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그러려니 한다. 추석이 되면 특선이라는 명목으로 영화들이 주요 시간대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 말이다. 그래도 한 해에 제법 흥행을 했던 영화들이니, 괜히 그런 영화들 가운데 정규 프로그램을 편성하면 '피보기 십상'이다.

심지어 특집 드라마라니. 그런데 그 무모한 도전을 KBS가 했다. 11일, 12일 이틀에 걸쳐 오후 10시 방송된 특별 기획 드라마 <생일 편지>가 그 주인공이다. 시청률은 1, 2회 2.8%, 3회 0.9%, 4회 1.4%에 불과했다(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드라마가 재미없어서? 아니 그 보다는 동시간대 방영한 '특선 영화' 탓을 해야 하지 않을까? 마치 아스팔트 사이에 피어난 민들레처럼 꿋꿋하게 <생일 편지>는 그동안 다른 드라마들이 해오지 않았던 이야기를 곡진하게 풀어냈다. 
 
 KBS 2TV 특집 드라마 <생일 편지>의 한 장면

KBS 2TV 특집 드라마 <생일 편지>의 한 장면ⓒ KBS

 
한 장의 편지로부터 시작된 옛 사랑 

시작은 한 장의 편지이다. 노년의 김무길(전무송 분) 씨가 꿈에도 잊지못한 연인 여일해에게서 생일을 축하한다는 편지가 도착한 것. 드라마는 그렇게 뒤늦게 도착한 일해의 편지를 계기로 묻어두었던 무길의 기억을, 잊혀진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소환한다.

김무길(송건희 분), 여일해 두 사람은 한 동네에서 같은 날 태어난 친구이자, 연인이었다. '혼인'을 약속했지만 어느 날 일해(조수민 분)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면서, 두 사람이 꿈꿨던 미래의 약속은 깨져버렸다. 하지만 무길은 일해가 다시 돌아올 것이란 약속을 굳게 믿으며 꿋꿋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동네 친구가 전해준 소식, 일해가 히로시마 일본 술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걸 얼핏 봤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알게 된 무길은 어떻게 해서라도 히로시마에 가서 일해를 데려오려 한다. 그런데 마침 무길의 집에 통보된 무길 형의 히로시마 징용 통지서, 집안의 장남이 적국 일본으로 끌려가야 한다는 소식에 어머니는 혼비백산 한다. 도망이라도 가라고 다그치시는데, 무길이 장남인 형 대신에 자신이 그곳에 가겠다며 나선다. 무길의 생각은 형 대신 히로시마에 가서 일해를 구해 돌아오겠다는 야무진 결심이다. 
 
 KBS 2TV 특집 드라마 <생일 편지>의 한 장면

KBS 2TV 특집 드라마 <생일 편지>의 한 장면ⓒ KBS

 
결국 히로시마에 가게 된 무길, 하지만 그의 결심과는 다르게 전쟁통의 일본에서 '징용'이란 또 다른 생사의 전쟁터에 던져지는 일이었다. 맨몸으로 험난한 현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한국인들은 배를 곯아서 혹은 빈번한 사고로 인해 생과 사의 기로에 놓인다.

그런 가운데에도 무길은 어떻게 해서든 일해를 찾으려 애쓰고 결국 그는 눈물겨운 노력 끝에 일해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토록 사랑했던 연인이지만 일해는 오랜 만에 만난 무길 앞에 냉정하게 돌아선다. 일본군 성 노예로 잡혀갔던 자신이 연인인 무길을 마주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그러나 무길은 '네가 어떤 일을 겪었어도 괜찮다'며 일해의 마음을 어루만져 돌려세운다. 

일해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는 희망에 부푼 것도 잠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지며 도시 전체가 처참하게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친다. 무길과 일해도 다치고, 원자폭탄의 분진에 노출된 상황. 하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은 아직은 히로시마를 덮친 원자폭탄의 비극을 깨닫지 못한다. 뒤늦게서야 무길과 화해한 함덕이 그들 옆에서 죽어갔어도. 

겨우 귀향선의 배편을 구했지만 알고 보니 사기를 당한 것이어서 탈 수 없게 된 상황. 무길은 불덩이 같은 일해라도 태워달라며 사정을 해 겨우 일해만 배에 태운다. 하지만 참사의 현장에서 도움의 손길을 얻은 덕분에 무길도 운좋게 배에 탔다. 그리고 무길이 배에 타지 않았다고 생각한 일해가 배에서 내리며 다시 한 번 두 사람은 비극적으로 엇갈린다. 

그리고 무길이 돌아온 고향, 그런데 고향에는 무길의 아내가 그를 기다린다. 만삭의 배를 안고서. 무길이 없는 동안 그의 아이를 가졌다며 그를 내내 흠모했던 함덕의 여동생 영금(김이경 분)이 집안의 며느리 역할을 해왔던 것. 일해를 잊지 못한 무길은 당연히 영금을 외면하다. 그러나 겁탈 당했던 수모를 무길을 핑계로 넘겼던 영금은 스스로 목을 매겠다고 나서고, 무길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영금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그리고 뒤늦게 돌아온 일해는 무길의 아이라며 자신의 아이를 내보이는 영금 앞에 뒤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무길은 6.25 전쟁의 피난길에서 폭격을 맞고 죽어가는 영금을 통해 뒤늦게 알게 된다. 
 
 KBS 2TV 특집 드라마 <생일 편지>의 한 장면

KBS 2TV 특집 드라마 <생일 편지>의 한 장면ⓒ KBS

 
뒤늦은 두 연인의 해후가 말한 비극적 역사 

무길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영금의 아들이 차라리 자신처럼 원폭을 당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서. 그리고 아들을, 그 아들이 남긴 손녀를 자신의 가족처럼 여기며 평생을 고향에서 살아왔다. 결국 그 역시도 원폭의 후유증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노년을 투병의 나날로 보내고 있는 무길에게 뒤늦게 일해로부터 생일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그로 하여금 포기했던 연인과의 해후에 맘을 졸이도록 만든다. 

4부작으로 구성된 짧은 드라마는 원폭의 후유증으로 생의 기로에 선 늙은 김무길이 생일편지를 통해 일해를 다시 찾기 위한 노력을 씨줄과 날줄로 직조한다. 무길과 그의 손녀 재연(전소민 분)과 그의 연인 구기웅(김경남 분)의 노력은 씨줄이고, 무길과 일해의 순애보적인 사랑은 날줄이다. 그 속에서도 드라마는 일제강점기의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히로시마 원자폭탄, 그리고 6.25라는 역사적 비극을 생생하게 살려냈다. 
 
 2TV 특집 드라마 <생일 편지>의 한 장면

2TV 특집 드라마 <생일 편지>의 한 장면ⓒ KBS

 
같은 날 태어나 운명처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던 무길과 일해. 하지만 우리 현대사를 할퀴고 간 역사적 비극들은 이 청춘 남녀의 사랑을 지켜내지 못했다. 뒤늦게서야 일해가 요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무길의 의붓 손녀 재연이 일해에게 달려간다. 하지만 일해는 이젠 무길도, 그 시절의 비극도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겨우 일해를 달래 데리고 왔지만, 이젠 쓰러진 무길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겨우, 흐릿한 의식 속에서 주름살 투성이의 손을 마주잡은 무길과 일해, 그들의 해후는 너무 오래 걸리고 늦었다.  

추석의 의미를 반문하게 되는 2019년의 명절,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우리의 비극적 현대사는 그 '가족'되기를 그토록 희망했던 두 연인에게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조차 빼앗고야 말았다. 추석이라서 더 안쓰러웠던 오랜 연인의 순애보, 비록 특선 영화같은 화려한 CG도, 거창한 서사도 없지만, 잔잔하게 오랜 여운을 남긴 추석 특집 드라마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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