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앙은 멋지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가스콘 부대에도 입대했다. 가스콘 부대에 입대하기 위해 파리에 다다랐을 때, 소매치기에 당할 뻔한 여성을 보고 첫 눈에 반한다. 바로 록산이다. 그를 향한 절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뜨거운 마음에 입은 타지만, 말은 튀어나오지 않는다. 결국 시라노의 도움을 받게 된다. 시라노는 탁월한 표현을 시를 쓰는 언어마술사에, 칼 솜씨도 뛰어난, 지혜와 힘을 겸비한 사람이다. 그의 도움을 받지만,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아 늘 불안하다.
 
 <시라노> 김용한

<시라노> 김용한ⓒ CJ


뮤지컬 <시라노>를 본 관객들은 이런 크리스티앙의 모습을 답답해 할 것이다. 혹자는 '멍청하다'라고 평할 수도 있다. 하지만 크리스티앙의 마음은 '진심'이다. 표현을 못한다고 그의 진심이 사라지는 것일까. 이 같은 크리스티앙의 절절한 마음을 배우 김용한과 함께 나누었다. 지난 11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사람들은 모두, 가슴 속에 콤플렉스 하나씩 품고 살잖아요. 사실 저도 말을 잘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준비한 것을 앞에 나가서 발표하는 것은 잘 할 수 있는데, 제 마음을 전하는 데에는 서툰 편이에요. 그래서 크리스티앙을 봤을 때 더 짠하고, 동질감이 들어요."
 
크리스티앙의 콤플렉스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김용한이었다. 실제, 그는 외운 듯이 자신의 생각을 줄줄이 늘어놓는 배우들과 달리, 곰곰이 곱씹으며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에 힘이 더해졌고, 진심이 느껴졌다. 크리스티앙과 닮은 지점이기도 했다.
 
크리스티앙은 록산에게 고백하는 순간, 시라노의 도움을 받는다. 그는 "어둠에 그대 가리워져 보이지 않아도"를 "어둠의 그 대가리 어서 보여줘"라고, "내 영혼이 가리가리 찢겨도"를 "내 영혼의 아가리 찢겨소"라고, "그댈 향한 내 마음은 철없는 연인과 같다"를 "털 없는 여인과 같다"라고 잘 못 전해 록산의 화를 돋운다. 관객들은 웃지만, 김용한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재밌었어요. 근데 장면을 대할수록 크리스티앙이 짠해지더라고요. '왜 그렇게 멍청한 말을 해?라고 많은 분들이 생각할 수도 있는데, 사랑 표현은 다양할 수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그 상황에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워낙 당황하기도 했고요. 절실한 마음에 전하는 장면인데, 멍청하다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그 안에 녹아든 깊은 내면을 잘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전 진심입니다(웃음)."
 
크리스티앙의 마음을 시라노가 대신 전하게 되면서, '아바타'에 비유되기도 한다. 시라노의 마음을 크리스티앙이 전한다고 하는 의견도 있지만, 반대로 크리스티앙의 마음을 시라노가 전한다고 생각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보시는 분들에 따라서 다양하게 읽힐 거 같아요. 작품에 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크리스티앙이 시라노의 도움을 받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록산의 마음을 받지 못했을까 라는 거죠. 크리스티앙 혼자의 힘으로 사랑을 갈구하고, 진심어린 마음을 전했다면 통하지 않았을까요? 록산 집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진심을 전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전쟁통에 크리스티앙이 보낸 편지에서 진심을 느낀 록산은, 그를 위해 전쟁터로 발길을 옮긴다. 정작 편지를 쓴 사람은 시라노지만 말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향한 그의 용기에 김용한은 감탄의 박수를 보냈다.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멋지고요. 저라면 솔직히 고민돼요(웃음). 록산이 워낙 진취적이고 멋진 분이라 전쟁터까지 올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시라노가 보낸 편지가 삶에 큰 힘이 됐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였겠죠? 그런 사랑, 정말 있을 거 같아요. 믿고 싶어요." 
 
 <시라노> 김용한

<시라노> 김용한ⓒ CJ


하지만 자신이 아닌 시라노의 편지를 받고 감격에 빠진 록산을 보고, 크리스티앙은 자신감을 잃는다. "당신의 영혼까지 사랑해요"라는 록산의 말에 눈빛이 흐려진다. 많은 감정을 내포한 표정이었다.
 
"전쟁 장면에서 '나는 뭐지'라는 생각이 확 들었을 거 같아요. 전쟁터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록산이고, 그의 존재로 행복하고, 또 버티고 강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시라노가 보낸 편지에 행복해 하는 록산의 모습에서, 크리스티앙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재고하게 되는 거죠."
 
때문에 첫눈에 반한 대상은 크리스티앙이지만, 록산이 정작 사랑한 대상은 시라노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은 "그녀가 사랑하는 건 당신"이라고 노래한다.
 
"(록산이 사랑한 사람은) 시라노라고 생각해요. 저 역시도 외모보다는 내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록산과 시라노는 내면이 잘 통하잖아요. 잘 맞고 서로에게 힘이 돼 주는 사랑이 진짜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록산 마음 속 사랑의 지분이 시라노가 더 컸을 거 같아요. 시라노 역시 록산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터로 온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을 거 같아요. 자신의 편지를 보고 온 것이라는 생각도 들면서, '혹시 나를?'이라는 생각을 더 강하게 부정하는 게 아닐까요. 시라노들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요."
 
록산은 극 중 바지를 입고, 검을 휘두르는 등 진취적이고 강인한, 현명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크리스티앙이 록산에게 반한 지점은 어디일까. 만약, 여성판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이 존재한다면, 김용한의 마음은 어느 쪽으로 쏠릴지도 궁금해졌다.
 
"외모라고 생각합니다(웃음). 정말 아름답고, 품위가 넘치고, 크리스티앙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매력적인 여성이죠. 저라면 시라노에게 마음이 갈 거 같아요. 매력이 많은 분 같아서요(웃음)."
 
크리스티앙은 극 중 시라노에게 의지를 많이 한다. 록산에게 보낼 편지에 대해서도 고민을 털어놓을 만큼.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매일 편지를 보냈다는 시라노의 말에, 크리스티앙은 마냥 고맙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라노와 록산, 둘 만의 이야기가 쌓였을 것이라는 불안감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 생겼을 것이다.
 
"물론 시라노에게 고마운 마음이 커요. 항상 크리스티앙에게 힘이 돼 주는 존재죠. 록산을 향한 진심을 보이고 싶어서 편지를 쓰려다가도 고민을 털어놓을 만큼 의지잖아요.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매일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 시라노의 모습에, 크리스티앙도 좀 놀라는 거죠.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괴로워지고요. 너무나 큰 존재였기 때문에 그의 모습에 복합적인 감정이 몰아친 거예요."
 
하지만 그는 록산에게 자신의 마음을 다 전하지 못한 채 세상을 뜬다. 너무나 안타깝다. 그런 죽음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크리스티앙의 운명에 대해 김용한은 어떻게 생각할까.
 
"물론 '조금 더 살았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밋밋하지 않은 극적인 삶이라 좋아요. 크리스티앙이 '멋있게 살고 싶다'라는 말을 하잖아요. 멋있게 살고, 멋지게 고백도 하고 싶었을 거예요. 그렇지 못한 그의 삶이 안타깝죠. 미완성의 삶이니까요. 하지만 록산을 사랑한 마음은 정말 진심입니다."
 
록산에게 편지를 완성한다면, 어떤 내용이 담길까. 김용한은 "살아간다는 의지를 갖고 쓸 거 같아요. 유서처럼 쓰겠지만 내용은 희망적으로요"라고 설명했다. 또박또박 마음 속에 담아뒀던 록산을 향한 편지를 읽어나갔다.
 
"나 여기에서 잘 지내고, 잘 살고 있어. 너무 슬퍼하지 말고, 밥 잘먹고 지내길 바라. 내가 돌아가면, 그동안 채워주지 못한 빈 자리 열심히 채우며 살게. 아름다운 미래도 설계하며 오순도순 함께 살고 싶어."
 
많은 감정을 건드리는 작품 <시라노>. 특히 김용한 개인적으로도 남다른 작품이다. 서울예술단에 속한 그가 출연하는 첫 외부 작품이기도 하고, 색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에게 데뷔 이상의 힘이 <시라노>에 더해진 데에는 류정한이 있었다. 류정한은 <시라노> 프로듀서를 맡았을 뿐 아니라 시라노 역으로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2011년에 <맨 오브 라만차>를 보고 너무 감동을 받았어요. 팬클럽에서 준비한 꽃을 제가 드린 적도 있어요(웃음). 그런데 이렇게 함께 무대에 서게 된 거죠. <시라노>는 제게 데뷔 이상의 의미예요. 배우 인생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시라노>는 존경하는 선배들과 함께 하기 때문에 정말 남다르죠. 정말 감사한 마음이에요."
 
배우가 맞는 직업일지 잘 해낼 수 있을지, 무대에 오르기 전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김용한의 귀결점은 결국 '무대'였다. 그가 바라보는 곳이 '눈 앞'이 아닌, '앞으로'이기에 이룰 수 있는 '꿈'이었다.
 
"무대에 오르기 전, 고민이 많았어요. 모델, 스튜어드, 기술직 등. 하지만 결국은 배우더라고요. 아마 배우가 안 됐더라도 될 때까지 노력했을 거 같아요.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작품에 푹 빠져있어요. <시라노>가 제 인생에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은 틀림없죠. 물론 하고 싶은, 맡고 싶은 작품도 많아요. 차곡차곡 잘 준비하고 채워서 40, 50세에도 제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을 차근차근 해내고 싶어요. 좋은 소리와 마음으로 연기해서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좋은 기운을 전하고, 힐링을 드리고 싶어요. 좋은 기분으로 극장을 나설 수 있게 말예요."

뮤지컬 <시라노>는 오는 10월 13일까지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된다.
 
 <시라노>김용한

<시라노>김용한ⓒ C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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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전문 프리랜서 기자입니다. 연극, 뮤지컬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 전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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