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보려고 했다. 제목에 꽂혀 1~2회를 보았지만, 인내심이 필요했다. 드라마인지, 다큐인지 모를 묘한 느낌이 신선하기보단 낯설었고, 재밌기보단 지루했다. 그런데 얼마 후 생전 드라마를 보지 않는 남편이 내게 물었다.

"<멜로가 체질>이라는 드라마 봤어? 우연히 한 편 봤는데 9회서 한 여자가 친구들한테 '힘들어 안아줘'하는데 엄청 뭉클하더라. 재밌던데. 함 봐봐."

JTBC <멜로가 체질>을 난 그렇게 다시보기 시작했다. 드라마 마니아인 나보다 드라마에 관심이 전혀 없는 남편을 먼저 매료시켰던 <멜로가 체질>. 그 이유가 궁금해 찬찬히 뜯어보자 어느덧 이 개성만점 드라마에 빠져버린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부할 수 있는 소재인 연애를 무척이나 '열린 시선'으로 그려낸 <멜로가 체질>의 매력을 정리해본다.

서사 대신 대사

누군가 내게 '<멜로가 체질>의 줄거리가 뭐야?'라고 묻는다면, 한 마디로 설명하기가 곤란할 것 같다. 이 드라마에는 대단한 배경도, 커다란 사건도, 등장인물들의 드라마틱한 변화도, 극적인 반전도 없었다. 그저 3명의 여자 친구들과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내면서 겪는 소소한 일들과, 이들이 하는 말이 이야기의 전부다. 처음엔 이런 시도가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일상에 뿌리박은 이들의 대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밤에 각자의 집으로 귀가해 하루의 일과를 '수다'를 떨며 정리하는 모습이 너무나 정겨웠다. 다음 날 또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시작되고, 인물들은 소소한 일들을 통해 아주 조금씩 성장해간다. 천천히 진전되는 연애와, 성실히 일하는 이들의 잔잔한 일상은 미소를 머금게 했다.

특히 7회 범수(안재홍)가 진주(천우희)에게 들려주는 '일상의 소리'에 대한 대사는 그 어떤 드라마의 멋진 장면보다 일상을 긍정하게 해 준 부분이었다.

"늦잠으로 밀린 잠을 채운 토요일 늦은 아침. 세탁기를 돌리고 다시 침대로. 한참을 뒹굴뒹굴. 누워서 책도 좀 읽고 구름 걷힌 햇살이 얼굴에 삭 닿아서 기분이 좋아요. 그 때 세탁기에 슈베르트의 송어가 흘러나오죠. 나는 그 소리가 좋아요. 이제 빨래를 널어야 하는데 햇살 받은 이불이 스삭스삭 보송보송. 기분이가 좋아 일어나기가 싫은데 택배 왔어요. 나는 그 소리가 좋아요. 간만에 인터넷 쇼핑으로 주문한 옷이 사이즈가 딱 맞네요. 기분이가 더 좋아져 빨래를 널기로 합니다. 빨래를 다 널 때쯤 꼬르르륵. 나는 그 소리가 좋아요."

공동체적 가족의 진실함
 
 범수(안재홍)은 진주(천우희)에게 자신의 일상 속 소소한 행복들에 대해 털어 놓는다.

범수(안재홍)은 진주(천우희)에게 자신의 일상 속 소소한 행복들에 대해 털어 놓는다.ⓒ JTBC

 
또 하나 눈길을 끌었던 건 드라마 속 독특한 가족공동체였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전형적인 가족의 공간에 살지 않는다. 진주, 은정(전여빈), 한주(한지은), 효봉(윤지온) 그리고 한주의 아들 인국(설우형)은 한 집에서 지낸다. 남자친구와 사별한 은정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남매지간인 은정과 효봉의 집에 두 친구는 짐을 푼다. 하지만, 사실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미혼모인 한주, 집에서 독립하고픈 진주에게도 윈-윈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세 여자와 한 남자, 그리고 한 어린이가 가족이 된다. 그런데 이 가족 무척이나 보기 좋다. 먼저 이 가족에겐 전통적 성역할의 구분이 없다. 자연스레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각자가 알아서 차려 먹으며, 청소 등 다른 집안일들도 공평하게 분담한다. 누구도 '독박살림'을 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만 이 공동체는 매우 잘 유지된다. 인국을 공동양육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또한, 함께 산다는 이유로 심리적인 부담을 주지 않는다. 매일 저녁 거실 소파에 앉아 하루의 일과를 나누는 이들은 퇴근해서 들어오는 친구의 표정만 보고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 챌 정도로 서로에게 관심이 많다. 하지만, 이들은 관심을 간섭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스스로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려주고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든지 비난하지 않고 솔직하게 반응한다. 남자친구를 잃은 은정의 분열적 모습을 걱정하지만, 그 누구도 그러지 말라고 잔소리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9회 은정이 "나 힘들어. 안아줘"라고 말했을 때 "2년 넘게 기다린 말이야. 힘들다고 말해줘서 고마워"(진주)라고 답하며 서로를 끌어안을 때, 16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한주의 말에 함께 얼싸 안고 좋아해줄 때, 간섭과 강요가 아닌 진정한 우정과 사랑의 힘이 느껴졌다. 서로의 기대가 투사되고, 때로는 이것이 강요와 억압으로 나타나는 부모-자식, 혹은 부부관계에 기초한 보통의 가족들보다 훨씬 더 건강해 보였다.

젠더에 대한 열린 시각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매일 저녁 소파에 모여 서로의 일상과 마음을 나누며 하루를 정리한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매일 저녁 소파에 모여 서로의 일상과 마음을 나누며 하루를 정리한다.ⓒ JTBC


젠더감수성을 지닌 설정과 묘사들도 눈에 띄었다. 먼저, 한국 드라마로는 드물게 동성애커플이 등장한다. 효봉-문수(전신환)커플은 동료이자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효봉은 자신의 커밍아웃이 부모를 떠나게 했고, 이로 인해 누나인 은정의 상처가 더욱 깊었을 거라 죄책감을 갖는다. 또, 14회에는 효봉-문수 커플이 동성애 관계임을 알아챈 식당주인이 이들보고 나가라고 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런 설정들은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이 겪는 아픔을 잘 표현한 부분들이었다. 하지만, 드라마 속 인물들이 이들을 대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따뜻했으며, 성소수자에 대한 왜곡된 묘사도 없었다. 현실적이면서도 따스한 시선은 아마도 시청자들이 성소수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의 벽을 조금은 낮춰주었으리라 믿는다.

이성애 커플들도 가부장적 성역할에 매여있지 않았다. 진주-범수 커플에서 요리를 하는 쪽은 늘 진주가 아닌 범수였다. 범수는 빨래, 청소, 요리 등 가사 일을 매우 자연스럽게 해내는 남자로 묘사된다. 3회 술에 취해 범수 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까지 먹은 진주가 설거지를 하고 가겠다고 하자 범수는 "여자가 무슨 설거지. 내가 해"라고 답한다. 진주 부모님 커플을 빼고는 여자가 살림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성차별적인 현실에 대한 묘사도 눈에 띄었다. 1회 성희롱 하는 상사를 보기 좋게 한 방 먹인 은정은 3회 예능프로그램 녹화에 참가해 한 드라마의 설정에 대해 "여자의 집안일이니, 집안일이 왜 여자 껀데요. 그리고 뭐 집구석에서 잠만 자다가 말기 암 선고받은 날 식기세척기?"라고 되묻는다. 5회 드라마 편성회의에 참석한 진주는 방송사 간부들의 여성작가들을 폄하하는 발언에 주눅 들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해낸다.

6회 촬영장서 "오빠, 오빠하면 다 들어준다"는 스태프들에게 한주는 '역 오빠' 작전으로 이들을 질리게 만들어 버린다. 세 여성 주인공 모두가 일에 있어 성차별적인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세 여자는 여기에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대처해간다. 착잡한 현실에 맞서는 여성들의 대처가 돋보이는 장면들이었다.

<멜로가 체질>은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물이 아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이야기 속에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열린 시각으로 보여줬다. 그리고 이 잔잔한 일상 속에서 어떻게 하면 소소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지, 투사와 강요가 배제된 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톡톡 튀는 대사들로 마음에 새겨주었다. 또한, 젠더감수성을 지닌 시선으로 연애를 조망했다. 

편견없는 관점으로 그려낸 일상과 연애 이야기는 드라마를 잘 보지 않던 남편의 마음을 흔들었고, 덕분에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우리 부부는 이 드라마를 소재로 다양한 생각들을 나눌 수 있었다. 시청률 1%대를 넘지 못하고 마무리 된 <멜로가 체질>이 뿌듯한 이유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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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사람은 물론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하며 평등과 생명존중을 담은 글을 쓰고 소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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