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록산 나하나

<시라노> 록산 나하나ⓒ CJ

 
시라노를 생각하다 두눈이 벌겋게 달아오르다가도, 시답잖은 농담에도 해맑게 웃어준다. 소녀처럼 꺄르르 웃다가도 작품 얘기에 금세 눈빛이 뜨거워진다. 순수하면서도 강단 있는, 사랑스러우면서도 특별한 매력을 지닌 배우 나하나다.
 
연극과 뮤지컬, 무대 예술에 푹 빠진 그의 모습에서, 사랑하는 이 앞에서 작아진 시라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뮤지컬 <시라노>에서 록산으로 관객들을 만나고 있는 나하나를 지난 9일 압구정 한 카페에서 만났다.
 
<시라노>는 완벽하지 않은 이들의 사랑을 담은 작품이다. 시라노는 뛰어난 검술 실력 뿐 아니라, 아름다운 시를 쓰는 언어 마술사다. 모두의 부러움을 받는 지혜와 힘을 겸비했지만 유난히 큰 코가 콤플렉스다. 자신이 사랑하는 록산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진다. 록산이 사랑에 빠진 크리스티앙은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를 지녔지만 감정 표현이 서툴다. 록산 앞에만 서면 마음에 담아둔 말을 잘 내뱉지 못한다. 시라노는 자신이 사랑하는 록산의 행복을 위해, 크리스티앙과 그를 이어주기로 결심하고 크리스티앙의 목소리가 돼 글로 마음을 대신 전한다.
 
"<시라노>는 사랑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에요.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하고, 이타적이지 않은 요즘 많은 생각을 던져주죠. 이뤄지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알아가는 그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요."
 
나하나는 <시라노>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다,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마치 '록산이 살아 있다면 이렇게 생각했겠다' 싶을 정도로, 인물에 푹 빠진 모습이다.
 
"시라노를 생각하면 자꾸만 눈물이 나요. 크리스티앙이 죽을 때는 그렇게 눈물이 나지 않는데, 시라노가 죽을 때는 펑펑 눈물이 흘러요. 시라노와 함께 쌓아온 시간 때문에 그런 거 같아요. 극 안에서 15년이나 흘렀지만, 시라노는 매주 록산을 찾아와 웃음을 주죠. 시라노와 함께 한 시간을 되새기고 무대에 올라가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어요. 제일 소중한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 느낌이에요."
 
불완전한 사람의 완전한 선택

록산은 초연부터 많은 이의 궁금증을 높인 인물이다. 시라노, 크리스티앙, 드기슈 세 사람의 사랑을 받지만, 그의 마음은 정작 시라노와 크리스티앙, 둘 중 어디로 향해 있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시라노를 향한 감정을 사랑으로만 규정지을 수 없을 거 같아요. 위선, 거짓, 교만 등과 싸워내고 힘들게 선택한 것들이 타인을 위한 희생이고, 또 선한 영향이잖아요. 그런 의지로 살아온 시라노의 선택과 행동, 인생이 너무나 감동으로 다가오는 거죠. 너무나 인간적인, 불완전한 사람이 완전한 것을 선택했다고 생각해요. 작품에서 와 닿는 지점이기도 하고요."
 
극 중 록산은 크리스티앙의 외모에 첫눈에 반하지만, 정말 사랑에 빠졌다고 깨닫는 지점은 전쟁 중 그가 보낸 편지다. 매일 편지를 쓰고, 목숨을 걸고 편지를 보낸 그의 정성에서 진심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의 마음에 록산도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시라노> 록산 나하나

<시라노> 록산 나하나ⓒ CJ

 
"전쟁터 장면, 정말 재밌어요. 록산이 정말 멋있지 않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찾아가는 그의 용기에 박수를 쳐주고 싶어요. 진실한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거죠. 처음에는 크리스티앙의 외모에 빠졌다가, 전쟁터에서 그가 목숨을 걸고 보낸 편지에 마음이 움직였을 거예요.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잖아요. 전쟁터에 록산이 왔을 때는 크리스티앙의 외모가 아닌, 영혼을 사랑한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록산이 매일 받은 편지는 크리스티앙이 아닌, 시라노가 쓴 것이었다. 시라노나 크리스티앙, 그리고 관객들까지 모두 알지만 록산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크리스티앙에게 "당신의 영혼을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크리스티앙은 혼란에 빠진다. 편지를 쓴 시라노의 진심이 록산에게 닿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록산은 깨닫지 못했지만 시라노를 사랑한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크리스티앙과 영혼의 소통을 했고 복합적인 감정으로 사랑했을 수도 있지만, 그 감정을 깨닫는 지점은 편지니까요. 그 마음은 시라노를 향한 게 아닐까요."
 
때문에, 시라노에게 내뱉은 말조차 어렵다. 록산의 마음이 와닿지 않아 고심의 과정을 겪으며 록산에 다가갔다고 한다.
 
"전쟁터에 가기 전에 록산이 시라노에게 '크리스티앙의 방패가 돼 줘요'라고 하잖아요. 그 말이 너무 어려워요. 제 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록산이 너무 못된 거 같았거든요. 아마, 드기슈에게 꾀를 내서 크리스티앙이 군대에 가게 됐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그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슬픔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었을 거 같아요. 그 감정으로 몰입하고 있어요. 록산이 워낙 시라노를 믿기도 했고요. 오죽하면 그런 말을 했을까요!"
 
나하나가 록산이라면...
 
 <시라노> 록산 나하나

<시라노> 록산 나하나ⓒ CJ

 
전쟁터에 도착한 록산은, 자신이 목숨을 걸고 어떻게 왔는지, 상황을 설명한다. 할머니 흉내를 내며, 군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이 장면 역시 쉽지 않았다. 나하나는 <시라노> 초반에 시라노가 펼치는 연극 장면을 언급해서 장면에 힘을 더했다.
 
"시라노가 극 초반에 연극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록산은 모르지만, 관객들은 아는 장면이죠. 시라노는 굶주리고 힘든 사람들에게 유쾌함을 주고, 또 록산을 웃게 하고, 에너지는 주는 사람이에요. 록산도 전쟁 중인 군인들에게 자신이 털어놓는 한편의 연극으로 생명력을 전하고 싶은 거죠. 사랑하는 대상이자 스승이기도 한 시라노에게 '당신에게 받은 사랑을 나 역시 베풀 수 있다'고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통으로 떠난 록산.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일 터. 실제로 나하나라면 사랑하는 이를 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향할 수 있을까.
 
"아니요(웃음). 쉽지 않을 거 같아요. 그래서 록산의 모습에 대리만족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전쟁터에 오는 록산의 모습이, 시라노와 가장 닮아 있는 거 같아요. 비록 록산은 인지하지 못하지만요."
 
록산이 아닌 나하나라면, 시라노와 크리스티앙 중 누구를 사랑했을지도 궁금해졌다.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답이 바로 나왔다. <시라노>라는 작품에 몰입한 것인지, 시라노라는 인물에 빠진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설득력있는 답이었다.
 
"저라면 무조건 시라노예요. 평생 함께 살 사람이잖아요. 웃음을 주는 시라노가 정말 좋아요. 개그 코드가 맞아야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시라노는 록산이 좋아하는 부분도 잘 알고 있고, 서로가 흥미로워 하는 부분도 비슷해요. 공통분모가 있는 거죠. 함께 해도 지루하지 않을 거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고, 오래 봐온 사이라면, 시라노의 큰 코도 상관없을 거 같아요. 함께 하고 싶을 거예요.
 
시라노는 제 영혼을 쉬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시라노와 록산을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존재죠. 그토록 순수한 사랑을 받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시라노의 사랑은 정말 특별해요. 그런 사랑을 받는 록산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해요(웃음). 15년이 흐른 뒤에도, 서로를 향한 존경과 존중을 잃지 않은 모습이죠. 감정을 '툭' 얘기해 버릴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내 자신을 대하듯 소중하고, 존중하며 대하잖아요. 정말 고결하다는 표현이 딱인 거 같아요. 그래서 더 사랑스럽고요."
 
나하나가 꼽은 명장면

마지막 장면은 좋아하는 만큼 어렵다고, 나하나는 마치 록산이 된 듯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시라노>가 마지막까지 여운을 남기는 데에는 나하나의 수많은 고민이 녹아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라노가 '시라노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지켜봐주는 게 너무 어려워요. 죽어가는 상황인데 빨리 치료를 해야 하는데, 록산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시라노가 자신이 끝내 중심을 잃었을 때 록산이 딱 잡아주는데, 그 장면에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나타나는 거 같아요. 서로의 영혼을 너무 사랑해서 지켜주고 싶은 거죠. 너무 어려운 장면인데, 그만큼 너무 좋아하는 장면이에요."
 
인터뷰를 진행할수록, 나하나라는 배우를 <시라노> 록산으로 만나게 됐다는 점이 실로 반갑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더해졌다. 자연스럽게 그의 연기 인생에 고개를 돌리게 됐다. 나하나를 배우로 이끈 작품은 <지킬 앤 하이드>였고, 배우는 류정한이었다. 류정한은 <시라노>에서 시라노로 무대에 오르기도 하지만, 프로듀서도 맡았다. 남다른 인연인 셈이다.
 
"19살 때 처음으로 뮤지컬을 봤는데 '세상에 이런 장르가 있다니' 그런 감정을 처음 느꼈어요. 극장은 제게 사람 살리는 곳이에요. 저를 살아있게 한 곳, 살아서 감사함을 느끼게 되고 생명력이 느껴지는 곳이에요. 제가 무대를 너무 신성시해서 '나 따위가'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너무 좋아서 '죽기 전에 도전이라도 한 번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어요.

제게 콤플렉스는 노래예요. 선생님도 많이 찾아다니고, 연습도 정말 많이, 열심히 했어요. 시행착오도 역경도 많았고요. 연기도 아직 멀었다고 생각해요. 연습하고 무대에 오르면서 다른 배우들을 보면, '배우할 사람은 따로 있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나하나는 겸손했지만 사실 그는 데뷔작 <도리안 그레이>때부터 신예라고 믿을 수 없는 기량을 발휘해 주목을 받았다. <도리안 그레이>를 떠올리며 "절대로 잊지 못한 기억"이라고 털어놓았다.
 
"<도리안 그레이>때 무대에 설 수 있게 돼 정말 많이 울었어요. 빗자루만 들어도 좋으니까 무대 위를 지나가 보는 것이 소원이었거든요. 무대에 올랐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제 인생 목표를 이룬 것처럼 죽어도 여한을 못 느낄 정도로 정말 감사한 순간이었어요. 프리뷰 공연 커튼콜 때 감동도 잊을 수 없어요. 제 인생에 절대 잊지 못하는 장면이에요. 더불어 <시라노> 마지막 장면 역시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시라노의 코는, 사실 남들에게는 그리 도드라지지 않았을, 시라노 만이 느꼈을지 모르는 그만의 콤플렉스였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남들은 못 느껴도 스스로에겐 유독 크게 느껴지는 자신의 결점이 있다. 천상 배우라는 말에 손을 절레절레 흔들지만 나하나는 무대가 아닌 곳은 생각해 본적 없는, 무대와 사랑에 푹 빠진 '배우'였다. 마치 록산을 너무나 사랑한, 모든 것이 완벽한 시라노가 록산 앞에 작아졌듯 말이다.
 
"배우가 안 됐다면요? 될 때까지 도전했을 거예요.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연극과 뮤지컬 즉, 무대예술이거든요. 좋아하는 이유가 너무 많은데 무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명력이 가장 커요. 어떤 세계를 제가 살아서 (관객에게) 전하는 과정, 무대의 언어, 표현법 등 너무 좋아요. 전 공연 마니아예요. 작품도 진짜 많이 보러 다녀요. 너무 사랑하는 대상이라 존귀하게 여기다 보니, 제 자신이 무대 앞에서 작아지는 거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하면 작아지는 것 처럼요. 마치 시라노처럼 말이죠."
 
뮤지컬 <시라노>는 오는 10월 13일까지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된다.
 
 <시라노> 록산 나하나

<시라노> 록산 나하나ⓒ C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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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전문 프리랜서 기자입니다. 연극, 뮤지컬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 전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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