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현대사에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많다. 건물과 다리가 무너지고,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과학의 발달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의식에 대한 기준을 다시 논의하는 일도 있었다. 그 역사를 통해 한국 사회는 발전했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역사가 늘 반복되듯 여전히 변하지 않고 발전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한국 근현대에 있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들을 키워드로 분류해 보았다. 추석에 가족들과 모여 이 영화들을 같이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면 의미 있는 명절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체제의 희생자] 살아남기 위한 그들만의 처절한 전투
 
 영화 <실미도> 포스터

영화 <실미도> 포스터 ⓒ 시네마서비스

 
<실미도>(2003)
감독: 강우석
출연: 설경구, 안성기, 허준호, 정재영


6.25 전쟁 이후 한반도는 남북 갈등이 끊이질 않았고 서로 적개심은 한없이 커져만 갔다. 1960년대 후반을 지나 1970년대로 접어들어서도 냉전 갈등은 사라질 줄 몰랐다. 그저 아버지가 북으로 갔다는 이유만으로 그 가족들은 빨갱이 취급을 받아야 했고, 월남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런 기회조차 얻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 누군가는 빨갱이 취급을 받다가 이런저런 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가기도 했다.

영화 <실미도>는 아버지가 월북한 이후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지내던 인찬(설경구)을 중심으로 실미도 부대에 소집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실미도 부대는 당시 중앙정보부 지시로 창설된 특수부대로 북한 김일성 주석을 비밀 암살하는 게 이들의 임무였다. 구성원은 대부분 범죄자 출신이었으며 국가는 작전 수행을 위해 이들을 실미도에 강제로 몰아넣고 훈련시켰다. 그들은 비인간적인 훈련을 참아냈지만, 참지 못한 몇몇은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사지에 내몰린 그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고, 김일성을 암살하는 작전이 성공했을 때 주어질 보상이나, 남은 가족에게 주어질 편안한 삶을 꿈꾸며 맹훈련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이들의 모집과 훈련과정을 하나하나 보여준다. 그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강제로 주어진 목표에 중독되는 과정은 흥미롭다. 그 목표는 충분히 중독될 법한, 과장된 희망이었다. 결국 정부가 그 작전을 폐기하면서 이들은 다시 강제로 사지로 내몰린다.

실제로 그들은 1971년 8월 23일 버스를 타고 서울 동작구 대방동 앞에서 정부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정부는 그들의 존재를 무장공비라거나, 군 특수범의 난동 사건 등으로 분류하며 실미도 부대의 존재를 부정했다. 비록 범죄자였지만 그들은 국가로부터 버림받았고, 사회 어디에서도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2000년이 다 되어서야, '국민의 정부'에 와서야 비로소 국가 문서를 통해 그들의 존재가 밝혀졌다. 국가 필요에 의해 강제로 모집되고 활용되었던 냉전체제의 피해자들은 30년이나 지난 시점이 돼서야 세상에 공개됐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노동자] 노동자가 처한 현실에 대한 자각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포스터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포스터 ⓒ 대우시네마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감독: 박광수
출연: 문성근, 홍경인, 김선재


한국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1960, 70년대는 더욱 그랬다. 노동자는 말 그대로 노동만 하던 시절이었고 그나마도 적은 돈으로 착취당하고도 권리를 주장하지 못했다. 그 당시 대다수를 차지했던 공장 노동자들은 자신의 처우가 어떻든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기에, 열악한 환경에서도 견디며 일을 해나갔다. 그 와중엔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고 가족들과 멀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부상을 당하거나 과노동으로 건강을 잃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1970년 11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며 분신을 시도한 인물이 있었다. 한국 사회의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전태일 열사는 작은 봉제공장의 노동자였다. 하루 14시간의 노동 속에서 그는 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당시의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고 주변에 알려나갔다. 그의 삶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 그대로 담겼다.

영화는 김영수(문성근)라는 인물을 통해 전태일(홍경인)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그가 왜 분신할 수밖에 없었는지 하나하나 보여준다. 전태일이라는 인물의 삶이 어떠했는지, 그가 겪은 노동현장의 현실은 어떠했는지 차근차근 돌아보면서 지금 우리가 처한 노동현실은 과연 정당한 위치에 있는지를 한 번씩 돌아보게 한다. 

여전히 열악한 현장에서 일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있다. 2016년 구의역 스크린 사고로 사망한 김군, 그리고 지난해 화력발전소에서 근무하다 사망한 고 김용균씨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여전히 법과 제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위치에 있다. 누군가는 죽어나가야만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현실도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전태일이 삶을 버리면서 시작한 싸움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과거 우리 노동자들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면서, 동시에 현재 노동자로서의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준다.

[시민사회] 시민들의 의식이 깨어난 순간
 
 영화 <1987 > 포스터

영화 <1987 > 포스터 ⓒ CJ 엔터테인먼트

 
< 1987 >(2017)
감독: 장준환
출연: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은 향후 이 일이 어떤 파급을 불러올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건은 보통 사람들을 비롯해 시민사회의 마음을 서서히 움직였다.

영화 < 1987 >은 박종철 학생이 고문으로 죽게 된 그 시점의 서울 남영동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처음부터 그 당시 일어났던 사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특히나 그 당시 권력자였던 박처장(김윤석)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그 사람의 악독함과 단호함을 잘 느낄 수 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인물은 박 처장이 유일한데 그가 이 사건에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일종의 사악한 동력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등장인물들의 비중은 적지만, 그들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어쩌면 영화는 사회 절대 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기관 혹은 개인이 모두 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명확히 드러나는 지점은 연희(김태리)의 시각이다. 영화 초반 연희는 그 시절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대표하는 인물인데, 그는 시위하는 다른 대학생에게 묻는다. 

"시위를 왜 해요? 가족들 생각은 안 하세요?"

당시만 해도 시위에 나가면 신변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시위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비난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고, 이는 언론보도를 통해 또 입소문을 통해 전국으로 퍼졌다. 항쟁은 결국 사회 전반을 변화시키는 촉발제가 된다. 보통 사람들이 서서히 변화해 가는 과정을 영화는 연희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 이러한 장면은 2016~2017년 한국의 촛불 시위와 연결지을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의 비리로 시작된 촛불 시위는 결국 100만 명이 넘는 인파를 이끌어 냈다. 그리고 대통령을 탄핵시켰다. 이것 또한 1987년 항쟁처럼 개개인의 참여로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다. 작은 변화였지만, 그 변화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크게 느껴진다. 영화 < 1987 >은 이런 변화를 이끌어낸 지금의 소시민들에게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희대의 사건] 낡은 시스템을 파고든 연쇄살인마
 
 영화 <살인의 추억> 포스터

영화 <살인의 추억> 포스터 ⓒ Sidus

 
<살인의 추억>(2003)
감독: 봉준호
출연: 송강호, 김상경, 김뢰하, 박해일


지금이야 달라졌지만 강력범죄에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주먹구구식 수사방식이 경찰 조직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시절 형사들은 감에 의존해 사건을 추적해 나갔다. 낡은 방식이지만 꽤 많은 사건들이 그 범주 안에서도 해결됐다. 하지만 때때로 현장은 훼손되었고 그것만으로는 진실에 다가가기 어려운 사건들도 많았다.

<살인의 추억>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화성군 태안읍에서 벌어졌던 연쇄살인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전통적인 수사방식을 쓰는 박두만 형사(송강호)와 과학적인 수사방식을 쓰는 서태윤 형사(김상경)가 화성 연쇄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영화 내내 박 형사와 서 형사는 서로 대립한다. 그 갈등은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를 더욱 확연하게 보여준다. 직감에 의지하는 박형사의 관점에서 범인의 뒤를 쫓고, 그게 막히면 다시 증거에 의지하는 서 형사의 관점에서 범인의 뒤를 쫓는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이 사건의 범인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영화 속 박 형사와 서 형사의 수사방식이 공조 형태로 합쳐졌을 때, 그 시너지는 최고조가 된다. 곧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지만 그러한 장면이 영화 <살인의 추억>에는 없다. 그토록 잡고 싶어 했던 수많은 형사들의 안타까움만이 깊숙이 자리 잡을 뿐이다. 당시 언론 보도를 통해 이 사건을 접했던 세대라면 그때의 공포감과 답답함이 생생하게 느껴질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여전히 미제로 남은 과거의 여러 사건들이 관객의 머릿속을 가득 채울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살인자에게 우리가 여전히 지켜보고 있다는 사인을 보낸다.  

[과학 윤리] 과학의 발달에 못 따라가는 윤리 의식
 
 영화 <제보자> 포스터

영화 <제보자> 포스터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제보자(2014)
감독 : 임순례
출연 : 박해일, 유연석, 이경영, 류현경


대다수 사람들은 과학 분야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다. 과학이라는 분야는 너무나 전문적인 영역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그들이 뛰어난 발견, 발명을 해내길 기대한다. 가끔 어떤 특정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유명한 학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뉴스 보도에 나오는 그들의 연구에 우리는 환호하고 더욱 큰 기대를 가지게 된다. 높아진 관심은 그가 하는 연구에 물적, 공적 지원을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엔 그것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문제는 빠져있을 때도 있다.

한국은 과학 분야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연구가 많지 않다. 그나마 가장 유명한 사람은 황우석 박사일 것이다. 줄기세포 연구로 유명세를 알린 그는 2005년 MBC < PD수첩 > 보도로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한 명의 제보자로 시작된 이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제보자>는 현실과 비슷한 상황 속에서 각 인물들의 심리가 잘 담겨있다.

주인공 윤민철 PD(박해일)는 누군가로부터 제보를 받아 줄기세포 연구의 진실을 추적하는 시사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저명한 학자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항의를 받는다. 그 제보에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믿을만한 증언과 심증이 있었기에 윤 PD는 취재를 하고 그 방송을 만들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이야기와 황우석 사건이 완전히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 당시의 분위기와 언론 취재윤리, 과학 윤리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어 영화를 보고 나서 누군가와 해당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깊이 있는 작품이다.

이 사건은 당시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고 이후 과학윤리의 중요성을 학계에 퍼뜨리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과학계 이슈였고 현재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는 일이다. 그 당시의 상황을 직접 겪지 못한 관객들이라면 그때의 논란과 갈등들을 간접적으로 살펴보고 여러 가족들과 이야기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동근 시민기자의 브런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실미도 아름다운청년전태일 1987 살인의추억 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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