. 그래서 좋아"라고 답하며 엄마 친구 중에 성공한 아줌마 이야기를 한다.

"어디 놀러갈 때 그 아줌마만 쏙 빼놓고 간다. 그 아줌마가 빨간 코트거든. 일하느라 바빠서 결혼을 안 했대. 난 남들처럼 똑같이 평범하게 살고 싶어. 그런 까만 코트만 입고 싶어 이제. 남들처럼 섞여 있어도 튀지 않고 똑같은 사람. 남들이랑 같이 웃고 같이 우는 거. 결혼은 나한테 너도 남들만큼 괜찮다 여자로서 가치가 있다 이야기해주는 까만 코트야."

2017년 방영된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사다. 마흔 넘어서까지 비혼으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가장 공감이 된 대사였다. 솔직히 고백하면, 난 '결혼'에 대해 오랫동안 자유롭지 못했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끼지 못하고 평범한 삶에서 벗어났다는 불안감이 작용한 탓이다.

평범하게 보지 않는 시선과 질문들 속에서 주눅이 들기도 했다. '당연하게' 결혼했을 것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짐작해 놓고, "저 결혼 안 했는데요"라고 했을 때 '갑분싸'되는 상황에서 '이 분위기 어쩔 거냐' 하며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이야 당연히 존중되는 분위기여서 다행이다만.
 
"아이 아빠가 없어도 아이 있을 수 있잖아요"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한 장면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한 장면ⓒ KBS

 
요즘 입소문을 타고 뜨기 시작한 KBS 2TV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보며, 갑자기 과거가 소환되었다. 동백(공효진)이 마을에 등장했을 때, 남자들은 미모가 장난 아닌 동백을 여신 바라보듯 하고 아주머니들은 잔뜩 경계의 눈빛으로 마음속 사이렌을 울린다. 그러다 그녀가 차에서 유모차를 내리는 순간, 남자들은 실망의 한숨을, 여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자꾸 아이 아버지가 당연히 있을 거라는 전제하에 말을 건다. 동백이 미혼모임을 커밍아웃하자,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을 마주한 것처럼 놀란다. 그때 동백이 말한다.

"아이 아빠가 없어도 아이 있을 수 있잖아요."
아. 난 이 대사 한마디로 이 드라마에 꽂히고 말았다.
 
동백이 미혼모임을 커밍아웃하자마자 다시 경계의 눈빛이 화르륵 살아난다. 정작 동백은 남자들에게 관심이 없는데 말이다.

내 경우에 비혼이어서 들었던 말 중 "결혼 안 한 여자는 기혼 여성들에게 '공공의 적'"이라는 말이 가장 억울하고 모욕적이었다. 유부남이 바람을 피우는 대상이 비혼 여성이라는 전제가 된 말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결혼은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항상 설명이 필요했다. 동백이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있었더라면 받지 않았을 시선과 질문들이 동백에게는 쏟아진다.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다른' 눈치와 노력까지 필요하다.
 
생존을 위해 동백이 선택한 방법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한 장면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한 장면ⓒ KBS


동백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방법은 쥐 죽은 듯 사는 삶이다. 어수룩해 보이지만 무례한 사람에게는 얄짤없다. 또 하나, 동백은 세상이 주구장창 불친절해도 다정함을 잃지 않는 태도를 견지한다. 마냥 착해 보이는 이면에 단단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도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날파리 같은 남자들은 계속 들러붙고,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술집 주인으로서의 현실은 냉혹하다. '까불이'라는 연쇄살인마만큼이나 동백의 삶을 위협하는 것들은 현실에 널려 있는 셈이다. 지난주(5회~8회)에는 엄마 때문에 일찍 철이 든 아들과 갑자기 나타난 아이 아빠(김지석), 동백에게 꽂혀서 무대포로 직진하는 황용식(강하늘)으로 인해 다시 구설수에 오른 동백의 고단함과 서러움이 폭발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때 동백을 무조건적으로 좋아하는 황용식이 동백에게 왜 우냐고 묻는다. 동백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 쪽팔려서 운다고 답한다. 고아로, 미혼모로 사는 고단함. 쨍하게 살고 싶은데 세상은 자신에게 야박하기만 하고 자꾸 망신만 준다며 서러워한다. 그런 동백에게 황용식은 자신의 스타일로 위로한다. 사람들은 동백을 박복하다고 할지 몰라도 사실 빡세게 운 좋은 거라고. 동백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이자 그동안 생각지 못한 관점이다.

"고아에 미혼모가 필구를 혼자서 저렇게 잘 키우고 자영업 사장님까지 되었어요. 남 탓 안하고요, 치사하게 안 살고 그 와중에 남보다도 착하고 더 착실하게 살아가는 거. 그거 다 우러러보고 박수 쳐줘야 할 거 아니에요?"

동백은 태어나서 처음 받는 칭찬이었다.

"남들 같았으면은요, 진작에 나사 빠졌어요. 근데 누가 너를 욕해요. 동백씨 이 동네에서 젤루 세고요. 젤루 강하고 젤루 훌륭하고 젤루 장해요. 내가 매일 매일 이 맹한 동백 씨 안 까먹게요. 당신 얼마나 훌륭한지 내가 말해줄게요."

이 말은 편견에 갇혀 살던 동백을 깨우는 스위치가 되었다. 지금까지 조심조심 사느라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자신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동백의 대사 하나 하나에 마음이 따끔거렸다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한 장면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한 장면ⓒ KBS


"언니. 정말 열심히 사셨군요."

얼마 전, 내가 낸 책 <혼자 살면 어때요 좋으면 그만이지>를 읽고 누군가 리뷰에 쓴 글이다. 어느 카페에서 그 리뷰를 읽는 순간,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훅 나와 버렸다. 날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해 그렇게 알아주는 것만 해도 마음에서 소용돌이가 일었다.

비혼으로서도 작가로서도 나는 그다지 떳떳하지 못했다. 동백이처럼 스스로가 쪽팔렸다. 그래서 어서 빨간 코트를 벗고 싶었고, 잘 나가는 작가로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쨍하고 살고 싶었는데 현실은 대체로 구질구질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누군가는 실패가 밑거름이 된다고 하더라만, 그건 성공을 했을 때의 이야기일 뿐 실패가 일상이 되면 쪽팔린다. 그래서일까. 열심히 사는데 세상은 야박하기만 하다는 동백의 대사 하나 하나에 마음이 따끔거렸다.

별 볼 일 없게 나이만 들어가는 게 고단하고 서러웠던 차에, 쪽팔리다 여긴 비혼의 삶을 '비혼일기'로 연재했고, 그것이 책으로 나오기까지 했다. 책 하나 내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냐만, 나에게는 '당신 장해요' 같은 위로였다. 게다가 내가 얼마나 강하고 잘 살아왔는지를 일깨워주는 말들을 푸짐하게 듣기까지 했다. 나를 알아주고 읽어주는 말들은 내가 갇혀 있었던 틀을 깰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내 마음 속 어떤 스위치를 눌러주었던 것이다.

여전히 나는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불안한 프리랜서 작가다. 염려를 붙들고 사는 소심함도 그대로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구질구질하다거나 서럽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계속 입고 있는 빨간 코트도 마음에 든다. 누군가 결혼에 대해 물어봐서 "비혼인데요"하면 여지없이 분위기가 싸해지지만 '그러게 그런 걸 왜 묻죠? 이 분위기에 대한 책임은 당신이 져야 하고요' 하며 수습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이런 거 쓰면 욕 먹지 않을까?' '잘 못 쓰면 어떡하지?'하는 생각보다 욕 먹더라도, 못 쓰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고 한다.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한번 해보지 뭐. 하는 배짱도 생겼다. 예전 같으면 튀는 게 싫어서 숨 죽이고만 있었을 텐데 말이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내 삶의 결을 객관적으로 깊이 살필 수 있었고,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작가란 최상의 순간에 자기 인격의 최상의 측면을 갖고 주로 글을 쓰고 실제로도 그래야 한다"는 문학평론가 F.L 루카스의 말을 긍정하는 이유다.

죽기 살기로 뒹구는 고달픈 삶들을 위해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한 장면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한 장면ⓒ KBS


또 수많은 동백이들에게 '당신이 얼마나 훌륭한지 얼마나 대단하지 얼마나 장한지' 알아주는 황용식이 되고 싶어졌다.

여전히 불필요한 질문을 받으면서 편견에 갇혀 사는 사람들, 말을 안 할 뿐이지 쪽팔린 현실 속에서 죽기 살기로 뒹구는 고달픈 삶은 얼마나 많겠는가. 누군가 알아주고 읽어주어야 할 억울한 사연들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 탓 안하고, 치사하게 안 살고, 그 와중에 남보다 착하고 더 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다 우러러보고 박수 쳐줘야 하는 동백이들이다.

생각해 보면 황용식이 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 조금만 더 다정하면 가능한 일들이다. 내가 그저 "언니, 정말 열심히 살았네요"라는 말에 무장해제되고, 나를 가두었던 견고한 틀이 깨졌던 것처럼.

그래서 우리에게는 황용식이 필요하다. 편견으로 소외되는 사람들, 불균형 불공정한 사회 속에서 제대로 할 말도 제대로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알아주고, 빵빵하게 응원해 준다면 우리가 사는 이 잔혹한 밀림의 판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미디어에서는 온통 검찰 개혁에 관한 뉴스들이 쏟아진다.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에 가려져서 묻혀버리는 소외된 목소리들에도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 소수자이자 약자인 동백이를 깨운 것도 동백이의 말에 귀기울여주고 편들어준 황용식이지 않은가. 깨어난 동백이는 과연 어떤 새로운 판을 짤까. <동백꽃 필 무렵>을 보면서 세상은 사소한 것들을 통해 큰 변화를 일으킨다는 말을 믿고 싶어진다.
 
"세상은 우리의 깊은 관심과 소중히 여김의 소용돌이와 회오리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 - <완벽한 날들> , 메리 올리버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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