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폰 끼고 사는 여자, 이끼녀 리뷰입니다. 바쁜 일상 속, 이어폰을 끼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여백이 생깁니다. 이 글들이 당신에게 짧은 여행이 되길 바랍니다.[편집자말]
 '벚꽃엔딩' 장범준이 KBS < 불후의 명곡 >으로 오랜만에 음악 방송 무대에 출연했다.  (방송화면 캡쳐)

장범준ⓒ KBS2

 
몇 해 전에 한 소설가의 북토크에 간 적 있는데, 그의 어떤 말이 몹시 인상적이어서 곧장 뇌리에 박혔다. 좋아하는 노래가 무어냐고 묻자, 그가 답하기를 "누군가가 틀어주는 노래"라고 했다.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나의 의지로 선택한 노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카페에서 나는 종종 '이 노래 뭐지? 왜 이렇게 좋지?' 하면서 제목을 부랴부랴 찾아보곤 했다. 어느 날은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듣는데, 나도 모르게 가사에 '초집중'한 곡이 있었다. 바로 장범준의 '노래방에서'란 곡이었다. 지난 3월에 발표한 그의 정규 3집 더블타이틀 곡이다.

나의 경우 어떤 노래를 처음 들을 때 가사를 굳이 신경 써서 듣진 않는다. 들리는 대로 대충, 편안하게 듣는다. 그런데 장범준의 '노래방에서'는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 형식의 가사여서 다음 이어질 노랫말을 귀를 쫑긋하고 듣게 됐다. 다 듣고 났을 땐, 마치 드라마 한 편을 정주행한 느낌이었다.  

사랑의 희망과 좌절
 
 장범준 '당신과는 천천히'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장범준 '당신과는 천천히'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주) 카카오M

 
"나는 사랑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연구했지/ 여러 가지 상황의 수를 계산해봤지/ 그땐 내가 좀 못 생겨서 흑흑/ 니가 좋아하는 노랠/ 알아내는 것은 필수/ 가성이 많이 들어가서/ 마이크 조절이/ 굉장히 조심스러웠었지

그렇게 노래방으로 가서/ 그녀가 좋아하는 노랠해/ 무심한 척 준비 안 한 척/ 노랠 불렀네 어어/ 그렇게 내가 노랠 부른 뒤/ 그녀의 반응을 상상하고/ 좀 더 잘 불러볼걸 노랠 흥얼 거렸네"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을지 탐구한 남자는 자신의 못생김을 극복할 만큼 매우 강력한 매력 하나를 준비했다. 그건 노래! 잘 불러야 한다는 심적 압박을 안고 그녀를 노래방으로 데리고 가,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른다. 준비해온 티가 전혀 안 날 거라 굳게 믿는 초조한 남자와, 준비해온 티가 너무 많이 난다고 혼자 생각하고 있는 태연한 여자의 모습이 원샷으로 머릿속에 그려진다. 

"사랑 때문에/ 노랠 연습하는 건 자연의 이치/ 날으는 새들도/ 모두 사랑노래 부르는 게/ 뭔가 가능성만 열어 준다면/ 근데 그녀는 남자친구가 있었지/ 그것은 내 실수/ 그 후로 혼자 노래방에서/ 복잡한 맘을 달랬네

몇 달을 혼자 노래방에 갔는지/ 그렇게 노래방이 취미가 되고/ 그녀가 좋아하는 노랠해/ 괜찮은 척 안 슬픈 척/ 노랠 불렀네 어어/ 그렇게 내가 노랠 부른 뒤/ 우연히 집에 가려 하는데/ 갑자기 그녀가 노래방에 가자하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시작해버린 사랑. 그 짝사랑은 남자를 슬프게 해서, 아무리 안 슬픈 척 해도 그가 다니는 노래방에는 쓰라림이 가득한 노래가 울려퍼졌을 것이다. 그런데 혼자 그렇게 구슬피 노래를 부르고 나와서 걷는데, 우연히 그녈 만났고 그녀가 같이 노래방에 가자고 하는 것이다! 그녀는 단지 남자의 노래가 듣고 싶었던 걸까? 이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갈까?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 무척 궁금해졌다.
 
사랑의 확신과 열린 결말
 
'월간윤종신' 장범준, 봄의 남자 가수 장범준이 26일 오전 서울 이태원로의 한 공연장에서 열린 월간윤종신X빈폴 뮤직 프로젝트 <이제 서른> 제작발표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월간윤종신X빈폴 뮤직 프로젝트 <이제 서른>은 30년차 크리에이터 윤종신이 한 의류업체와 함께 1989에서 2019까지 시공간을 초월하는 즐거움과 공감을 음악을 통해 만들어내는 뮤직 프로젝트다.

▲ 장범준ⓒ 이정민

 
"그렇게 나는/ 그녀를 따라 걸어보지만/ 괜찮은 척 사실 난 너무 많이 떨려요/ 그녀 아무렇지 않아도/ 나는 아무렇지 않지 않아요/ 근데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는/ 자기도 지금 아무렇지 않지 않대요/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네"

아무렇지 않지 않은 건 나뿐인가 했더니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한 그녀도 아무렇지 않지 않다는 말에 남자는 어리둥절해져서 "무슨 말이냐" 묻는 이 장면! 두 사람이 걸어가며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의 하늘색, 공기, 날씨가 머릿속에서 한번에 그려졌다. 이건 필시 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다. 그녀의 한 마디, 나도 지금 아무렇지 않지 않아.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니까. 그녀도 그럼... 그린 라이트?  

"그렇게 노래방을 나오고/ 그녀를 집에 데려다 준 뒤/ 무슨 일인가 괜찮은 건가/ 멍해버렸네 어어/ 핸드폰도 없는 늦은 새벽/ 집에서 계속 잠은 안 오고/ 그녀가 좋아하던 노랠 흥얼거렸네/ 그녀가 좋아하던 노랠 흥얼거렸네"

'노래방에서'라는 한 편의 노래가 잘 만들어진 드라마라는 생각이 든 건, 결말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둘은 사귀게 됐죠'라는 식의 선명한 결론이 아니라, (확실하진 않지만 심증으로는 거의 확실한 사실로써) 앞으로 두 사람이 사랑을 꽃피울 거란 걸 알 수 있게 열어놓았다. 남자는 그녀가 좋아하는 노랠 예전에도, 그날에도, 그날의 늦은 새벽에도 똑같이 흥얼거렸지만 그건 모두 다른 흥얼거림이다. 사랑의 희망으로, 사랑의 좌절로, 사랑의 확신으로 변해가는 노래. 

우연히 라디오에서 처음 들은 '노래방에서'는 촌스럽지 않은 단편영화 같았다. 장범준이 작사, 작곡한 자작곡이니까 아마도 그의 실제 이야기이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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