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호> 영화 포스터

▲ <우키시마호> 영화 포스터 ⓒ (주)영화사메이플러스


일본의 역사 왜곡과 경제 보복 조치로 인해 반일 감정이 뜨겁다. 올해 극장가에서도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는 영화가 잇달아 관객을 찾았다. 포문은 '나눔의 집'에서 지내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일상을 그린 <에움길>(2019)이 열었다. 이어서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의 27년 투쟁을 담은 <김복동>(2019)과 일본 우익의 실체를 파헤친 <주전장>(2018)이 개봉했다. 상업 영화로는 한국 독립군 부대의 활약을 그린 <봉오동 전투>(2019)가 관객과 만났다.

다큐멘터리 영화 <우키시마호>도 일본의 과거 잘못을 고발한다. 영화는 1945년 8월 22일 조선인 강제징용자들과 가족을 태우고 부산을 향해 출발한 우키시마호가 24일 일본 중부 연안에 있는 마이즈루항에서 침몰한 '우키시마호 폭발 사고'를 소재로 다룬다.

연출은 <여고생 시집가기>(2004)와 <회초리>(2011)를 제작하고 2015년 <위선자들>로 감독 데뷔를 한 김진홍 감독이 맡았다. 2016년 지인을 통해 우연히 우키시마호 사건을 알게 된 김진홍 감독은 처음엔 큰 규모의 영화로 준비하다가 자료 조사를 하면서 생각이 바꾸었다고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일본과 한국이 진상 규명 자체를 안 하는 상황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나.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다. 역사적 실체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영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키시마호> 영화의 한 장면

▲ <우키시마호> 영화의 한 장면 ⓒ (주)영화사메이플러스


우키시마호 자료는 사실상 전무하다. 침몰하는 배를 찍은 사진도 1장에 불과하다. 일본은 진실을 감추기 위해 관련 문건을 상당수 파기해 버렸다. 배는 침몰하고 9년이 흐르고서야 인양되었다. 일본 정부는 제대로 된 진상조사는 고사하고 한국 전쟁으로 고철 가격이 급상승하자 팔아먹을 요량으로 다이너마이트로 배를 폭파한 뒤에 해체했다. 그 과정에서 선체에 남아있던 주검들은 유실되어 버렸다.

<우키시마호>는 우키시마호 생존자들의 목소리, 마이즈루에 거주하는 일본인들, 수중폭파전문가, 역사학자, 관련 단체 등 전문가의 의견을 중심으로 침몰의 원인을 검증한다. 현재 우키시마호의 생존자는 대부분 세상을 떠나셨다. 정영도 할아버지와 최석준 할아버지만 살아계실 따름이다.

영화는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 규명 위원회'의 전재진 회장으로부터 받은 생존자 인터뷰 영상을 활용한다. 1985년부터 80여 명의 생존자를 인터뷰한 영상은 8월 22일부터 24일까지의 우키시마호를 생생히 증언한다. 중간에 재현 영상과 CG 화면을 넣어 당시 상황의 이해를 돕기도 한다. 내레이션은 배우 안재모가 나섰다. 그는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영화에 참여했다고 한다.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에 대해 알게 된 후 우리 민족 통한의 역사에 뼈아픈 공감을 하게 됐다. 결코 잊혀선 안 될 역사와 진실에 대해 국민의 관심을 촉구하는 데 작게나마 힘이 되고자 참여하게 되었다."
 
<우키시마호> 영화의 한 장면

▲ <우키시마호> 영화의 한 장면 ⓒ (주)영화사메이플러스


일본은 우키시마호 탑승자 숫자는 3725명이고 이 중에서 조선인은 524명, 일본 승조원 25명이 사망했으며 실종자 수와 생존자 수는 미상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미군이 설치한 기뢰와 충돌하여 침몰했다 것이 공식 입장이다. 그러나 <우키시마호>는 일본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한다.

당시 일본은 우키시마호가 조선으로 가는 마지막 선박이고 앞으로 배급을 끊어버릴 것임을 강조하며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다수를 배에 태웠다고 한다. 생존자들은 너무나 많은 사람이 탑승하는 바람에 출항 준비에만 며칠이 걸렸다고 설명한다. 영화는 생존자들의 증언과 2014년에 공개된 일본 외무성의 문서에 적힌 '우키시마호에 탑승자가 8000명에 이른다'는 기록을 토대로 탑승한 인원이 8000명~10000명에 달할 것으로 분석한다.

영화는 우키시마호가 미군이 부설한 기뢰에 의한 사고가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한다. 생존자들은 배가 가운데로 동강이 난 상태로 침몰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인양 당시 선체의 사진을 보면 배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찢겨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선체 내에 있던 폭발물에 의한 침몰을 의미한다.

우키시마호에 다량의 폭발물이 실려 있었다는 일본 정부의 기록, 폭발 직전에 일본 군인들이 급히 배에서 빠져갔다는 목격자의 말, 침몰 지역의 기뢰는 모두 제거되었다는 승조원과 미군 간의 통화 내용, 일본인 승조원들이 출항 직전 항해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사실 등 의혹은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우키시마호가 출항 직후부터 예상 경로를 벗어나 일본의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다가 보급을 이유로 일본 중부 연안에 위치한 마이즈루항에 입항하려 한 점도 석연찮다. 모든 증거는 하나의 방향, 바로 고의 폭파를 가리키고 있다.
 
<우키시마호> 영화의 한 장면

▲ <우키시마호> 영화의 한 장면 ⓒ (주)영화사메이플러스


일본 정부는 진상 규명은 끝났고 피해자에 대한 배상 역시 1965년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완료되었다고 주장한다. 한국 정부는 2008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우키시마호 사건 소송 자료집 2권만 내놓았을 뿐, 2015년 이후 관련 조사를 멈췄다.

정부와 국민의 무관심 속에 생존자와 유가족들이 직접 나서 일본 정부의 사죄와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여 2001년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2003년 고등법원 항소심과 2004년 최고법원 상고심에서 패소가 확정되었다. 일본 법원은 법적 판단 근거로 한일기본조약에 따른 청구권 소멸을 들었다.

<우키시마호>의 끝 무렵에 제작진은 한 가지 조사를 벌인다. 전국 10개 지역에서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과 난징대학살을 아는 지 2500명에게 묻는다. 설문 조사 결과는 난징대학살은 거의 다 알지만,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고작 6%만이 안다고 나왔다. 우린 중국의 역사는 알지언정 대한민국의 역사를 모르고 있다.
 
<우키사마호> 영화의 한 장면

▲ <우키사마호> 영화의 한 장면 ⓒ (주)영화사메이플러스


<우키시마호>는 바다를 배경으로 삼아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려주며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도 같은 장면으로 끝맺는다. 그러나 영화를 본 관객은 처음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 미처 몰랐던, 또는 그간 잊었던 역사를 알았기 때문이다. <우키시마호>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시도만으로 가치가 있다. 목소리로 간절함을 대변한 안재모는 말한다.

"진실규명, 그리고 사과와 배상이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제는 우리가 그분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김진홍 안재모 우키시마호 다큐멘터리 백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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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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