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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 진양호공원에 있는 남인수 동상.

진주 진양호공원에 있는 남인수 동상.ⓒ 윤성효


1957년에 잡지 <삼천리>가 몇 달에 걸쳐 가수 인기투표를 실시한 적이 있다. 이 투표에서 1위 자리는 1950년대를 대표하는 현인이 차지했다. 그는 친일파 박시춘이 작곡한 <신라의 달밤>을 부를 때, "아~ 신라의 달밤이여" 하지 않고 "아~아~시시일라의 달 바밤이이여어"로 부르며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을 구사한 가수다.
 
현인에 뒤이은 2위는 <방랑시인 김삿갓>을 부른 명국환이었다. "죽창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로 시작하는 노래를 부른 가수다. 한국 가요계 최초로 컨트리풍인 <아리조나 카우보이>를 부른 사람이기도 하다.
 
뒤이어 3위는 이 글의 주인공인 남인수(1918~1962년)였다. 일제강점기 말에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으며 '가요황제'로도 불리고 있다. 그때 구축해둔 인기가 1950년대 후반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것이 <삼천리> 인기투표로 나타난 것이다. 음악 평론가 선성원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는 이렇게 말한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인기가수로는 단연 남인수가 꼽힌다. 사람들은 그를 '조선 가요사상 불멸의 기린아'라고 일컫는다."
 
남인수의 대표적 히트곡들로는 "운다고 옛 사람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으로 시작하는 <애수의 소야곡>, "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 숨 쉬는 거리다"로 시작하는 <감격시대>,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로 시작하는 <가거라 삼팔선>,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실은 부산정거장"으로 시작하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이 있다. 네 작품의 작곡자는 다 똑같이 친일파 박시춘이다.

가수가 되기 이전 남인수의 행적
 
남인수(南仁樹)는 실명이 아니다. 본래 성은 최씨다. 그랬다가 강씨로 바뀌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은 그의 인적 사항을 이렇게 설명한다.
 
"1918년 10월 18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강문수(姜文秀)로, 원래 최씨 집안에서 태어나 처음 이름도 최창수(崔昌洙)였는데, 어머니가 강씨 집안으로 개가하면서 강문수로 호적에 올랐다고 한다. 북한 인민배우 최삼숙의 아버지 최창도가 친형이라고도 한다."
 
성은 바뀌었지만, 실명이건 예명이건 이름에 '수'가 들어가는 점이 눈길을 끈다. 물가 수(洙)를 쓰고 빼어날 수(秀)를 쓰고 나무 수(樹)를 쓴 것은 다르지만, '수'로 발음되는 한자를 이름 끝에 쓴 것은 관심을 끈다.

그런데 가수가 되기 이전 그의 행적은 뚜렷하지 않다. 위 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1932년에 진주제이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공장에서 일하면서 나고야에 있는 도카이 상업학교를 다녔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1935년 무렵 중국 군관학교에 갈 목적으로 중국어를 학습했다는 본인의 회고가 있지만, 1935년까지의 행적은 대체로 불분명하다."
 
 진주시 하촌동 마을 뒷산에는 친일파인 남인수의 묘소가 '가요 황제 남인수 추모비'와 함께 있다. 옛날에는 마을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 묘소가 있었는데, 2012년 6월 이장했다.

진주시 하촌동 마을 뒷산에는 친일파인 남인수의 묘소가 '가요 황제 남인수 추모비'와 함께 있다. 옛날에는 마을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 묘소가 있었는데, 2012년 6월 이장했다.ⓒ 윤성효


행적에 관한 확인이 가능해지는 시점은 17세 때인 1935년 이후부터다. 남인수는 1935년 말이나 1936년 초에 시에론 레코드사를 찾아가 오디션을 거쳐 가수로 선발됐다. 그 뒤 1936년 2월, 라디오 방송을 통해 가수로 데뷔했다. 데뷔 음반은 그해 7월 <눈물의 해협>이란 이름으로 나왔다.
 
하지만 5개월 뒤 소속사를 옮겼다. 오케레코드사로 이적해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와 <범벅 서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남인수라는 예명을 썼다. 그의 전성시대는 그렇게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가요계에 안착한 남인수는 4·19 혁명 2년 뒤인 1962년 사망할 때까지 히트곡 제조기라 할 만한 경이로운 행적을 남겼다. 위에서 그의 히트곡들을 소개했지만, 그것은 예시에 불과하다.
 
동시에, 그는 주요한 정치적 고비 때마다 시국 상황에 맞는 '시의적절'한 노래를 부르는 행적도 함께 남겼다. 4·19 혁명이 있었던 1960년에는 미도파레코드사에서 제작한 <사월의 깃발>을 불렀다.
 
이 노래는 "사월의 깃발이여 잊지 못할 그날이여/하늘이 무너져라 외치던 민주주권"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친일파 삼위일체'로 제작되고 전파됐다. 작곡을 박시춘이 맡았을 뿐 아니라 작사도 친일파 반야월이 맡았다. 작사·작곡에 더해 노래까지 친일파가 맡았던 것이다.
 
시대 분위기에 시의적절하게 반응하는 남인수의 모습은 그 이전 시점인 남북분단 직후에도 나타난다. 1948년에 발표한 <가거라 삼팔선>이 그 증거다.
 
위에서 짤막하게 소개한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에 뒤이어 "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건만/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리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헤맨다"란 가사가 이어진다. 이 노래에 대해 이영미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책임연구원의 <한국 대중가요사>에 이런 설명이 있다.
 
 "6·25 이전에 이미 이런 노래가 나왔다는 것은 지금의 상식적 감각으로서는 꽤나 놀라운 일이다. 분단의 아픔은 일러야 정부수립 즈음, 본격적으로는 6·25 이후에야 작품에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노래는 서민들에게 분단이란 (것이) 미군정 때부터 이미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가사를 쓴 이부풍과 곡을 붙인 박시춘의 감각이 만들어낸 작품이기는 하지만, 이들의 주문을 목소리로 잘 소화해낸 남인수의 감각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시의성 있는 노래에 관심이 많은 가수였다.
 
남인수가 부른 군국가요

그런 그의 감각은 그 이전 시대 상황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침략전쟁이 한창이던 일제강점기 말에도 그는 '시의적절' 한 작품들을 골라서 불렀다. 불러서는 안 되는 일제 군국가요를 대중의 귀에 넣어주는 책임을 맡았던 것이다.
 
 남인수가 군국가요를 부르던 때에 일본군국주의는 아시아·태평양 침공을 감행했다. 사진은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USS 애리조나호가 격침되는 모습.

남인수가 군국가요를 부르던 때에 일본군국주의는 아시아·태평양 침공을 감행했다. 사진은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USS 애리조나호가 격침되는 모습.ⓒ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남인수가 부른 군국가요로는 <혈서 지원> <병원선> <이천오백만 감격> <낭자일기> <강남의 나팔수> 6곡에 더해 또 하나가 있다. 제목만 봐서는 군국가요 같지 않은 노래다. 바로 <그대와 나>라는 가요다.
 
제목만 보면 사랑 노래일 것 같은 <그대와 나>는 실은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 이념과 관련된 것이었다. 대륙침략에 나선 일본이 한민족을 전쟁에 동원할 목적으로 1937년부터 내건 내선일체(內鮮一體) 이념을 주입하는 노래였다.
 
남인수가 장세정과 함께 부른 <그대와 나>의 일본어 제목은 <기미토보쿠(ぎみとぼく)>다. 이 노래에서는 일본(內)과 조선(鮮)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 이념이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로 전개된다. '일본 벚꽃'을 뜻하는 '야마토사쿠라(大和さくら 또는 大和桜)'와 '사랑의 시'를 뜻하는 '아이노우타(あいのうた)' 같은 일본어가 등장하는 이 노래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꽃피는 고개 너머
하늘에는 새날이 밝는다
영원한 길을 닦는 지평선에서
노래를 부르잔다 기미토보쿠
노래를 부르잔다 기미토보쿠
 
그대는 반도 남아
이내 몸은 야마토사쿠라
건설의 햇발 솟는 지평선에서
노래를 부릅시다 아이노우타
노래를 부릅시다 아이노우타
 
여기는 아세아다
우리들의 희망은 빛난다
따뜻이 손을 잡고 깃발 아래서
충성을 맹서 짓는 기미토보쿠
충성을 맹서 짓는 기미토보쿠
 
 남인수가 군국가요를 부르던 때에 필리핀에서 승전을 거둔 일본군의 모습. 사진은 코레히도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환호하는 일본군의 모습.

남인수가 군국가요를 부르던 때에 필리핀에서 승전을 거둔 일본군의 모습. 사진은 코레히도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환호하는 일본군의 모습.ⓒ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한민족과 일본이 따뜻이 손을 잡고 하나의 깃발 아래 전진하자는 내선일체의 이념을 남인수는 이 노래를 통해 전파했다. 내선일체 이념이 남인수의 목소리를 통해 대중의 의식 속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 조선총독부의 의도였다. 이런 시대 상황에 맞춰 남인수는 '시의적절' 하게 처신했다.
 
이처럼 명확히 친일을 했지만, 남인수는 해방 뒤에도 거침없이 살았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시의성 짙은 노래들을 부르며 승승장구했다. 친일파가 정치 및 경제 권력을 잃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보호장치가 있었기에, 친일파였던 그가 아무런 욕도 먹지 않으면서 1957년 인기투표에서 여전히 3위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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