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 이난영 '목포의 눈물' 중에서.
 
이 노래,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 그의 남편 역시 유명한 가수이자 작곡가였다. 김해송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김해송이 가수로서 발표한 대표작은 1936년 <우리 둘은 젊은이> <첫사랑>, 1937년 <천리춘색> <라쿠카라차>, 1938년 <전화일기> <내 채찍에 맞았소> <명랑한 양주> <청춘계급> <개고기 주사>, 1939년 <나무아미타불>, 1940년 <빛나는 수평선> 등이다.
 
작곡가로서 발표한 작품 중에는 유명한 노래가 훨씬 더 많다. 그중에서 최근까지도 텔레비전 등에 이따금 나오는 작품으로는 떠돌이 악사를 코믹하게 다룬 <오빠는 풍각쟁이>를 들 수 있다. 1938년 12월 발표돼 가수 박향림을 세상에 널리 알린 이 노래의 앞부분은 이렇다.
 
"오빠는 풍각쟁이야, 뭐
오빠는 심술쟁이야, 뭐
난 몰라잉, 난 몰라잉,
내 반찬 다 뺏어먹는 건, 난 몰라
불고기, 떡볶이는 혼자만 먹고
오이지, 콩나물만 나한테 주고
오빠는 욕심쟁이, 오빠는 심술쟁이, 오빠는 깍쟁이야"
- 박향님 '오빠는 풍각쟁이' 중에서
 
가사로 보면 '오빠'가 친오빠 같지만, 분위기로 보면 '아는 오빠' 같기도 한 노래다. 당시 만요풍(코믹풍)이 유행이었다. 장유정·서병기의 <한국 대중음악사 개론>은 "만요는 음악적인 선율 자체보다는 가사에 치중하여 만들어진 갈래명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김해송은 이런 만요를 작곡하기만 했을 뿐 아니라 직접 부르기도 했다. "수박 사려 벌써 수박 애기 낳는 수박이야/ 아들을 날라면 아들수박/ 따님을 날라면 따님수박/ 막 골라잡고 십전이야"로 시작하는 <시큰둥 야시>를 박향림·남일연과 함께 불렀다.
 
 김해송.

김해송.ⓒ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오빠는 풍각쟁이> 같은 만요풍 가요를 짓기도 하고 부르기도 했으니, 그의 삶 속에는 분명 유쾌한 면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역사가 볼 때는 그의 삶이 조금도 유쾌하지 않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실릴 만한 행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1911년에 평안남도 개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송규지만, 주로 김해송이라는 예명을 썼다. (중략) 1933년에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공주사범학교·숭실전문학교, 일본 조치대학을 다녔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
 
가수로 데뷔한 것은 24세 때였다. <대중음악> 제9호에 실린 이준희의 논문 '김해송 무대음악 활동 초탐(初探)'은 "김해송이 대중음악가로서 세상에 처음 이름을 알린 때는 1935년 2월 무렵"이라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1935년 2월부터 3월까지 오케레코드에서는 전속 예술가들을 동원해 조선 전국은 물론 만주 일대까지 순회하는 공연을 진행했는데, 거기에 처음으로 김해송의 이름이 등장한다. (중략) 첫 무대에 이어 4월에는 서울 즉 경성 공회당에서도 오케레코드 '실연의 밤' 행사가 개최되었고, 당시 김해송은 기타를 연주하는 악단의 일원인 동시에 노래를 부르는 가수로 소개되었다." - 한국대중음악학회가 2012년 발행한 <대중음악> 제9호.
 
김해송은 그해 가을 처음으로 자기 노래를 발표했다. 자작곡 <항구의 서정>이 그것이다. 그는 이듬해에는 오케레코드사에 함께 소속된 이난영과 부부가 됐다. 그 뒤 그의 이력에서 눈에 띄는 대목 중 하나는 작곡가 박시춘이 있었던 아리랑보이즈의 일원인 적도 있었다는 점이다. 남자 '아이돌그룹'에서도 활동했던 것이다.
 
김해송이 친일파로 등장하는 시점은 29세 때인 1940년이다. 일본의 대륙 침략이 한창이던 이때, 그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사>가 주최하는 일본군 위문공연에 참여했다. 북지(北支) 즉 북지나 혹은 북중국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위문하는 행사였다. <친일인명사전>의 설명이다.
 
"1940년 4월 매일신보사 베이징 지국의 초청으로 '반도 애국호 자금모집 공연과 북지황군(北支皇軍) 위문'을 위해 조선악극단원들과 함께 베이징·톈진·지난·쉬저우 등지를 순회 공연했다."
 

그의 친일 공연은 국내에서도 있었다. 해방 뒤 국립극장이 된 명동 명치좌(明治座)에서 그가 참여한 공연은 아래와 같다.
 
"1944년 12월에는 명치좌에서 조선흥행협회 주최로 대동아전쟁 제3주년을 기념해 열린 조선악극단·성보악극단·약초약극단 등 3대 악극단의 단결 공연인 헌익(獻翼)예능대회에서 약초악극단이 공연한 음악극 <승리의 노래>의 음악을 담당했다."

김해송의 친일 활동은 공연 분야뿐 아니라 작곡 활동으로도 나타났다. 그가 발표한 일본 군국가요만도 해도 9곡이나 된다. <애국반>, <이천오백만 감격>, <부모이별>, <총후의 자장가>, <망루의 밤>, <강남의 나팔수>, <신춘엽서>, <그대와 나>, <이 몸이 죽고 죽어>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그대와 나>는 식민지 한국과 일본의 일체화를 강조한 내선일체 가요다. 가수 남인수와 장세정이 함께 불렀다. <이 몸이 죽고 죽어>는 정몽주의 <단심가>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고려왕조를 지키려다 개경(송도) 선죽교에서 피살당한 정몽주를 소재로, 당시 일왕(천황)인 히로히토에 대한 충성을 서약한 작품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만번 죽은들
충혼의 그 맹세를 버리오리까
살아서 가는 길도 님의 길이요
죽어서 가는 길도 님의 길일세
생사의 모든 길이 님의 길일세"
 
살아서 가건 죽어서 가건 생사의 모든 길은 나루히토 일왕의 할아버지인 히로히토 일왕의 길이라고 했다. 일본 왕실에 대한 '충혼의 그 맹세'를 다짐했던 것이다. 김해송은 이런 노래를 대중을 상대로 부름으로써, 자신이 이전에 만든 <오빠는 풍각쟁이> 같은 노래들을 친일파의 노래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오빠는 풍각쟁이>가 친일파의 노래인 줄도 모르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종종 방송되고 있다는 것은, 상당수 방송 관계자들이 김해송을 이난영의 남편으로만 기억하고 히로히토의 '충신'으로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몸이 죽고 죽어>가 발매된 때는 1942년이다. 그런데 7년 뒤인 1949년, 김해송은 똑같은 소재로 전혀 다른 곡조를 만들어냈다. 해방 4년 뒤 발매된 <선죽교>란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노래 가사 일부는 이렇다.
 
"송도라 옛 터전에 달빛도 차가운데
말없는 바람결에 소나무 우적이네
아느냐 충성의 피 흐른 곳 어드메냐
목 메어 묻는 말에 돌짬이 들먹이네"
 
선죽교로 형상화되는 정몽주의 고려왕조 사랑을 찬미한 노래다. 똑같은 정몽주와 선죽교를 소재로 7년 전에는 일본 왕실을 찬미하는 음율를 만들어냈던 김해송이다. 그랬던 그가 7년 뒤에는 똑같은 소재로 고려왕조에 대한 정몽주의 충성을 찬미하는 곡을 부여했던 것이다.
 
물론 김해송이 그 노래 가사를 짓지는 않았다. 하지만 똑같은 소재를 활용해 7년 전에는 일본 왕실을 생각하면서 곡을 부여하고 7년 뒤에는 고려 왕실을 생각하면서 곡을 부여했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이는 김해송이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7년 전 일이므로 충분히 기억할 수 있었을 텐데도, 똑같은 소재로 한 번은 일본을 찬미하고 한 번은 고려를 찬미했다는 것은 친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깊은 생각 없이 친일을 했다고 해서 죄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가 시대와 세상에 대한 기본 통찰도 없이 음악 활동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달리 말해, 음악가의 자격이 없음을 보여주는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산속에서 자기 혼자만의 즐거움을 위해 노래를 짓고 부른 사람이 아니다. 자기 작품을 세상과 공유하는 가운데 생계도 해결하고 예술적 꿈도 이루기 위해 그렇게 한 사람이다. 세상과 함께하는 음악 속에서 자기 역할을 모색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일본에 협력하는 음악 활동을 한 것도 모자라, 일왕을 찬미하는 데 썼던 음악 소재를 불과 7년 뒤 고려왕조를 위해 썼다는 것은 시대와 세상에 대한 그의 이해도가 상당히 낮았음을 의미한다. 일제 식민지배로 시련과 상처를 겪은 한국인들을 음악으로써 위로할 자격이 없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해방 뒤에도 그의 음악 활동은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 친일파였는데도, 아니 정확히 말하면 친일파였던 덕분에 그는 해방 뒤에도 탄탄대로를 달렸다. <친일인명사전>의 설명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에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무대음악무용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직접 케이피케이 악단을 조직해 당시를 대표하는 독보적인 악극단으로 발전시켰다."
 
8·15 해방과 함께 일본 식민당국만 물러가고 친일파는 그대로 잔존한 이 땅에서, 그는 친일파였던 덕분에 '독보적인 악극단'을 발전시키며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었다. 그렇게 잘 나가던 그의 인생은 39세 되던 1950년 한국전쟁(6·25전쟁) 발발과 함께 갑작스레 '스톱'하고 만다. <친일인명사전>은 그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끝맺는다.
 
"6·25 전쟁 때 피난을 가지 않고 있다가 북한군에게 체포되었고, 이후 북한군이 서울에서 퇴각할 때 북으로 끌려가는 도중 폭격을 맞아 사망한 것으로 전한다. 북한에서는 자진해서 입북한 뒤 지병인 폐결핵에 폭격으로 인한 부상이 겹쳐 사망했다고 쓰고 있으나, 폐결핵을 앓았다는 기록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
덧붙이는 글 '정몽주' 이용 일왕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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